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숙인 허리 <1048호>

2018-11-25     임정빈 기자

지난 23일,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가 허리 숙여 사과했다. 반도체 공장 백혈병 관련 논란에 대해 삼성전자 측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말이다. 그는 분쟁의 조속한 해결과 작업장의 안전관리에 대한 노력이 충분치 못했다고 인정했다. 언뜻 보면 업무상 재해에 따른 단순 사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남다르다.

11년 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유미(23)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유가족은 반도체 공장 내 인체유해인자와 황 씨의 죽음이 관련 있다며 산업재해 판정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을 인정할 경우,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생산성 차질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관련 소식이 사회에 퍼져나갔고 황 씨 외에 피해자들과 유가족 중심으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시민단체인 일명 ‘반올림’이 발족했다. 하지만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이었다. 삼성전자는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때로는 회유를, 때로는 협박을 통해 사건을 그저 무마하려고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무마되는 듯했다.

지난 2011년, 삼성전자는 해외 유수의 대학 소속 연구진들로 구성된 미국 인바이론 사에 기흥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 근무 환경에 대한 연구 조사를 의뢰했고, 문제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바이론 사는 기흥 반도체 공장에 대해 인체유해인자 노출 수준이 매우 낮으며 회사가 높은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반올림은, 이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문제 해결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비인도적 행위들이 드러났고, 올해 7월 마침내 양측은 제3 기구인 조정위원회의 조정권고안을 무조건 수용하는 데 합의했다. 11년 만에 숙인 허리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같은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같은 증상으로 사망했다. 그것도 국내 제일의 기업으로 여겨지는 삼성 소유의 공장에서. 그런데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데만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이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