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10주년 <10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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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110주년 <1063호>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0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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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26일은 안중근 의거 110주년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경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처단했다.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린 안중근은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브라우닝 권총을 쏘았다. 제1탄은 이토의 가슴에 명중됐고, 제2탄은 흉부를 맞췄다. 제3탄이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안중근은 총 맞은 이가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3명에게 다시 각 1발씩 쏘았다. 이후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의 러시아어) 삼창을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 내 객실로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다. 이토는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빠가(바보)’라고 중얼거린 뒤 10시경 절명했다. 탄환이 박힌 지 30분 후였다. (일본 검찰조서 기록) 체포된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고, 밤 8~9시경 일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2. 11월 3일에 안중근은 뤼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안중근의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단 6회로 끝났다. 2월 12일에 안중근은 재판에서 자신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 일본 검찰관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 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나를 사형 피고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이어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피력하였다.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죄, 세 번째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네 번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 번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중략) 열 네 번째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열다섯 번째 일본의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그런데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가 어찌 이토 히로부미뿐일까? 일본 군국주의 강경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메이지 천황도 그랬다. 메이지는 청일전쟁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조선의 독립을 견고히 하기 위한 결단’이라 하였고, 러일전쟁 때도 동양평화와 대한 독립을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과 청 · 일 3국이 백인종인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공동으로 대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조선과 중국의 식자층들은 황인종이 멸종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공감하며 일본을 적극 지원하였다.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러일전쟁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싸움으로 보아 일본을
옹호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렇게 일본이 내건 ‘동양평화’는 겉과 속이 다르다. 일본은 음흉하게 ‘동양평화’를 앞세우며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야욕을 숨겼다.

#3. 1910년 2월 14일에 일본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을 흉한(兇漢: 테러리스트)으로 몰아 일본 형법의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언도했다. 그런데 중국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사상가 양계초는 ‘가을바람이 부니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네.(秋風斷藤曲)’란 시를 지어 찬양했다. 중국 초대 대통령 손문도 안중근을 추앙하는 시를 썼다.

“공은 삼한을 뒤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러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토도 죄인이라.”

훗날 중국 총리 주은래는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인민의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일본은 "안중근은 일본 초대 총리 이토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한다. 2014년 1월 19일 중국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때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발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사적지 업무를 담당하는 도쿄 품천구 교육위원회는 1996년에 제작한 이토 히로부미 묘소 안내판에 ‘이토가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의해 저격당해 69세에 숨졌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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