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 가작-일상에서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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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 가작-일상에서의 민주주의
  • 김종하 중앙대학교(경제학과 14)
  • 승인 2016.12.0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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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민주주의

<백마문화상 비평 부문 가작>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대한민국보다 중요한 누군가의 경주마.

더 이상 한국사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말 그대로’ 망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가 지면을 장식한다. 이 국가의 모든 영역에서 행해지던 일에는 배후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국가를 움직였고, 이윤을 위해, 권력을 위해, 딸의 경주마를 위해 사회의 원칙을 유린했다. 국가 최고지도자는 그들이 하는 인형극의 인형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와 국민의 주권을 말하는 게 창피할 지경이다.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구조를 하러 달려올 국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300명의 승객이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은 단 한 명을 위해 승마협회를 들쑤시고 있었다. 메르스로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들을 책임질 정부는 있었던적이 없다. 대통령의 집무실에 붙어있던 ‘살려야 한다’는 종이는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죽어갈 때에도, 그 농민의 존엄을 사람들이 지키려고 할 때에도 국가는 없었다. 시민들은 정부와 국가를 비판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한국사회에 없었다.


한국사회는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그래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대통령을 향해, 정부의 각계 인사들을 향해, 최순실을 향해, 국회를 향해 다들 날 선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민주주의를 무시한 정부를 만든 그들을 확실히 처벌하고, 정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강력하게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는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의 일부분이다.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문제는 지금의 정치게이트보다 더 심각하다.

실제로 이 사회에 지금의 상황에 대해 대안을 지니고 있는 세력이나 집단이 있을까?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안의 가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전략,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세력 이 모든 것을 가지고서 지금 사라진 대한민국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초유의 사태에서도 여의도에선 사람들이 머릿속에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당장 국가의 모든 것을 정지시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대통령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대안을 말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말을 아끼고 있다. 결국 한국사회엔 대안 세력마저도 없다.

민주화세력의 집권시기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더 확실해진다. 물론 그들의 정치는 지금과 달랐다. 최소한의 원칙이 있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도 있었다. 비슷한 게이트가 생겼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에도 민주주의의 시스템은 없었다. 누군가는 뒤에서 비리를 저질렀고, 사회적 약자들은 소외되었다.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국가가 없는 야만이었다. 그 당시에 어렸던 나에게도, FTA를 반대하다가 경찰에게 끌려가던 농민의 모습, 경찰의 과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철거민의 모습은 생생하다.
 

정치의 밖에 나가도 똑같다. 여의도 밖에도 민주주의, 존엄을 위한 시스템은 없다. 우리의 일상도 지금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정치판보다 더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틴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겪는 일은 최순실 게이트보다 더욱 야만적이다. 아내에게 손을 휘두르는 남편, 여성에게 몰래카메라를 찍고,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 영하 20도에도 외투를 입지 못하게 만드는 학교, 과도한 야근과 폭언, 폭력으로 직원들을 자살로 떠미는 회사까지. 이곳엔 사람의 존엄을 지키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는 시스템은 어디에도 단 한번도 없었다. 이곳엔 국가와 정부만이 없는게 아니다. 여기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2014년 12월 한 학생이 죽었다.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이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일을 하려 했던 학생이 죽었다. 회사에서 당한 상사의 부당한 폭력, 그리고 회사와 학교의 무책임 때문이었다. 나는 그 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고, 그 학생이 일했던 CJ제일제당이란 회사의 책임감 있는 대처를 원했다. 하지만 내가 회사 담당자로부터 들은 얘기는 그 학생이 회사에서 있었던 일로 자살을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 모습,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을 묵인하는 현실, 인간존엄을 위한 어떤 장치도 없는 상태. 그건 우리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배안에서, 회사에서, 광화문 거리에서, 회사에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들의 죽음엔 이유가 없다. 살 수 있었음에도, 살아야 했음에도, 그들은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했다. 하지만 희생당한 그들의 죽음에 돌아오는 말은 모욕이다. 그들의 죽음은 배상을 받기 위한 사기극 정도로 변질된다. 그들이 이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한마디였다. 그 말은 세월호 위에만 있지 않았다. 이 사회에 모든 곳에 그 말이 있었다. 시스템이 없는 야만의 결과이다.
 

지금 살아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언제 죽을 지 모르고, 언제 혐오와 폭력에 노출될지 모른다. 여성이란 이유로, 학생이란 이유로, 성소수자란 이유로, 배를 탔다는 이유로, 거리에 서 있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당장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의 위협과 죽은 이후에 받을 혐오에 떨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살아도 살아있는게 아니다. 헬조선, 삶의 불안정성, 취업, 복지는 얘기할 꺼리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끝장났다. 이젠 정말로 물리적 생존이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정치가,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모든 공간이 다 그렇다.


