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호]기자윤리

2018-05-14     권민서 기자

세월호 추모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던 중, 안산 영결추도식의 희생자 영정 사진 앞에서 두 명의 유가족이 서로를 감싸 안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옆 사람들이 찍히긴 했지만, 유가족의 슬픔이 잘 드러났기에 무심코 “와 잘 찍었다 옆 사람들이 안 나왔으면 더 괜찮았을 텐데”라고 내뱉었다. 이후, 기사를 작성하려는데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필자는 그들의 슬픔을 최대치로 드러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노력 했으며, 그 결과물을 보고 ‘잘’ 찍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도 생생하다. 국회의원들의 순서가 끝나고 단원고 유가족의 헌화 분양이 시작되자 이전과 다르게 기자들의 카메라 소리가 엄청났다. 모두들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슬픔을 카메라에 한 컷이라도 더 담으려 했던 것이다. 2014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피노키오’에서는 기자의 공익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극중 빙판길 취재를 위해 꽁꽁 얼어붙은 가파른 계단 앞에 등장인물들이 도착하고, 한 남성이 넘어지자 선배 기자가 “아이 아깝네. 제대로 넘어 졌는데 놓쳤네”라고 말한다. 이어 계단을 내려가려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주인공이 빙판길에 연탄을 깨자,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방송국에 복귀한 주인공에게 시경캡(시 경찰청 출입기자)은 “기자는 지켜보는 게 공익이다”라며 그들을 혼낸다. ‘기자(記者)’를 글자 그대로 정 의하면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사회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 기자가 해야 할 일이고 언론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자윤리와 언론의 중립성 문제를 직면할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