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의 만남 <10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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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의 만남 <1061호>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2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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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다. 이 길은 유학과 불교의 만남, 유배객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백련사 주지 혜장 선사(1772∼1811)가 걸었던 길이다. 1800년 6월 28일에 개혁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런데 그에게 거처를 제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한 칸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부터 정약용은 아전 자식 4명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1803년 겨울에 정약용은 거처한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지었다.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 네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한다는 의미이다. 1805년 봄, 바깥출입이 자유로워진 정약용은 백련사를 들렀다. 주지 혜장선사는 정약용을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이내 알아보고는 잠자리를 청했다. 이 날 밤 두 사람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실력을 뽐내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 질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로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었다. 1805년 겨울에 정약용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이때 정약용은 차(茶) 맛에 빠져든 것 같다. 혜장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조르고 ‘걸명소(乞茗疏)’ 편지를 썼다.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로 시작하여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네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른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로 끝나는 ‘걸명소’는 차 맛을 진실로 아는 다인(茶人)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1808년 봄에 다산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던 처음에는 산정에 식사를 준비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혜장은 젊은 중 하나를 보내어 다산의 밥 시중을 들게 했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가엾은 그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다산의 시)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하면서 혜장과의 교류는 더욱 잦아졌다. 혜장은 주역과 논어 등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불경은 오직 수능엄경과 대승신기론 만을 좋아하고 염불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낙 고집 센 혜장이었다. 한 번은 다산이 혜장에게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라고 충고하자 혜장은 스스로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불러 다산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불법(佛法)에는 의욕을 잃고 시나 쓰고 주역, 논어를 논하다가 술에 잔뜩 취하여 세월을 보낸 아암은 1811년 가을 어느 날 병이 들어 40살의 나이에 입적했다. 다산은 혜장 선사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다. 혜장이 세상 떠난 날, 다산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오만방자한 병통)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한편 1812년 겨울에 혜장의 두 제자가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다산을 찾아왔다. “우리 스승님의 탑(塔)을 세워야 하는데, 선생께서 그 명(銘)을 지어주십시오”하므로, 다산은 흔쾌히 승낙한다. 그래서 지은 글이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다. 다산은 혜장의 탄생과 불교에의 귀의, 혜장과 첫 만남, 보은산방과 다산초당에서의 교류, 아암이란 호에 대한 내역, 혜장이 죽은 해에 쓴 자작시를 소개하고 명(銘)으로 끝맺는다. 명(銘)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빛나는 우담발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었네. 펄펄 나는 금시조 잠깐 앉았다가 곧 날아갔네.”

혜장선사의 ‘아암장공탑’은 해남군 대흥사 부도(浮屠) 밭에 있다. 탑비의 왼쪽 맨 아래쪽엔 ‘정약용 찬(丁若鏞 撰)’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다산과 혜장이 걸었던 백련사와 다산초당 오솔길, 이 길이야말로 갇혀 산 다산과 세속을 버린 혜장이 함께 걸은 아름답고 슬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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