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백자와 호랑이 〈10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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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백자와 호랑이 〈1089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1.08.2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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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조선의 세조와 성종 연간 중신으로 재직했던 점필재 김종직과 용제 성현은 문필가로도 유명하다. 이들은 각각 『이준록』과 『용재총화』를 저서로 남겼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준록』은 김종직이 자기 아버지 김숙자의 벼슬아치로써의 강직 · 대범함을 추켜 세운 내용으로 일관된다. 이에 반해 성현의 『용재총화』는 당시 사회상의 희로애락이 해학적으로 과장해 흥미 진하다.

세종시대가 되면서 도자기 번조기술이 진일보돼 궁중에서는 분청사기 대신 새롭게 개발된 백자만을 사용하게 된 사실은 위에 거론한 두 책이 동일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준록』은 김숙자 현감이 고령 현에 부임하여 도자기 장인들을 다음과 같이 교육했다고 적고 있다. “옛날에 중국 순임금이 황하강변에서 질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후손인 호공(胡公)도 훌륭한 그릇을 잘 만들어 주(周)무왕이 그를 진(陳)에 봉했다. 어찌 백자기 만드는 일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의 솜씨가 이렇게 거칠어서 될 말인가? 떡을 만들기 위해 쌀가루를 체로 치듯 흙을 아홉 번 체로 걸러 희고 고운 흙을 만들어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라!”고 했다.

이 결과 고령에서도 고급백자기를 생산하게 됐는데 광주(廣州)나 남원의 그릇보다 더 훌륭한 백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백자를 궁중에 바칠 때 광주와 남원의 장인들은 왕실로부터 상을 받고 고령의 장인들은 벌을 받았으나, 지금은 반대로 고령의 장인은 상을 받고 광주 남원장인들은 견책을 받게 됐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본인의 선공(先公) 김숙자의 은혜라고 『이준록』에 기록했다.

『용재총화』에 실린 백자번조기술의 내용은 『이준록』과 상반되는 것이 돋보인다.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백토를 써야 하며 정교하고 치밀하게 번조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팔도에 백자를 만드는 곳이 여러 곳 있으나 광주의 것이 더욱더 정교하다”라고 기록했다. 경상도의 고령과 광주의 백자 기술 수준을 김종직, 성현이 각각 반대로 기록하고 있는 점은 필자를 미소 짓게 하는데, 필자는 『용재총화』의 기록이 정답이라 판단한다. 왜냐하면 광주에서는 왕실의 사옹원이 관리했으므로 전국에서 으뜸가는 장인과 백토를 선별해 백자를 번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의 기록 중 백미는 역시 『이준록』에 실려 있다. “선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졸(拙)하다고 하는데 나의 이런 성품은 진실로 내가 가진 큰 보배다. 나는 이 말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너 또한 나의 자식이니 나의 성품을 닮아 졸하기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단종 3년(1455) 김종직이 아버지 친구 김윤덕을 청도공관에서 만나 선공이 고령 현감 재직 시(1442~1446) 있었던 사실을 전해 들었는데 그 내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또 유머러스함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공이 김윤덕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적에 고령현감으로 있을 때 당시 경상도 순찰사인 김종서가 현에 들어와 나를 불러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그때 김종서가 책상 위에 놓여있는 백자를 가르치며 ‘귀 현의 백자가 아주 좋다’라고 반복하여 칭찬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백자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졸하게도 끝내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머리를 조아리며 예,예,, 하며 물러나왔 다. 그 후 김종서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의 졸함을 책망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말들이 나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한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윤덕이 나에게 선공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문종의 고명대신 김종서는 본래 문관 출신이지만 동북면에서 특히 사나웠던 두만강 양안의 적(赤)여진과 대치하면서 6진을 개척한 문무를 겸비한 호랑이 같은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 10월 손수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추살한 후 계유정난을 마무리했다.

밥을 먹으면서 책상 위의 백자를 쳐다보며 김종서가 칭찬을 연발한 것은 김숙자 현감으로부터 백자를 뇌물로 받고 싶은 욕망으로 해석된다. 김종서는 경상도 순찰사, 즉 도지사였기 때문에 군수 격이였던 고령 현감의 고가점수를 주는 직위에 있었다. 그러나 김종서가 백자를 갖고 싶어 애원 같은 칭찬과 은연 중 압력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한 김숙자의 처세가 즉 ‘졸’이 아닐 까? 대쪽 같은 선비의 지조였을까? 아니면 자존심이었을까?

조선조정에서 영원한 진보였던 김종직은 죽은 지 6년 후,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을 지은 죄로 부관참시 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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