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오늘, 그날을 기억합니다 〈10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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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오늘, 그날을 기억합니다 〈1084호〉
  • 김태민 기자 / 이승환 수습기자 / 한혜성 수습기자
  • 승인 2021.04.0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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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강경대 열사

▶ 1972년 2월 서울 출생
▶ 1991년 3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 1991년 4월 24일 상명여자대학교의 학원민주화 집회에 지지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총학생회장이 연행되자, 명지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임 -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고 진압했으며, 학생들은 농성을 전개
▶ 1991년 4월 26일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가. 이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구타를 당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
▶ 1991년 5월 20일 오랜 기간의 장례 투쟁을 거쳐 망월묘지에 안장

 

 

‘열사’는 나라를 위해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해 싸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대학에도 열사라 불리는 이가 있다. 30년 전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및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다 산화한 강경대 열사가 바로 그다. 본지는 30년 전 그 날을 기억하고 강경대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재보도한다.

 

우리 대학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 열사, 심장막 내출혈에 의해 사망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지난 1991년 4월 26일, 오후 5시 10분경 당시 경제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 열사가 인문캠(당시 서울캠퍼스)에서 시위 도중 사복 경찰 4명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및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경찰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시위 진압을 시도하자 학교 쪽으로 후퇴하려 높이 1.5m 담을 넘으려다가 사복경찰들에게 잡혀 쇠파이프 난타를 당하고 방치됐다. 당시 MBC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오후 5시 20분쯤 사복체포 조 대원 4명이 붙잡힌 강경대 열사를 쇠파이프와 강목 등으로 마구 때린 뒤 실신한 그를 2m 정도 끌고 가다가 길 위에 버려둔 채 철수했다고 경찰이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쓰러진 강경대 열사를 동료 학생들이 발견했지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당시 검안의로 있던 최형석 의사의 소견에 의하면 왼쪽 가슴 아래쪽에 길이 15cm, 가장 넓은 폭이 3cm인 상처가 직접 사인의 소지가 된 것으로, 왼쪽 가슴부위에 쇠파이프가 타격을 주자 동맥이 끊어지면서 출혈이 일어난 것으로 판명됐다.

▲사진은 지난 1991년 5월 1일, 인문캠에서 강경대 열사의 운구 행렬을 뒤따르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출처/ 오픈아카이브)

 

죽음 불러온 시위 배경은?

  당시 우리 대학의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으로 인해 우리 대학 학우들은 등록금 투쟁을 이어왔다. 우리 대학은 지난해 대비 16%라는 등록금 인상률을 적용시켜 거의 모든 학생이 백만 원이 넘는 액수의 등록금을 납부하게 했다. 이에 용인과 서울 양 캠퍼스의 연석회의를 위해 서울로 올라오던 국어국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용인 총학생회 총무부장 서창훈 학우가 4월 4일 불법 연행 · 구속됐고, 이후 24일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인 무역학과 4학년 박광철 학우가 상명여자대학교 지지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불법 연행 · 구속됐다.

  총학생회장이 불법 구속되자 우리 대학 학우들은 용인과 서울에서 「총학생회장 구출투쟁 집회」를 가졌고, 철야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다 26일, 서울캠퍼스에서 교내 집회 후 교문 밖 가두투쟁을 하다가 강경대 열사가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자, 이런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보수연합구도를 구축하려는 목적에서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단행했다. 그 결과, 국회 개헌선인 2/3가 넘는 218석을 확보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이 구성되고 노태우 정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진보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고, 학내 학원 자주화투쟁에도 개입해 학생 운동권을 거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진행된 시위는 노태우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동료 학우들이 쓰러진 강경대 열사를 교내 보건소로 옮기는 모습이다. (출처/ 오픈아카이브)

*집권세력 내지 정부가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을 위하여 사회 질서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하여 조성한 보수적 국면의 정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경대 사건으로 시작된 5월 투쟁

