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출간되자 마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단숨에 페미니즘의 입문서가 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이 10월 1일부터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이어 서술되는 내용은 연극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작품은 가모장 사회인 이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갈리아는 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현실과 반대로 벌어지는 가상의 세계다. 거울 면에 반사하듯 상대의 행동을 답습해 보이는 효과적인 시위방법인 미러링을 차용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페미니즘 필독서인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장관 집안의 아들 페트로니우스다. 그의 꿈은 잠 수사가 되는 것. 그러나 이갈리아에서 잠수사는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이갈리아에는 남성을 위한 잠수복마저 없는데, 남성에게는 위험한 일이라는 게 그 이유다. 이갈리아의 여성들은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 강인해졌고, 남성들은 연약해졌다. 이러한 신체적 차이는 성별에 따른 직업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갈리아의 여성들은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남성들은 가사, 육아 등을 전담한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자. 페트로니우스는 어머니에게 남성이 입을 수 있는 잠수복을 만들어 달라 조르고, 생일선물로 꿈에 그리던 잠수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선물을 본 페트로니우스는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데, 바로 성기부분에 ‘페호’(연극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페호란 남성용 성기 가리개로, 단순히 보호용이나 치장용을 넘어 성기가 자라는 걸 막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남성성기 억압용 가리개를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과 그 이전에 여성들에게 당했던 성폭행 사건 등을 계기로 페트로는 남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함께 페호 태우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소설 <민주주의의 아들들>을 출판하게 된다. 말하자면 소설 속 페트로니우스의 <민주주의의 아들을>은 현실 속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인 셈이다.
소설에는 <민주주의의 아들들>에 대한 서평도 등장한다. ‘젊은 남성해방주의자들의 반란’이라거나 ‘허구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는 점잖은 평에 속한다. ‘가치가 없는 책! 교육적으로 최악!’, ‘야만적이다, 그런 사회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같은 혹평도 있다. 이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예상한 <이갈리아의 딸들>에 쏟아질 비난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가모장 사회에서 남성이 겪는 차별을 중심으로 요약한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작품은 여성의 언어와 질서로 구축된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의 모습을 통해 남성위주의 현실을 유쾌하게 비판한다. 어쩌면 이러한 비판이 불쾌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통쾌한 이들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미러링이며, 거기에는 원본이 되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편, 작품은 성을 중심으로 한 차별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작품은 약자로서 여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먼저 페트로니우스를 사랑하는 노동자 계급 그로의 말이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선 이상 절대 올라갈 수 없어. 왜? 나도 내 어머니도 지배계급이 아니니까. 평생 노동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계급이니까. (…….) 성차별? 나랑 너 사이를 가로막는 건 성차별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계급이야, 계급! 지배계급, 노동계급, 사회적 차별과 교육!”
그런가하면 작품에는 성적소수자인 동성애자도 등장하는데, 이 대목에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데뷔작이 <전 세계 동성애자여 일어나라>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여성주의운동과 소수자 인권운동의 연대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 결론이다. 아마도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바랐던 것은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가장 보통의 남성(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