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인간의 문학을 대체할 수 없다 〈1160호〉
Gemini, Chat GPT, Claude 등 생성형 AI가 상용화 되어 무엇이던 창조할 수 있는 세상이다. 과거에는 전문적인 편집을 배워야 영상을 제작할 수 있었고, 코딩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학과에 진행해 전문 지식을 습득해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생성형 AI에게 프롬포트 몇 자만 주면 금새 해낸다.
그래서 글은 어떨까 생각했다. 문장이야 AI도 잘 쓴다.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문단은 매끄럽게 이어진다. 슬픔에 대해 써 달라고 하면 슬픔에 대해 쓰고, 이별에 대해 써 달라고 하면 이별에 대해 쓴다. 어쩌면 인간보다 명료하게 글을 잘 쓴다. 다만 그 글에는 누가 슬펐는지가 없다. 이별의 문장은 내놓아도 AI는 이별을 해 본 적이 없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을 읽었을 때를 떠올린다. 이 소설은 죽은 연인 곁을 떠나지 못하는 담의 이야기다. 줄거리만 옮기면 기괴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고, 담은 그의 몸을 먹어서라도 곁에 남으려 한다. 이 정도 요약은 AI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더 자극적으로 다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덮고 한참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줄거리가 아니었다. 구와 담이 함께 보낸 시간, 서로의 곁이 전부였던 두 사람의 사소한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에 마지막 선택이 괴물 같은 짓이 아니라 사랑의 끝으로 읽혔다. 나는 읽는 내내, 이 장면들을 쓴 사람이 그 방에 오래 머물렀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글을 읽는 일은 문장만 읽는 일이 아니다. AI도 죽음과 사랑을 소재로 쓸 수 있다. 하지만 독자는 소재를 읽지 않고, 그 소재를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의 시간을 읽는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이 어딘가에서 실제로 아파했고, 그리워했고, 견디며 적었다는 믿음까지 함께 읽는다. 보낸 사람이 없는 편지는 아무리 정성스러워도 편지가 되지 못한다.
물론 AI는 계속 나아질 것이다. 언젠가는 누가 쓴 글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와도 달라지는 것은 출처를 가려내기 어려워진다는 점 뿐이다. 글에 담긴 시간이 누구의 것인지는 여전히 물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사람 냄새나는 문학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문학은 잘 쓴 글을 얻기 위한 일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을 문장으로 붙잡으려는 사람의 일이니까. 그 시간은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고, 그래서 누구도 대신 써 줄 수 없다.
영상의 장면은 기계가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구와 담의 방에서 느꼈던 그 무게를 기계가 대신 짊어져 줄 수는 없다. 나는 그 무게를 읽는 독자로 남고 싶고, 언젠가는 내 손으로 그만한 무게를 가진 문장 하나를 쓰고 싶다. 서툴러도, 오래 걸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