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범죄 이전에 차별금지 <1059호 (개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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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범죄 이전에 차별금지 <1059호 (개강호)>
  •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0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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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러미 프로젝트

“전에 물어보셨더라면, 레러미가 아름다운 마을이고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한적한 곳이라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모두가 모두를 다 알 만큼 공동체의 느낌을 잘 유지하면서, 큰 도시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개성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고요. 그러나 이제, 매튜 일이 일어난 뒤로 레러미는 그 사건으로, 그 범죄로 규정되는 곳이라고 말해야겠군요.”

와이오밍 주에 위치한 레러미는 한때 서부극 촬영지로 유명했던 도시다. 실제로 와이오밍의 별칭 중 하나가 ‘카우보이 주’인데,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를 그렸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이 된 곳이 와이오밍이었다. 한편 와이오밍의 또 하나의 별칭은 ‘평등의 주’이다. 와이오밍은 1869년 미국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으며, 1924년에는 미국 최초로 여성 주지사를 선출한 주이다. 이 평등의 땅에 도대체 무슨사건이 일어났던 걸까?

사건은 1998년 10월 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러미 외곽의 인적 드문 사슴목장에서 울타리에 묶여 숨이 겨우 붙어 있는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발견되었다. 사방 15미터까지 흩어진 핏자국은 그가 얼마나 심한 구타를 당했는지, 말라붙은 피는 그가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온몸이 피범벅이었는데, 눈물이 흐른 자리만 깨끗했다고 한다. 병원으로 이송된 소년은 닷새 만에 숨을 거뒀다. 경찰은 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피해자는 매튜 셰퍼드. 용의자로는 한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아론 맥키니와 러셀 핸더슨이 지목되었다. 둘은 바에서 만난, 평소 아무 친분이 없던 매튜를 트럭으로 데려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외진 곳으로 끌고 가 두개골이 깨질 정도로 폭행하였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매튜를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언덕에 내버려 둔 채 매튜의 지갑과 신발을 챙겨 떠났다. 죽도록 구타를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동성애 혐오.사건이 대서특필되면서 인구 3만의 소도시 레러미는 미국 전역의 관심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처음에 아론과 러셀은 우발적인 사건이 었다고 진술했으나, 수사 진행 과정에서 그들이 동성애 혐오자였으며, 의도적으로 게이바에 들어가 매튜에게 접근해, 계획적으로 폭행을 저지른 정황이 드러났다. 재판부는 그들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성 정체성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증오범죄 금지 법안’에 서명하였다. 연극 <레러미 프로젝트>는 사건을 무대화하기 위해 사건 당시 레러미를 찾았던 연극단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사건 발생 한 달 뒤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레러미를 방문해 마을 사람들과 200건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극은 이 인터뷰와 증언, 진술 등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여기엔 생전의 매튜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최후 목격자, 매튜의 최초 발견자, 담당 형사, 담당 의사, 매튜의 친구들, 그리고 아론과 러셀, 그들의 지인, 개신교 목사 등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연극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 연극은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허구적 상상력에 의존하여 창작된 작품이 아니다. 둘째, 연극은 실제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쪽 의견만 편파적으로 다루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을 균형있게 담아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셋째, 연극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정신 이상자의 행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강조하고픈 것은 바로 저 세 번째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법한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또한 동성애자만을 대상으로 해 벌어지는 사건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성소수자를 비롯하여, 장애인, 여성, 외국인, 난민 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이 과연 모든 혐오 범죄로부터 안전한 청정지역이라 자부할 수 있는가? 나아가 혐오범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차별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안’은 2007년 최초 발의되었으나, 보수 기독교계의 압력에 막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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