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칼럼]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 취약성' 〈1097호(개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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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칼럼]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 취약성' 〈1097호(개강호)〉
  • 주연경 사회과학대학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 승인 2022.02.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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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경 사회과학대학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주연경 사회과학대학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큰일이 생겼다. 우리 대학 학보사에서 칼럼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온 것이었다. 이제까지 다른 교수님들이 쓰신 훌륭한 칼럼을 읽은 적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막상 필자가 칼럼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칼럼의 주제를 정했다. 주제는 바로 취약성(vulnerability).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순간을 겪는다. 조잡한 수준의 칼럼을 학교 신문에 싣거나, 수업에서 교수님의 질문에 큰소리로 오답을 말했을 때, 우리는 취약해진다. 정말로 원했던 학교나 학과로의 진학에 실패했을 때, 진심을 다했던 상대방에게 결별을 선고받을 때도 우리는 취약해진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에도, 사랑하는 누군가가 병마로 힘겹게 스러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에도 우리는 취약해진다. 앞으로도, 뒤로도 빠져 나갈 수 없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그 상황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 바로 취약성의 순간이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에 따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약성을 경험하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취약성을 우리가 수용하는 방법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가면을 쓰고, 센 척하며 자신의 취약성을 부인한다. 굳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없기에 침묵을 지킨다. 진학하고 싶었던 학교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실망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헤어질 관계에 크게 마음 둘 것 없으며, 삶이란 원래 무상하니까 죽음이라는 단어에 마음 빼앗길 필요는 없다. 쿨한 태도를 보이지만, 실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면이다. 거짓된 완벽주의이며, 타인의 불완전함에 호된 잣대를 들이대게 만드는 위선이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기대를 남발하게 만들고, 심리적인 공격을 스스로, 또 남들에게 퍼붓게 한다. 따라서 취약성을 부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외로워지고, 작업능률은 더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건전성까지 더 깊게 파괴된다. 

브레네 브라운은 취약성을 인정하고, 취약성 뒤에 숨은 용기와 노력을 인정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취약성은 용기와 노력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틀린 답을 말한 학생은, 침묵을 지키던 다른 학생들보다 수업에 더 열심히 참여한 사람이다. 입시 실패로 뼈아픈 상처를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높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이다. 연인의 배신에 깊게 상처 받은 사람은, 그 관계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사람이다. 상실을 예감하며 깊게 상처 받은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 순간을 충실하게 준비할 수 있다. 취약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취약성을 드러낼 경우, 사회적으로 비웃음당하고 고립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Horstmann 과 동료들(2018)이 수행한 로봇 연구 하나를 소개한다. 이 연구의 참가자들은 로봇과 잠깐의 인터랙션을 한 뒤, 로봇의 전원을 꺼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참가자들이 로봇의 전원을 끄려고 할 때, 로봇이 한 말이었다. 로봇은 전원이 꺼지게 되는 게 무섭다며, 참여자에게 스위치를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다. 참가자들은 이 로봇에게 어떻게 반응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위치를 내리지 않았다. 로봇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로봇은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인간이 아닌 로봇에게조차 친절하였다. 인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연민이 넘치는 존재다. 나의 취약성을 보았을 때, 공격의 기회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인이 될 뿐이지, 내가 모자라거나 부족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의뢰를 받고 칼럼으로 망신당할까 두려워했던 마음 뒤에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별로인 글일지라도 자신을 응원하는 수밖에는 없다. 따뜻한 마음으로 칼럼을 읽어주신 우리 대학 독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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