▲1991년 봄에 일어난 5월 투쟁을 다룬 영화의 스틸 이미지다.
▲1991년 봄에 일어난 5월 투쟁을 다룬 영화의 스틸 이미지다.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지 3일 후인 1991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승희 열사가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도중 분신하며 일명 ‘분신정국’이라고 불리는 5월 투쟁이 시작됐다. 노태우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 기간에 전국적으로 약 2,300회의 집회를 열었고, 여러 시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투쟁을 이어갔다.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열사가 ‘故 강경대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 중 분신했고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 열사가 ‘강경대학우 폭력 살인 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중 분신 후 투신했다. △6일, 강경대 치사사건에 대해 옥중 단식 농성을 하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열사가 노조탄압 상황에서 의문사를 당했고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열사가 서강대학교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후 투신했으며 △10일, 윤용하 열사가 전남대학교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후에도 분신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18일, 이정순 열사가 ‘강경대열사 1차 장례투쟁’ 중 연세대학교 정문 앞 철교 위에서 분신 후 투신했고 △같은 날 보성고등학교 김철수 열사가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했다. △22일, 정상순 열사가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 위에서 ‘노태우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 후 투신했고 △25일, 성균관대학교 김귀정 열사가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운명했으며 △8월 18일, 대구대학교 손석용 열사가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야간강좌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했다. 1991년 봄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청년들의 연기로 자욱했던 시기였다.

▲사진은 1991년 5월 18일, ‘강경대열사 1차 장례투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한 이정순 열사를 후송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출처/ 오픈아카이브)

 

30년이 지난 지금, 강경대 열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1991년 4월 26일 이후 약 30년이 지난 지금, 학우들에게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사진은 강경대 열사가 쓰러진 위치에 조성되었던 추모 동판의 모습이다. 현재는 인문캠 복합시설 공사로 인해 동판이 ‘강경대 민주광장’으로 이전된 상태다.

 

  지난 1992년 11월 13일 강경대 열사가 쓰러진 위치에 그를 기리는 추모 동판이 세워졌다. 그러나 지난 2018년 12월 18일, 인문캠 복합시설 신축공사가 시작되면서 추모 동판이 있던 위치도 공사 범위에 들어가게 되며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우리 대학과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는 지난해 10월 31일, 추모 동판을 보존하고자 인문캠 학생회관 옆 위치에 ‘강경대민주광장’을 조성했다. 『명대신문』 1078호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강경대민주광장 조성 기념해」기사에서 유덕종 (무역 88) 동문은 “강경대 열사가 산화하신 그날, 학원 자주화 투쟁과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해 집회를 시작한 곳이 추모광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강경대 열사가 쓰러진 위치에는 표지석을 설치하고 학교 앞 거리를 강경대 열사 거리로 조성하기로 했다.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지윤경(사학 18) 학생대표는 표지석 설치와 관련해 “서대문구에서 도로 점용 허가를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한 상황이다. 공사가 끝난 이후 우리 대학 측과 더욱 자세히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강경대 열사 거리 조성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 중인 상황이지만 (학교앞 거리를) 강경대 열사 거리로 선포하자고 서대문구와 이야기했고, 적극적으로 지원 해주기로 약속했다. 서대문구 구청장과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라고 답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31일, 학생회관 옆 공간에 조성된 ‘강경대 민주광장’의 모습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31일, 학생회관 옆 공간에 조성된 ‘강경대 민주광장’의 모습이다.

 

  본지가 우리 대학 학우 954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31일부터 1일까지 이틀간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 보면 우리 대학 학우 47.27%(451명)만이 강경대 열사를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를 모른다고 답한 이들은 52.72%(503명)로, 절반이 넘는 학우들이 강경대 열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강경대 열사가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질문에는 31.02%(296명)의 학우들만이 알고 있다고 답했고, 68.97%(658명)의 학우들이 모른다고 응답했다. 대부분의 학우들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학우들은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까. 본지는 학우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개방형 질문을 두고 답변을 살펴봤다. 한 학우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규모 저항 중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을 거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은 지금의 저희가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학생들이 정권을 바로 잡기 위해 저항하고 의견을 표출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희가 과연 학교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라고 밝혔다. 또다른 학우는 “당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내건 채 목소리를 냈던 강경대 열사, 그리고 당시의 모든 학생들 덕분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벚꽃이 흩날리던 30년 전 그날, 강경대 열사는 세상을 떠났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학우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기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더 많은 학우가 그를 기억할수록,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그의 삶과 죽음의 가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를 기억함으로써 그가 꿈꿨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에 동참할 수 있다.

  명대신문도 강경대 열사 추모 특집호를 내던 30년 전과 다름없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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