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순의「꽃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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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순의「꽃의 제국」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7.10.30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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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올해 수령 천 년을 훌쩍 넘긴, 우람한 은행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보면서 ‘이 지구의 지배자는 우리 인간일까 아니면 병자호 란, 임진왜란은 물론 고려의 역사까지 안고 있는 저 나무일까’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무의 생사를 결 정하는 인간이 지배자’라고 내가 생각하면 나무는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우린 인간의 사고 수준을 뛰어넘어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적 존재로서 우리 가 지배자’라 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농사나 사냥 신 빛과 물을 이용 한 자체의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얻는 식물은 20만 년 전 막차 타고 지구에 출현했던 호모 사피엔스보 다 무려 35억 년이나 먼저 태어났다. 먹이사슬의 최 하층에서 동물들의 ‘식량과 산소’를 틀어쥐고 있는 그들은 지구상 생명체의 99%를 점유하고 있다. ‘식 물인간’이라는 우리의 일방적인 폄훼와 달리 그들 역시 ‘뇌’가 있고 언어가 있어 보고, 느끼고, 생각하 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아파한다. 이쯤 되면 누가 이 지구의 진짜 지배자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식물은 동물이 가진 물리적 두뇌는 없지만 그들 의 세계는 동물들보다 훨씬 영악하고 치밀하다. 식 물들의 생존과 번식 전략에 빠지다 보면 ‘창조주 신’ 을 부정 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다. 식물의 세계를 다루는 책은 많지만 지난 2002년에 나온 강혜순의 「꽃의 제국」이 발군이다. 독자의 눈높이에서 식 물들의 치열하고 치밀한 전략전술들을 흥미롭게 잘 다루었다. 하나하나 작품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 을 사진들의 편집 또한 압권이다.
민들레는 씨앗을 날려보낼 생각으로 목을 길게 올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목을 길게 빼는 것과 공처 럼 둥근 모양으로 씨앗주머니를 펼치는 것은 바람 을 더욱 ‘효율적’으로 맞음으로써 씨앗을 고루, 멀리 날려보내기 위한 전략이다. 길가에 흔한 민들레를 만나거든 꽃잎 하나를 따서 날려 보기 바란다. 어김 없이 수직으로 곧추 서 고속으로 회전하며 바닥에 내려 꽂히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바람에 의지해 수꽃의 꽃가루를 암꽃의 수술로 날려보내는 꽃들을 풍매화라고 한다. 풍매화의 표인 참나무의 암술머리는 맨눈에는 잘 보 이지도 않는 극점이다. 직경이 0.04밀리미터에 불과 한 졸참나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와 비슷한 크기 의 암술머리에 도착해 도토리를 만들어 낸다는 사 실은 경이를 넘어 ‘신의 경지’다.
소나무 한 그루의 꽃가루는 략 10억 개에 이른 다. 작은 꽃가루는 공기주머니를 가지고 있고, 표면 이 매끈해 바람에 잘 날리도록 설계돼있다. 이것들 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날아가도 기껏 한두 개가 그 보다 더 작은 크기의 암술 입구에 이른다. 소나무의 생존전략은 ‘인해전술’인 것이다. 5월이면 경북 울 진의 불영계곡이 노랗게 물 드는 이유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라는 자이언트 세콰이어는 산불이 나 야만 씨앗을 터뜨릴 수 있다. 그러려면 산불에도 생 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인동초는 수정 후 꽃의 색깔을 바꿈으로써 꿀벌의 헛수고를 줄여준 다. 그래야 내년에도 꿀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없이 개를 홀해 나쁜 상 황이나 욕을 할 때면 자주 개를 호출한다. 그런데 「꽃의 제국」을 쓴 강혜순 박사는 “꽃은 식물의 생 식기이다. 생식기를 경쟁적으로 치장하고, 드러내 자랑함으로써 종족 번식을 꾀한다. 인간은 식물의 생식기를 생일선물로 고르기도 한다”며 웃겼다. ‘개 보다 못한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이 ‘꽃보다 못한 사람’인 것이다. 꽃들의 머리를 빌려 치열한 일자리 경쟁을 헤칠 전략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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