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호(개강호)] 봄은 어떻게 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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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호(개강호)] 봄은 어떻게 오나
  • 김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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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지구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사이클의 한 지점이 봄. 태양계, 자기장, 지구에 속한 대기와 지표와 바다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의 톱니바퀴를 끌어안고 긴밀하게 움직임으로써 봄은 온다. 그러니 시스템이 봄을 호출하면 만물도 줄줄이 출력된다.

햇발이 강해지고 땅이 데워져 부푼 공기 속에 따사로운 미풍이 불면, 흩날리는 꽃가루와 잔가지에 오르는 벌레들과 겅중대는 짐승들이 지나간 겨울의 빈 곳들을 채운다. 메말랐던 사방이 새로움으로 차오르는 동안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의 세계에선 강렬한 충돌이 빈번해지고, 자연은 온통 크고 작은 휘몰아침 속에 낮은 소리의 태동으로 가득 찬다.

봄이 되어야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것들이 기지개를 펴고, 빈사상태에 있던 것들이 부활하며, 얼었던 것들이 몸을 푼다. 사람의 일도 그렇기로는 마찬가지여서, 학교는 봄에 개강을 하고 여행객은 봄부터 많아진다. 날씨가 풀려야 더 많은 각자가 밖으로 나와 서로 교통하고 간섭하며 부딪힌다. 찬 겨울이더라도 주말날씨에 따라 유흥가의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살아 있으므로 움직이고, 움직임으로써 부대끼고, 그 소리가 저마다의 존재를 증명한다. 한낱 작은 꽃이 피어날 때조차 꽃잎마다 소리는 움튼다. 소리가 난다는 것,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오롯이 한 개체의 일이지만, 봄이 오지 않았다면 세상은 좀 더 잠잠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세상과 연결 되지 않은 소리란 없다. 그리고 소리가 아니더라도 드러냄이 가능한 무수한 것들이 있다.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나 듣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나 우리의 인식 너머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주파수가 있거나 자기만의 성질로 반사한다. 인간이 포착하는 가시광선과 음파가 아니더라도 그 밖에 세상엔 다양한 맥동들이 있다. 소리처럼 공기와 같은 매질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만의 성질이 없는 게 아니다. 요컨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드러냄이 있고, 침묵하는 봄이란 없다. 봄이 오는 곳에 각자의 자유로움이 있다.

자유가 움츠러든 집단은 필시 개인을 얼음장 밑에 가두어 꼼짝 못하게 하고 고유의 정체를 드러내는 걸 막는다. 그러니 어떤 사회가 이전과 달리 다양한 갈등과 시끄러움을 수면 위로 올려 보여준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봄을 맞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위계질서에 짓눌렸던 개인들이, 먹고사는 일로 피해왔던 사람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세상의 날씨가 좀 더 풀려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엔 봇물 터지듯 많은 갈등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최저임금제를 둘러싼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다. 대규모 재해로부터 안전을 요구하는 소리도 드높다. 구습과의 싸움은 작은 것이라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외교와 남북 문제는 고성의 주된 원인이다. 성폭력을 폭로하는 #METOO 운동은 기존의 남녀간 권력지형에 경고의 소리를 내고 있다. 앞으로도 공정과 정의를 끊임없이 불러와서 매 사안 마다 가려야 할 일들이 태산이다. 아직 내야 할 소리들이 많다.

그러나 소리 나는 곳만 바라보고 소리 내는 것만 들여다 보는 걸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발화가 이루어진 장면은 우리의 무심함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거기서 시선을 멈추면 무엇이 우리의 다음을 이루게 해 줄 것인지 찾아낼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들을 수 없었으나 항상 존재해 왔던 것들을 드러내 주는 다양한 주파수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 드러냄들이 연결된 체계, 우리가 사는 곳의 시스템이 어떻게 생긴 모습인지를 더듬어 보지 않는다면, 각자의 발언은 여전히 개별적인 아우성에 그치고 말 것이다. 가령 #METOO 운동이 사회의 권력지형과 위계질서를 향한 모두의 물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얼어붙는 것은 비단 어느 한 성별뿐만이 아니다. 권력을 향한 굴종을 내면화 해야 살아남는 모두의 미래도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러니까 소리나는 모든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를 발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봄은 어떻게 오나. 이렇게 보니 서두의 이야기는 틀린 것 같다. 봄이 오니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냄으로써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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