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응원하지 않아도 좋다 <10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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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응원하지 않아도 좋다 <1056호>
  •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12 2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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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

“난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놈이야. 꿈도 이상도 없이 그저 벌레처럼 살아가는 놈이야. 타락하고 비굴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넌 어째서 그렇게 도덕적이어야 하냐? (......) 넌 어째서 그 나이가 되도록 정의와 도덕을 외치고 있어? 너는 왜 나처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살지 않냐? 너는 무슨 자격으로 저 높은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을 수 있냔 말이야?”

지금이야 영화감독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창동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소설을 통해서였다. 1983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전리(戰利)」로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데뷔한 그는, 1993년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 작가 겸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1997년 <초록물고기>로 감독 데뷔한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언급하는 건 사족일 것이다. 여담이나 그가 소설가로 등단한 건 그의 나이 서른 때의 일이며, 영화계에 입문한 건 그의 나이 마흔의 일이었다. 

소설가로서 그가 발표한 소설집은 두 권에 불과했지만, 이창동은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명맥을 잇는 작가로 문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가 영화로 전향했을 때, 한 문학평론가는 “더 큰 문학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그가 영화로 옮겨갔을 때 문단의 아쉬움은 컸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그가 1992년 발표한 대표작이다.

시대는 1980-90년대. 배경은 이제 막 개발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서울 변두리 녹천이다. 주인공은 배다른 형제로, 둘은 외모도 성품도 같지 않다. 형 준식은 급사로 시작해 야간대학을 마치고 정교사가 된 입지전적인 소시민이다. 한편 두 살 터울의 동생 민우는 어린 시절부터 영민해 국립대학에 진학한 수재이다. 이야기는 오랜 세월 소원하게 지내온 동생 민우가 준식의 집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민우는 학생운동을 하던 중 수배되어 쫓기던 처지였다. 준식은 이러한 사실을 학교로 찾아온 형사들을 통해 알게 된다. 민우의 행적을 묻는 경찰의 질문에, 준식은 물론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민우는 형사들의 추격을 받게 된다. 작품에서는 민우의 소재가 밝혀진 경위에 대해 자세히 보여주진 않는다. 그것이 준식의 밀고에 의한 것인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한 것인지. 다만 준식에게 혐의를 씌울 뿐이다. 준식의 혐의는 앞서 인용한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동생의 방문 후,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생동감 없던 집안에 민우는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준식은 그것이 못마땅하다. 특히 생전 립스틱 한번 바른 적 없던 아내의 변화를 보며 준식은 질투 이상의 감정에 휘말린다. 그는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구축한 가정이, 사실은 얼마나 알량한 자기만족과 허위 위에 지어진 초라한 모조품인가 하는 것’을 동생이 폭로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준식의 과거와 현재, 준식의 정체성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인 셈이다. 그래서 준식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것은 직접 작품을 통해 확인하는 게 나을 듯싶다. 막이 내렸을 때, 당신이 준식을 응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를 이해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대면하지 않은 타자의 삶을 이해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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