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조선사발의 비밀 〈10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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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조선사발의 비밀 〈1095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1.11.14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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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선조 11(1578)년 10월 25일 조선에서 구워진 이상스럽게 생긴 사발 하나가 일본에서 개최된 어떤 차회(茶會)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상하게 생겼다는 말은 사발의 굽 부분에 유약이 엉겨 붙어있어 다른 사발들과 차별화되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유약이 엉겨 붙어있는 이 모습을 카이라기(매화피:梅花皮)라 부르며 좋아했다. 이 사발을 일본 사람들은 이도(井戶)차완이라 부른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동의 조선 시대 옛 가마터(현 웅천 도요지전시관)에서 구워진 사발이지만 우리말 명칭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이 사발을 웅천사발이라 부른다.

웅천사발은 일본 와비다도의 명인이었던 센리큐(千利休:1522~1591)와 그의 제자인 야마 우에쇼니(山上宗二)에 의해 와비차유행의 절정기에 상징적 차완으로 추대되었다. 쇼니는 웅천사발이 “천하제일의 차완이기 때문에 간바쿠(關白: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벼슬 이름)도 가지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히데요시에게 미움을 받아 사형되었다.

일본에서 발간된 각종 역사적 사료를 종합하면 이 사발은 선조 11년 전후로 구워져 임진 왜란이 끝나가던 1597년까지 10개 정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는 무려 150여 점의 웅천사발이 전세(傳世) 되어 있다. 웅천사발의 특징은 ①아가리 넓이가 15㎝가 넘고 ②산화염에 구워져 비파색이다. ③높이가 9.3㎝ 이상이며 ④굽 안쪽의 유약 이 덜 녹아 하얀색을 띠고 있다. ⑤굽 부분의 안과 밖에 매화피가 엉겨 붙어있다.

유명한 웅천사발 3점의 이름을 열거하면 쯔쯔이즈쯔(筒井筒)차완, 호소카와(細川)차완, 우라쿠(有樂)차완들인데, 보편적 찻사발보다 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오이도(大井戶)라 부른다. 즉 우리말로는 큰 웅천사발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일본 다도계에서 큰 웅천 사발이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가격으로 차인들 사이에서 거래되기 시작하자, 작은 치수의 웅천사발들이 어디에선가 만들어져 현재 일본의 미술관에 총 15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첨병부대를 지휘했던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宗義智)는 옛 제포왜관이 있었던 지금의 진해구 제덕동에 몇 년간 휘하부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웅천 가마터 주변에서 점토를 파서 대마도로 가져갔다. 그는 이즈하라에 가마를 짓고 모조품 웅천차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마도산 웅천사발들은 그가 1615년 죽을 때까지 만들어져 규수의 하카타, 오사카의 사카이 등지에서 조선에서 만들어진 사발이라고 속여서 비싼 가격 으로 거래됐다. 따라서 오늘날 일본의 전세품 중에는 모조품인 작은 사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큰 사발들과 뒤섞여 조선에서 구워진 사발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 영 · 정조시대 일본 교토에 살던 마츠헤 이후마이(松平不昧,1751~1818)는 당시 일본다도계에서 인기가 높았던 웅천사발을 39개나 수집했다. 그 가운데 저-인구에 회자되는 기자에 몬(喜左衛門)이라 호칭되는 웅천사발도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발을 수집한 후부터 그는 악성 피부병에 전염돼 죽었고, 그 아들마저 피부병에 걸리자 그의 아내가 더 이상의 액운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교토에 있는 대덕사 고봉암에 이 사발을 넘겨주었다.

 

▲기자에몬 이도사발을 엎어놓은 사진, 매화피가 굽 안과 굽 주변에 엉겨 붙어있는 모습이다.
▲기자에몬 이도사발을 엎어놓은 사진, 매화피가 굽 안과 굽 주변에 엉겨 붙어있는 모습이다.

이 기자에몬사발은 20세기 들어오면서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일찍이 후마이는 수집한 웅천사발들을 비교 ㆍ 연구하다가 대부분이 대마도나 규수지역의 가라츠(唐津)에서 복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모조품 차완들을 ‘중흥명물(中興名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오리지널한 웅천사발과 차별화했다. 이로부터 100년 후 일본 민예운동의 제창자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는 기자에몬 웅천사발을 감상하고 조선 도공들은 “아름다움을 달성하려는 속박이 없었으므로 솔직하고 순박 하게 사발을 만들었다”라고 절찬했다. 후마이도 무네요시도 놀랍게도 기자에몬으로 호칭되는 이 국보급사발이 ‘모조품(중흥명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죽었다.

필자가 기자에몬사발을 ‘중흥명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첫째, 조선 시대 웅천에서 만들어진 사발들은 온도가 1,180℃인 것에 비해, 기자에몬은 1,250℃에 구워졌다는 사실. 둘째, 웅천사발은 웅천 가마터 주변의 백토로 만든 것인데 비하여 기자에몬은 경남 하동에서 생산 되는 고령토(Kaolin)로 성형됐다는 점. 셋째, 이 사발의 굽을 깎을 때 최후의 순간에 물레를 정지시키고 예새로 다듬어 끝 마름한 것이 관찰되므로 기자에몬사발은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대마도나 규수의 가라츠에서 만들 어진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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