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백마문화상] 시 부문 당선작 홀로그램 外 2편 - 이현주 학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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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백마문화상] 시 부문 당선작 홀로그램 外 2편 - 이현주 학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명대신문
  • 승인 2018.12.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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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

팔꿈치를 너에게 줄게
내 몸에서 가장 직각인 곳을


손목을 세로로 뜯어서 그 안에 열쇠를 숨기는 꿈을 꾼 적이 있지
얘 너도 그런 적 있니
어딘가로 탈출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새벽


술이 좋아서 사람이 좋은 척 했어
우리에게 주어진 통로는 가로로 누운 굴뚝
종단으로 그려진 횡단보도


사다리를 오르는 날엔 절대 
아래를 쳐다보지 않기로 약속해
목소리가 홀로그램으로 흩어진다


가장 정직한 각도로 굽어지는 법을 배우고


채점당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왼손잡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으면
일단


빗금 그어지지 않기 위해서 직각을 선택했다
그 날 받은 열쇠를 꺼내기 위해
여러 종류의 날카로움을 준비해 봤어


잠에서 막 깨어나면 낭자한 모자이크
숙취 없이 취한다는 게 뭔지
너는 알고 있던 거지? 근데 너 


밖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가질 거라고
약속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직각이 온전하게 직각이 되는 세계에서 왔다고


열쇠가 맞는 문 앞에서
연약해지지마

 

 

어지럼증은 누구의 병

 

다이어리보다 가계부 쓰는 법을 먼저 알았다

왜 치과비는 이렇게 비싼지 보험도 안되는 레진

아말감으로 때우면 이빨이 회색이 된다잖아

 

언젠가부터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멀미를 했다

그런데 내가 넘어지면 다들 술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너 되게 인간적이다 를 너 되게 이기적이다 로 들었다

나는 자주 정말을 절망으로 읽고

어차피 전부 똑같은 뜻이니까

 

응급실에 실려 갈 때도 울지 않았는데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는 주저앉아 울었다

나 술 안 마셨어 병원에서는 왠지

치과 냄새가 난다고 난 이상하지 않은데

엄마가 죽은 날에도 울지 않았는데

비에 젖고 있는 빨래를 허겁지겁 걷다가

 

어제 손가락을 끊었던 커터칼로 오늘은 오렌지를 까먹었다

빈혈과는 달라 나는 함부로 피 흘리지 않는 사람

픽픽 쓰러지면서 철분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받고

비웃었다 어지럼증은 내 병이 아닌데

 

빨간불에 길을 건너면 그건 내 잘못이에요?

나는 몰라 모르고만 싶어

 

뱃속이 뜨거워서 변기를 붙잡고 우는데

룸메는 자꾸 나를 알콜의존증으로 몰고 간다

오늘도 이빨이 조금 녹았다

 

나이테

 

누군가의 생년월일을 보면 재빨리

나이 차이를 계산해 본다

열두 살 까지라면 사귀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딘가가 고장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은 나에게 자주 말했다

띠가 한 바퀴 돌았을 동안 내가 너보다 얼마나 자랐겠니

서른의 애인은 나에게 자주 사랑에 나이차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지

오빠, 오빠는 띠가 한 바퀴 돌 동안에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교복을 입고 자주 중얼거렸네

오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식들이 그렇게 나이 많은 애인을 가진대

 

하나도 자라지 않은 애인은 나를 구하지 못하고

나는 더 더 나이 많은 애인을 사귈 거라고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나이테의 둥근 띠 위를 내달렸다

한 바퀴가 넘는 공백을 메우려고

 

 

수상소감

스물이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스물이 되면 어른이 되거나 시인이 될 줄 알았습니다.

청소년기 내내 잘나가는 어른이 아니라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돈을 많이 벌고 싶지도 성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세상을 바꾸는 시를 쓰겠다고 당당히 말했던 저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옳은 것은 세상의 고통에 울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시를 쓰는 것입니다. 스물인 지금, 어른도 시인도 되지 못했지만 저는 여전히 저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얼마 후면 스물 하나가 됩니다. 그 때는 조금 더 멋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에게 상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시를 쓸 수 있게 도와주신 부모님, 가족들, 선생님들, 친구들, 특히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같이 있어줄 샘과 명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치열하게 시 쓰고 가끔 울고 자주 웃기를 바라.

시를 쓸 때는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시를 써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남을 위해 울고 싶습니다.

 

심사평

올해의 응모작들은 평이한 감상을 일상적 언어와 소재로 단순하게 표현한 시편들과 상당한 시적 훈련을 거쳐 자기 화법을 갖춘 작품들로 양분되었다. 후자의 응모작들 수준이 높은 편이어서 경합이 치열했고 최종 다섯 명 안에 든 작품들 역시 저마다 다채로운 색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 토론 끝에 가작으로 「복류(伏流)」 외 2편을 골랐다. 한자 제목을 달고 있어서 유독 눈에 띠는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응모자의 장점은 삶의 우울과 절망감을 툭툭 건드리며 끊어지듯 이어지는 단단한 진술로 잡아채서 전개하는 화법에 있었다. “커튼 너머로/살아야 할 핑계들이/엎질러져 있었다//울어야 숨을 쉬는 아이가 있다”(「복류(伏流)」)와 같은 문장은 약간의 기시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목과 어우러져 우리 내면 깊이 흐르는 ‘슬픔의 강’을 비유적으로 연상시키면서도, 그것을 통해서만이 숨을 쉬는 삶의 아이러니한 국면을 인상적으로 포착해내고 있었다.

당선작으로 「홀로그램」 외 2편을 골랐다. 「홀로그램」은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각을 잴 수 없는 고유한 생김새로 살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늘 누군가의 채점 기준에 맞춰야 하고, 그것이 수직이거나 수평뿐인 뻔한 가면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을 세로로 뜯어서라도(자해의 이미지가 겹쳐 있는) 열쇠를 찾고 싶은 마음과 숙취로 일어난 아침처럼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또다시 직각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각하는 쓸쓸한 심정을 ‘매력적인 비유’와 ‘생생한 문장의 힘’으로 적어내려간 작품이다. 현실에서 출발하여 갈등하고 탈출을 꿈꾸는 모습을 이 정도로 형상화해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열쇠가 맞는 문 앞에서/연약해지지마”라는 마지막 문장은 또 얼마나 쓰라린가. 우리를 받아들여주는 문 앞에서 우리는 마냥 기쁘기만 할까. 그 문 또한 홀로그램은 아닐까. 함께 보낸 다른 두 편 또한 상당히 도발적이면서도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문장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어서 곧 기성 문단에서도 이 사람의 작품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쁜 예감이 들 정도였다.

심사평을 쓰는 내내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유일한 축하를 전한다. 「야간 알바」 외 2편, 「노르킨곶, 언덕, 고요와 숙면의 상관관계」 외 6편, 「바깥의 일」외 2편을 응모한 분들의 작품도 인상적이었음을 부기해둔다.

 

김경후 교수(문예창작학과) / 박상수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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