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가벼운 책임 〈1088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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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가벼운 책임 〈1088호(종강호)〉
  • 이유리
  • 승인 2021.06.0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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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그러니까 은정 씨도 희생을 해야지. 이렇게 된 데에는 당연히 은정 씨 책임도 있는 거야. 더 큰 거 얻으려면 당연히 고통도 분담해야지. 안그래?”

퇴근 직전 나를 집무실로 불러낸 대표는 느닷없이 ‘고통의 분담’을 요구했다. 요는 이러했다. 서비스를 런칭한 지 벌써 3개월 째인데 내가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서비스 초기, 내가 주도한 이런저런 마케팅 전략과 기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 서비스는 당신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이 자명하고, 서비스가 성공할 경우 당신의 커리어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서비스가 다시 정상화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지금 당장 연봉이 삭감되고 조직 구조를 축소하는 거, 그거 나중 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일장연설을 듣고 문밖을 나서며 생각했다. ‘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더라.’

사실 처음은 즐거웠다. 내가 기획한 서비스가 대표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MZ세대가 사랑한다는 숏폼 콘텐츠를 다루겠다는 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과 합병, 상장 소식이 들려오는 '리빙&패션' 분야를 선택했다는 것도 대표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부분이 아쉬워”

기획이 조금씩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 것은 ‘아쉽다’는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차별화, 차별화, 차별화. 대표는 차별화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다른 플랫폼과의 차별화를 위해 숏폼보다는 디테일한 설명을 다룬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말고 이른바 ‘유럽에서 잘 나가는’ 고급스러운 리빙 아이템을 세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MZ세대를 위한 플랫폼에 MZ세대가 사라지고, 가볍고 경쾌한 리빙 플랫폼이 백화점스러운 플랫폼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런칭을 한 뒤에도 헛발차기는 계속됐다. 만나고 온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에 따라 서비스 타깃이 시시각각 변경됐고, 수많은 외부 운영사의 제안에 따라 전략을 수정 또 재수정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만든 서비스를 살펴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무슨 서비스였더라?’

나름의 성과가 나오더라도 대표가 설정한 방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그냥 ‘없는 일’로 치부됐 다. “내가 언제 그런 자잘한 일 하라고 했어요?” 런칭 이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人疾舍, 其田而藝人之田, 所求於人者重, 而所 以自任者輕 (인병사, 기전이운인지전, 소구어 인자중, 이소이자임자경)

오랜만에 펼쳐본 <맹자> 진심(盡心)편에는 서비스를 기획하고 팀원들을 모으던 시기에 내가 밑줄 쳐둔 문장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은 버려두고 남의 밭을 김매는 것이니,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겁게 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것은 가볍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해석도 아기자기한 글씨로 적어두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었다. 나를 좀 더 희생하고, 이를 통해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 좀 더 행복한 구조를 만들겠다고.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관리자’인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이건 정말 새로운 시작일까, 아니면 그저 끝을 위한 과정에 불과할까’ 대표가 말한 ‘운영 효율화와 인원 조정’을 명목 삼은 권고사직을 팀원들에게 통보하러 가는 길. 나는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 선택으로 무엇을 책임 져야 하는지 못내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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