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작은 후회 〈10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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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작은 후회 〈1086호〉
  • 이유리
  • 승인 2021.05.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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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그, 미안하지만…, 은정 씨는 우리 회사랑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못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알죠?”

수습만 2개월 하고도 3주차 되던 금요일. 회사 앞 카페로 나를 불러낸 S 팀장이 쭈뼛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 말 있으면 사무실에서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카페로 불러내는 거지?’ 13층 사무실 앞 엘리베이터부터 카페로 향하는 대로변을 걷는 내내 들었던 걱정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네, 알죠. 네네, 아뇨. 제가 많이 배웠죠. 감사해요. 네” 잘리는 자와 자르는 자가 나눠야 할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스물 두 번의 이력서 제출과 세 번의 면접 끝에 얻어낸 첫 번째 수습직. ‘혹시나’ 하는 가벼운 불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지난 기수는 전원 합격이었다”라는 선배의 말에 내가 잘릴지도 모른 다는 생각은 차츰 지워가던 시점이었다. 기껏해야 10분 남짓한 시간, 조금은 무성의하고 기계적인 답변을 이어나가는 동안, 만 가지 생각이 이어졌다. ‘이따 엄마한테 어떻게 얘기하지’하는 걱정부터 ‘지난번에 면접 오라던 회사에 반차라도 내고 가볼걸’하는 후회까지.

우습게도 머릿속을 가장 많이 헤집어 놓은건 어제 긁은 카드값이었다. 나, 그러니까 제 앞날이라곤 하루 앞도 못 보는 이 바보 같은 놈은 “곧 월급날이 다가온다!”라며 렌즈에, 무선 이어폰에, 사고 싶던 옷까지 잔뜩 결제하지 않았던가. ‘아직 배송 안 된 건 그냥 취소할까? 아냐, 어쨌든 이번 달 월급은 나오는 거잖아. 근데 그럼 다음 달 생활비는 또 어쩌지?’ 면담이 끝나는 순간까지 머릿속에선 아직 배송되지 않은 이어폰과 포장도 채 못 뜯은 셔츠 두 벌의 취소/반품 버튼을 누르고 또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 설명한다. 그는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러한 특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보았 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떠맡아 자신의 ‘있음’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자신을 죽음을 향해 내던짐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밝힌다는 것이다. ‘후회’는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특히 지금의 삶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놓쳐 버렸을 때, 그리고 그 놓침으로 인해 탓함을 떠맡아 일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후회란 과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닌 ‘미래’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회는 불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인간은 나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전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불안해하며, 그 불안으로 인해 더 큰 가능성을 놓침으로써 또다시 후회한다.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인지 몰라 불안해하고, 완성하지 못할 것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다시, 또 후회한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의심을 거둔 것도, 이로 인해 다른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도,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취해 분에 넘치는 쇼핑을 한 것도 모두 후회 스러웠다. 아니, 이 순간만큼은 나란 존재 자체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수습기간 중 해고됐다면 실업급여를 수급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까요? 실업급여란 고용보험 가입 근로자가 실직해 재취업을 하는 기간에 소정의 급여를 지급하는 제도인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무 기간이 3개월 이내로 짧았더라도 권고사직이나 해고 모두 실업급여 수급이 가능합니다. 다만, 기본적인 조건 충족은 필요합니다. 고용보험 가입이 되어 있어야 하고, 현재 직장이 첫 회사라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직하기 전 18개월간 이전 직장에서 180일 이상 근무한 이력이 있어, 앞으로도 직장 생활을 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습 실업급여’의 검색 결과는 나를 설레게 했다가, 또 나를 절망 속으로 빠뜨렸다. 고작 무선 이어폰이 뭐라고…. 후회하고, 불안해야 하는 내가 또다시 원망스러웠다.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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