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잘 꾸며진 허구는 팩트에 앞선다 〈10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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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잘 꾸며진 허구는 팩트에 앞선다 〈1087호〉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 승인 2021.05.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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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작은 책 읽기 모임을 야외에서 열면서 윤동주 시인 문학관을 집결지로 정했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자하문 근처 인왕산 자락이다. 오래전부터 봐 왔으나 ‘이곳에 웬 윤동주 문학관?’ 하며 지나치던 곳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시인이 연희전문을 다니다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누상동에서 잠시 하숙을 한 인연이 있단다. 해방 뒤 시인의 유고 시집 『하 늘과 바람과 별과 시』을 냈던 국문학자 정병욱 교수에 따르면 누상동에서 하숙할 당시 이곳은 시인이 즐겨 산책하던 곳이라고 한다.

문학관은 규모가 작았다. 제1전시실인 ‘시인채’는 동네 북카페만 했다. 전시품도 소박했다. 시인이 애장했다는 몇 권의 시집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몇몇 육필 원고. 북간도 용정, 시인의 고향 우물에 있었다는 저 나무판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제2전시실 ‘열린 우물’ 엔 아예 전시품이 없었다. 아니, 찾아보니 하나 있긴 했다. 사각형으로 뻥 뚫린, 천장 대신 보이는 하늘이었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며 우러르던 하늘,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가 있는 하늘, 별이 바람에 스치기도 할 바로 그 하늘이었다. 다음 전시실은 ‘닫힌 우물’, 시인의 생애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하는 곳이자 훗날 감옥에서 마감했던 시인의 삶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했다. ‘시인채’, ‘열린 우물’, ‘닫힌 우물’을 천천히 돌며 나도 모르게 ‘서시’나 ‘자화상’ 같은 시를 떠올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중략)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문학관 뒤 ‘시인의 언덕’에는 바람이 불었다. 여남은 그루 심어진 소나무 사이의 시비 앞에 서니 남산과 관악산, 북악산에서 남산에 이르는 서울시 중심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인이 산책길에 보았을 1940년대 경성의 풍경은 어땠을까? 하늘과 별, 교회 첨탑에 걸린 십자가는 그때도 보였겠지. 문학관은 철거된 옛 시민아파트의 상수도 가압장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시인채’는 기계실이 있던 곳이고 ‘열린 우물’, ‘닫힌 우물’은 콘크리트 물탱크였다. 시인이 잠시 하숙한 인연 하나를 붙잡아 옛 상수도 가압장 자리에 문학관을 조성하고, 버려진 기계실과 물탱크에 그의 삶과 시를 담아낸 솜씨는 담백하면서도 빼어났다.

사실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그가 4년 가까이 머문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다. 시인의 유족이 육필 원고와 유품 전체를 기증한 곳도 모교다. 뒤늦게 학교는 시인이 머물던 기숙사를 고쳐 윤동주 기념관으로 만들고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잠시 머물던 하숙집 근처에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선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제대로 보고 느끼기 위해서는 유품과 자료가 더 많은 이 기념관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시인을 보다 가깝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기념관이 아닌 문학관으로 보인다. 앞으로 시인을 상징하게 될 공간도 기념관보다 문학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버려진 상수도 가압장으로 만들 어낸 지자체의 스토리텔링이 유서 깊은 대학의 스토리텔링을 앞선 것이다.

지자체, 기업, 학교, 개인 가릴 것 없이 스토리 텔링 바람이 휩쓴 지 10여 년. 실낱같은 인연을 빌미로 생가를 복원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기념관을 조성한 사례는 공해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 2012년 종로구나 서울시에서 조성했을 윤동주 문학관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대다수 스토리텔링이 예산만 낭비한 실패작인데 비해 소수지만 성공한 스토리텔링도 있다. 관건은 해당 스토리텔링이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냐, 허구이냐가 아니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잘 꾸며졌느냐, 얼마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내느냐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사피엔스의 고유한 특질은 허구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믿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스토리텔링은 글쓰기나 말하기, 영화, 연극, 게임, 노래 등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허구를 바탕으로 종교, 국가, 법, 기업과 같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냈다. 잘 꾸며진 허구는 팩트에 앞선다. 스토리텔링에도 기법이 필요하다. 긴장을 조성하라, 궁금증을 유발하라, 진정성으로 승부하라, 공감을 자아내라, 의미를 부여하라…. 당장은 쓸모도 없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힘 있는 스토리텔링을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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