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호]산책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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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9호]산책하는 즐거움
  • 안희연
  • 승인 2018.05.1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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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산책하기 좋은 달이다. 계절로 치자면 5 월은 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5월은 바통을 건네듯 봄을 여름에게로 건네주는 달이고,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산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다. 이제 좀 걸어볼까 싶을 때, 폭군 같은 여름은 이미 문 앞에 당도해 있으니 말이다. 산책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몇몇 문학 작품들이 떠오른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라는 구절로 회자되는 김수영 시인의 시 「봄밤」 이 그러하고, 정용준 소설가의 단편 「선릉 산 책」도 머릿속을 맴돈다. 앞의 시는 고즈넉한 산 책길에서 홀로 읊조리기에 좋고, 뒤의 소설은 여러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소설이기에 삶에 무감해지려 할 때 읽으면 좋다. 소설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볼까. 이 소설은 대학생인 ‘나’가 하루 동안 지적장애를 가진 청년을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어진 일들을 그린다. 시급 만 원이라는 말에 덜컥 시작했지만 낯선 존재의 출현은 주인공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선사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품게 했다. ‘교감하려는 노력’과 ‘뜻대로 되지 않는 난관’ 사이에서 좌충우돌했던 하루. 인적이 드물다는 이유로 찾아간 선릉에서 두 사람만의 낯선 산책이 시작된 것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이 소설을 읽고 “나 라면 이 아르바이트를 수락했을까?”라는 주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놀라운 것은 과반이 넘는 학생들이 아무리 시급이 높다 해도 그런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겠노라 대답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없다’, ‘웬만한 사명감이 아니면 못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낯설고 어려운 일이라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선릉 산책」의 주 인공이 뜻하지 않게 힘든 하루를 보낸 것은 맞지만 그 산책을 통해 분명 많은 것들을 깨달았을 것 이다. 불가능, 실패, 질문만이 남은 하루였더라도 그 시간은 귀한 것이 틀림없다. 홀로 하는 산책도 중요하지만 삶은 무수한 타인들과 함께 하는 산책이기도 하지 않은가. 어떤 일을 감당해낼 수 있는 ‘자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신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맞을까. 이 모든 질문까지를 포함해서, 산책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혼자 하는 산책은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힘을 길러주고, 함께하는 산책은 어떻게 하면 옆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춰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옆 사람과 경쟁하며 달려야 하는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느린 산책만이 줄 수 있는 것, 기계 부품도 마네킹도 아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 아름다운 기회를 포기한다면 삶의 커다란 기쁨을 잃게 되는 것 아닐까. 물론 우리의 산책을 어렵게 하는 수십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길이 없어서 산책을 못 하는 것은 아니듯, 그 수십 가지의 이유들은 사실 별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봄밤」의 김수영 시인은 말한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어도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5월의 밤은 당신의 생각보다 더욱 짧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산책을 시작하기를. 산책 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지금,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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