[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스미스 기동대대 〈1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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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스미스 기동대대 〈1102호〉
  • 권상인
  • 승인 2022.05.16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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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1950년 1월 12일, 미국 제33대 대통령 트루먼 정부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 공산당 정부에 대항하는 방위선,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설정해 발표했다. 이 라인 안에 대한민국은 제외되었음으로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 북한이 여기에 고무되어 남한을 공산주의화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그해 6월 15일부터 북한 인민군 정규사단들이 38선 근처로 암암리에 집결했고, 38선 북쪽에는 소련에서 실어온 군수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그 가운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 전선에서 히틀러의 막강한 구데리안의 전차군단을 격파한 소련제 T-34형 탱크 400대가 철도로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여 북한에 도착해 38
선 북쪽에 배치되었다.

그해 6월 25일 장마비가 세차게 내리던 새벽 4시경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등에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탱크를 앞세워 우리 국군의 전방부대를 궤멸시켰기 때문에 국군은 6월 26일 황혼 무렵, 38선 전역에서 대부분 후퇴해버렸다. 6월 27일 밤, 인민군 빨치산부대가 서울에 침투했고 지하에 숨어있던 남로당원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인민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 밤 11시, 인민군 탱크 1대와 보병 20명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와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28일 0시 15분, 오렌지빛 섬광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천지가 흔들리는 벽력같은 뇌성에 땅이 흔들렸다. 인민군 탱크의 한강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는 한강다리를 폭파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병적부에 기록된 국군 숫자는 98,000명이었으나 한강다리가 폭파된 후 한강 이남에 새로 구축된 방어선에 집결된 패잔병 숫자는 22,000명이 전부였다.

7월 1일 오전 8시, 일본 후쿠오카 미국 공군 연병장에 400여 명의 미군들이 집합되어 있었다. 일본에 주둔해있던 미 육군 제21연대 제1대대장 찰스 B,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지휘하는 대대병력이었다. 이들이 한국전선으로 출동하기 위해 사단장인 딘 소장에게 출동신고를 하고 있었던 장면이다. “부산에 내리면 북쪽으로 전진하게. 가능하면 인민군을 수원 근처에서 저지했으면 좋겠네. 이것은 맥아더 사령관의 주문일세. 그 이상은 줄 정보가 없어 미안할 따름이네. 귀관들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지 연병장에는 불안한 병사와 장교들의 마음 같은 천둥소리가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C-54 수송기로 당시 부산 해운대 수영비행장에 내린 후, 북쪽으로 행군하여 7월 5일 수원 남쪽, 현재 오산시 내삼미동 죽미령이라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6.25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북한군이 최초로 조우하여 전투를 벌인 ‘오산 전투’다.

후쿠오카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이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5일이나 소비된 것은 당시 부산에서 오산까지의 도로는 비포장 흙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산은 초가집 300여 채가 듬성듬성한 시골동네였고 5일장이 섰던 초라한 장터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었다. 퍼붓는 장마비 속으로 동이 터올 무렵 스미스 중령의 쌍안경 속으로 수원 방향의 도로 위에 무엇인가 어른거리는 모습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인민군의
T-34 소련제 탱크 8대가 도로 위에서 일렬종대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접근해오는 광경이었다.

탱크들이 1,800m 전방에 접근하자 스미스의 방어선 후방에 배치된 곡사포 6문이 연속적으로 불을 뿜어대며 포탄을 날렸지만, 탱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유히 다가왔다. 당시 미군에는 탱크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음으로 인민군 탱크들은 거만하게 전진을 계속해왔다. 능선 위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던 스미스 중령은 일렬종대로 늘어선 탱크가 모두 30대였음을 발견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스미스 기동대대 진지 앞에 다가온 탱크들이 일제히 포신을 돌려 포탄을 퍼부었다. 또 탱크의 탑신 위에 장착된 기관총들도 일제히 방어진지 능선 위에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탱크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남하한 인민군 제4사단 16연대와 18연대 소속 탱크들이었다. 스미스 기동대대가 혼미백산하여 궤멸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탱크들과 그 뒤를 쫓는 인민군 보병부대들은 미군들을 무시하고 남쪽을 향해 그대로 가버렸다. 7월 6일 아침 동틀 무렵, 스미스는 250여 명의 부하들만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초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소련제 탱크들의 본명은 T-34 85형이다. 무게는 35톤으로 시속 55km로 달릴 수 있으며, 운전석에서 적정을 살피는 능력이 뛰어나 한국지형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탱크들을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포를 갖추지 못하고 무작정 스미스 기동대대를 오산에 진주시킨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작전계획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극동아시아의 대중공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으로 대한민국을 내다버린 미국의 극동아시아에 대한 방어계획은 혹자의 말처럼 북한의 김일성을 전쟁으로 유혹하기 위한 미끼이었을까? 이것은 규명할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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