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뭘 해도 괜찮습니다〈10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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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로그] 뭘 해도 괜찮습니다〈1068호〉
  •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03.29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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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버지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시평의 칭찬까지도 시집의 서문을 받은 사람까지도 내가 말 한 정치 의견을 믿지 않는다. 봄은 오고 쥐새끼들이 총알만 한 구멍의 조직을 만들고 풀이, 이름도 없는 낯익은 풀들이, 풀 새끼들이 허물어진 담 밑에서 사과 껍질보다 얇은 시멘트 가죽을 뚫고 일어나면 내 집과 나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들렸다 놓인다. 요는 정치 의견이 맞지 않는 나라에는 못 산다.”

  시인 김수영의 시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일부다. 해석은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무책임하게도 시를 옮긴 건, 이 시가 연극에 등장해서다. 연극의 주인공은 둘로, 김두식과 그의 딸 김수현이다. 연극은 아버지의 과거와 딸의 현재를 번갈아 보여준다.

  먼저 김두식의 개인사는 현대사의 굴곡 그 자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950년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강제징집돼 장교로 임관하여 전쟁에 참전한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좌익 활동을 한 혐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이후 그는 시인의 꿈을 품고 넝마 인생을 사는데, 앞서 소개한 시는 그 장면에 등장한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시간은 흘러 1970년대 말. 중년이 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고문했던(아마도) 중앙정보부 직원이 되어 있다. 무엇이 그를 변절하게 했을까?

  이후 연극은 김두식이 건설업에 손대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일화, 그러던 중 터진 두 번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딸과 단둘이 살게 된 일화 등을 들려준다. 한때 진보를 꿈꾸었으나 어느 순간 보수주의자가 된 아버지와 일상화된 부조리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딸. 그러나 둘의 불화는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그는 미투 사건을 두고 ‘관계에는 계산이란 게 없을 수 없다’며, 그것이 일종의 교환이었고 거기에 암묵적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인물이다. 김수영은 ‘정치 의견이 맞지 않는 나라에서는 못 산다’라고 했다. 하물며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건.

  한편 주인공 김수현은 작품을 쓰고 연출한 극단 미인의 김수희 자신, 혹은 분신 같은 존재다. 그는 2018년 공연계 성폭력 문제를 폭로하고 이후로도 이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전부터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올렸으며, 검열, 분단, 적폐 등 사회적 의제를 주제로 하는 ‘권리장전’ 시리즈의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이번 연극은 그간 그의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 〈아버지들〉에서 그는 미투 사건의 중심에 서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과 이에 관한 생각을 녹여내었다. 지지 선언을 부탁하러 선배를 만났다가 겪은 사건, 재판정에 증인으로 섰던 일,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에서의 일화 등. 함께 공대위 활동을 했던 후배가 “언니도 안 보고 싶어. 안 보고 살아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는 지금 그냥 또 다른 불같아. 뜨겁고 무섭고 감당이 안 돼”라는 대사는 가슴을 후벼판다. 외에도 이 작품에는 당사자가 아니고선 헤아리기 쉽지 않은 일상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 괴물이 되고 있지 않나?’라고 자성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수현은 ‘나도 제대로 된 사과 받고 싶어. 진심 어린 리액션도. 뭘 해도 괜찮다는 위로도.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 있다는 따뜻한 응원의 말. 왜 나는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냐고’라며 고충을 토로한다. 공연 속 미투와 지금 여기의 텔레그램 박사방 사건을 구분해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이미 말들이 넘치고, 거기에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신 피해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뭘 해도 괜찮습니다.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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