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꽃이 오른다-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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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꽃이 오른다- 4화
  • 이재희
  • 승인 2009.10.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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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꽃이 오른다- 4화

새로운 동네에서 달라진 점이라면, 네 손가락이 잘려나간 그의 손을 보고 보이는 반응이 달랐다는 것이다.

“어, 이 양반? 월남서 이리되셨구먼?”

그것은 원양어선에서 손가락이 잘려 돌아온 탓에 10여 년을 병신 취급받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월남전서 네 손가락을 잃은 참전 용사라 소문이 나게 되었다. 제 화에 못 이겨 항상 경기를 일으키는 성격 탓에 좋은 평판이야 얻지 못했지만, 병신소리만은 피한 것이다. 그는 더는 신문지를 구겨 넣은 목장갑을 끼지 않았다. 아내는 꼬박꼬박 점심때에 맞춰 새참을 들고 내려왔다. 그는 하얗게 쌓인 소금을 나르다가 짭짤한 손가락을 한번 빨아내고, 아내가 싸온 새참을 먹곤 했다. 그의 아내는 손맛이 좋아 다른 염부들도 그녀가 챙겨 오는 새참거리를 즐겼다. 그게 부러웠는지 얼마 전부터 같이 일하는 ‘서파’라는 젊은 염부 하나가 이따금 그의 신경을 긁어왔다.

“아따, 형님은 손 꼬라지는 그래도 마누라 하나는 잘 얻으셨소.”

남의 아낙네들 같았으면 옆에서 듣다 자지러지게 웃었을 텐데 그의 아내는 조용히 남편의 빈 밥사발에 물을 따를 뿐이었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동료 중 하나가 월남전 운운하며 섭섭한 소리 말라 만류하자 서파는 부리부리한 눈썹을 눕히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 이 형님이 월남요? 그래, 월남서 어찌 손가락을 네 개나 놓고 오셨소?”

비웃는 기색이 가득한 크게 휘어지는 서파의 입 모양이 예전의 은지처럼 요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꾸없이 아내가 따라놓은 사발의 물을 들이켜고 남은 것은 입에 머금어 침을 뱉듯 사납게 뱉어냈다. 화가 끓어올랐지만, 어찌 뱉어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대꾸할 바 모르는 입술이 몇 번 꿈쩍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빈 그릇과 남은 새참거리를 쟁반에 담더니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그릇을 들어달라 말했다. 아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말없이 일어나 쟁반을 챙겨 들었다.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아내는 별다른 말 한마디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의 옆얼굴이 화사해 보여 마루에 쟁반을 내려놓자마자 아내의 치마폭을 들쑤시고 들어갔다.

그 후로도 서파와 부딪히는 일은 종종 있었다. 염전 건너 죽은 밭에 소변을 보고 있는데, 서파가 그 옆으로 다가와 제 바지춤도 내리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오줌발이 길고 힘 있게 위협하듯 뿜어 나왔다. 그는 서둘러 바지를 올리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왼손가락이 하나뿐인지라 바지를 올려 채우는 동작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파가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걸었다.

“허허, 형님요. 월남서 거기도 같이 잘라먹고 왔소? 그 댁 누님이 아따, 안되셨소. 허허.”

뭐, 뭐여 하고 혀가 꼬인다. 내려간 바지춤으로 비집고 나온 물건에 눈이 갔다. 서파의 물건이 솟아나온 꼴을 보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바지 단추가 잘려나간 왼손 마디 위에서 자꾸 헛돌아 채워지질 않았다. 안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바지는 그제야 단추가 제대로 채워졌다. 서파는 과시하듯 물건을 두어 번 털더니 바지춤을 올려 입고 먼저 가버렸다. 그 밤, 그 밤과 같은 화가 올라왔다. 갈보 년, 갈보 년아. 괘씸한 년! 은지의 다리 사이에서 풍겨오던 지린내. 더는 움직이지 않는 시체의 볼품없이 초라한 몰골과 목구멍에 걸린 화가 꿀꺽 삼켜져 내려가던 그때의 밤이 모락모락 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땅에 박힌 돌멩이라도 집어 성큼 사라지는 서파의 뒤통수에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이 튀어 올랐다.

그날 이후로는, 서파가 혹여 다가올까 피해서 소변을 보러 다녔다. 새참을 먹을 때 그의 아내에게 누님, 누님 하며 살갑게 구는 꼴이 참기 어려웠지만. 아내가 별 대꾸 없이 무심히 서파를 대했기 때문에 그는 꾸역꾸역 밥과 함께 화를 삼켰다.

하늘색이 기묘한 날이었다. 여러 날 숙성시킨 간수는 염도가 제법 높아져, 곧 하얗게 소금이 올라온다. 염부들은 이때쯤 해서 비가 올까 싶어 항상 날씨를 살피기에 바쁘다. 비가 오기 전에는 간수를 대피시켜야 하는데 나중에 대피시킨 것을 다시 퍼 올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지나가는 구름일 거라고 태평하게 담배나 물고 있는데, 서파는 혼자 제가 맡은 염전의 간수를 죄 대피소로 빼버렸다. 그는 서파가 분주히 움직이는 꼴을 흘겨보며 침을 탁 뱉었다. 소금질 몇 번이나 해봤다고 어린놈이 건방지게 나서느냐며 욕을 했다. 그렇게 오후가 지날 무렵, 결국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은 놈이어서 순식간에 간수에 굵은 빗방울이 스미는 걸 본 염부들은 야단이 났다며 물을 빼기 시작했다. 소금기 앉기 시작한 간수를 망친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수고하시오, 형님. 하고 어깨를 탁 치고 빗줄기 사이로 혼자 뛰어가 버리는 서파가 그를 더더욱 치 떨게 만들었다. 물은 금세 불어나 버렸고 장화 속까지 빗물이 차 들어가기 시작했다. 밀대로 간수를 물 빠지는 구멍으로 치덕치덕 밀어내는 그의 팔에는 추위 탓인지 분노 탓인지 모를 경련이 계속 일었다. 육시랄 놈의 새끼, 지긋한 놈의 바닷물. 제기랄, 제기랄! 물이 순식간에 차올라서 물 빼는 작업은 점점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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