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에 대한 예의 〈10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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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에 대한 예의 〈1086호〉
  • 김진옥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 승인 2021.05.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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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에는 항상 예의가 있다. 예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예절’ 혹은 ‘관습’이라 하기도 하고 좀 더 넓게는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예의’는 한자로 ‘禮儀’로 기록한다. ‘禮’ 안에는 ‘경외’나 ‘존경’이 들어있고, ‘儀’ 안에는 옳고 마땅 하게 여겨지는 ‘거동’과 ‘행위’가 함의되어 있다. ‘예의’는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을 담고 마땅히 행할 바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의의 영역은 생각보다 넓다. 동물보호운동가 이소영 씨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예의』란 책을 출간하였다. ‘반려동물’이라 부르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예의는 요청된다. 우스갯소리로 ‘날씨에 대한 예의’를 말하기도 한다. 이는 요즘같이 싱그러운 오월에 산과 들을 동경하는 우리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반찬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자면 ‘음식에 대한 예의’, ‘시험에 대한 예의’ 등등, 사람들의 삶에 예의가 필요한 영역은 예상 외로 많다.

조금 폭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시간’도 우리에게 예의를 요구하고 있다. 시간이야 말로 우리 존재의 근원에 연결된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은 우주와 만물에 생동감을 주어 시작과 끝을 규정하며 존재의 위치를 규정하는 절대자의 성질을 담고 있다. 고대의 신에 대한 담론 에서 시간을 ‘크로노스’로 신격화한 것은 시간이 가진 위상을 잘 말해준다. 시간이 멈추면 보이는 세계는 실존의 자리를 빼앗기고 허공의 세계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증하는 성경에서도 예수는 처음(알파)과 끝(오메가)으로 계시된다. 시간은 신에 대한 묵상에 버금가는 진중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다.

신의 운행과 손길을 대변하는 듯한 시간의 모습은 만물에게 주어진 ‘속도’를 통해서 엿볼 수있다. 우주 만물들에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속도가 있다. 항상 멈춰진 것처럼 느껴지는 지구는 빠른 속도로 자전하며 우주 공간을 초속 30km로 달려간다. 실로 엄청난 속도이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세밀한 시간이 만약 조금이라도 빨라지거나 느려진다면 엄청난 재난이 닥칠 것은 분명하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는 각자의 생명시계가 주어지고 삶의 속도가 다르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빨리 살다 가고, 몇 백 년 이상을 한 자리에서 천천히 사는 나무들도 많다. 만물의 가진 고유한 시간들과 삶의 속도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만물이 자기 속도를 따라 자기 시간을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 빠른 삶을 무척 선호하고 있다. 1990년대 『Time』지에 「속도증후군 (Express Syndrome)」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이 글은 당시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전쟁과 같은 ‘속도경쟁’을 우려하며 지적하였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빠른 속도’에 대한 요구는 기술 산업 시대의 경제논리와 맞물려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빠른 것을 선호하고 있다. 다 참아도 느린 것은 못 참는 시대가 되었다. ‘빠름’은 어떤 종교적 신념과 같이 굳어져, 느린 것은 폐물로, 사회악으로까지 추락하였다.

기술과 산업의 발달에 있어서 ‘빠른 속도’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기술발달과 경제 원리를 앞세워 느리게 제 속도로 가는 어떤 이들을 우리 사회가 조롱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한다. 만물은 자신들이 걸어가는 고유한 속도가 있다. 토끼에게는 자신만의 달려가는 속도가 있고, 거북이에게도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빨리 달려가는 토끼의 속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느리게 기어가는 거북이의 속도를 거북해 하는 것은 ‘예의’라 할 수 없다. 특히 교육의 현장에서 조급한 ‘속도전(速度戰)’은 배우는 학생들이나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나이도 같고 조건도 상황도 같지만 배우고 연단하여 성장하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조금 여유를 두면 모두가 제 속도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야호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어느 새 비 그치고 해가 반짝, 아직도 한 뼘을 못 갔구나”*

느릿느릿 제 속도로 기어가는 달팽이에게 친근한 예의를 보내며 바쁘게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속도를 재어볼 일이다.

*“ 달팽이의 하루”(조원경 작사, 김진성 작곡), 2008년 제20회 KBS 창작동요제 대상 수상곡.

 

김진옥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chinook1@mju.ac.kr
김진옥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chinook1@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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