우리가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어쩌다가 우리사회는 혐오와 폭력,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까? 많은 진단이 있었고 많은 대책이 나왔었다.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각 영역에 존재하는 문제를 말했고 그것을 실제로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경제에서, 정치에서, 회사 안에서 나름대로 다들 노력했다. 더 나은 구조를 만들고 시스템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구조의 문제, 법의 문제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불평등의 구조, 차별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야만의 양은 분명 적지 않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겐 더 나은 구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붕괴를 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 한국사회는 87년을 기점으로 나름의 구조적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정부, 국회, 대기업 등에는 적절한 규제가 법으로 마련되어 있고, 그들의 역할과 책임 역시 법에 명시되어 있다. 대표를 뽑는 체계,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창구도 나름대로 정교하다. 심지어 초등학생에게도 민주주의의 구조는 있다.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바탕으로 권력을 분할하고 시민들의 삶을 책임질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틀 자체를 문제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딱 거기까지다. 틀이 마련되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의미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확인했듯이, 체계적인 정부조직이 있어도 그것을 전부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껍데기는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우리 사회의 틀은 민주주의이지만, 민주적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부재한 이유는, 우리가 야만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구조적인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탓이다.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어려운 제도이다. 대표를 뽑는 건 민주주의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삶 모든 부분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집에 혼자 누워서 TV를 보는 순간 정도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는 우리의 삶 24시간에 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치적 영역에서만 생각한다. 대표를 뽑고 그 대표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데에만 민주주의라는 말을 쓴다. 우리는 새로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면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가 지금 이곳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위기는 현 대통령이 하야를 하거나 탄핵을 당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대통령은 사회의 기본적인 선을 무시했기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그것은 매우 기본적인 원칙일 뿐,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극단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이 곳에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곳이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삶의 민주주의가 없다. 우리는 얘기를 제대로 하는 법에도 그 얘기를 진지하게 듣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다. 현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의 예술과 풍자를 혐오표현과 구분하지 못한다. 토론과 협의는 그 어떤 공간에도 없다. 사실은 이러한 태도가 민주주의의 정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에선 이런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민주적인 사람이 있어야 민주적인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으며, 민주적인 시스템이 기반이 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우리의 안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인권과 안전은 그냥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그것을 시스템이 수용했을 때, 인권과 안전은 민주적으로 협의되고, 실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치에만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철저히 비민주적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위기에 처했고, 그 위협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심각하다. 여성이라서 죽어야 한 이들, 성소수자라 죽은 이들, 가난해서 죽어야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상은 우리도 경험하는 일상이며, 이 일상에서의 진정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연애는 민주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직장도 민주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주거, 우리의 학교생활, 우리의 가정도 모두 민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의 재구성. 민주주의는 삶의 양식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 우리가 한 것은 정치영역에서 민주주의의 틀을 만든 것뿐이다. 사회 전체를 두고서 모든 일상에, 모든 집단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청와대 개혁은 사소하다. 그것은 주체적인 시민의 힘과 그동안 만들어 민주주의의 틀이면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에게 청와대를 바꿀 민주주의의 잠재력은 존재한다.
 

우리의 변화는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개인적인 단위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삶의 양식에서의 민주주의이다. 정권이 바뀐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 정권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동안에도 한국의 직장인들은 힘들었고, 학생들은 억울했다. 소수자들은 여전히 배제되었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기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치는 삶을 바꾸지만, 정치가 모든 것을 바꾸지 않는다.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다면, 삶의 현장을 바꿔야 한다. 정치는 그 과정에서 들어가는 일부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이다. 민주주의가 실현되야 하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삶의 현장에서 모든 시민들의 태도와 행동으로 완성되는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러한 것이다.
 

존엄은 삶의 민주주의가 시작될 때 시작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로 나눠진 정치논쟁엔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이념노선을 가르던 쟁점들은 이젠 유효하지 않다. 신입사원이 상사가 타오라는 커피를 거부할 수 있을 때, 여성이 애인과 헤어지자는 통보를 아무런 걱정없이 할 수 있을 때, 학생이 추울 때 외투를 걸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이뤄진 것이며, 존엄은 여기서 시작한다. 당사자가 삶에서 원하는 구체적인 요구가 이뤄질 수 있어야 민주주의의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여기서 끝나면 안된다. 지금의 정치게이트는 시작이다. 이 게이트로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이 사태가 종료하더라도 지속돼야 한다. 민주적인 정치에서부터 시작한 열망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퍼져야 한다. 민주적인 정치가 필요한 만큼이나 민주적인 결혼, 민주적인 회의, 민주적인 아르바이트도 필요하다. 일상에서의 변화를 말하는 당사자들이 늘어날 때, 사회엔 인권을 보호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양식을 민주적으로 취할 때에만 존엄은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광장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 필요하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틀을 제대로 지키려면 그 시스템에 최적화된 태도의 사람이 필요하다.


삶의 양식으로써의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이다. 서양 근대에서 시민집단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시민주권의 정치,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정의에 입각해서 볼 때, 민주주의가 삶의 양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삼권분립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발휘할 수도 없다. 애인과 밥을 먹으러 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나 주권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유일하게 정치체제 중에서 삶의 양식과 연관을 맺을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 다른 정치체제와 다른 점이 존재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치체제들은 구조와 틀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장이란 공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공산당이 존재하면 공산주의는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것이 정치체제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다르다.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선 시스템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의 성립을 위해선 시민들의 토론과 민주적인 태도가 필수적이다. 모두의 주권을 무한정으로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조정과 합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은 시스템보다 태도에 있다. 민주적인 태도가 없는 사람에겐 시스템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독히도 많이 확인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없을 때 사회적 약자가 얼마나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는 지도 우리는 충분히 겪었다. 민주주의는 물론 제도이다. 하지만 제도이기 전에 민주주의는 한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결국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는 합의와 대화에 대한 태도이다.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의 현실적인 태도는 문제제기의 가능성과 경청의 능력 이렇게 두 가지이다. 우선 민주주의의 핵심은 문제제기이다. 모든 이들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선 모든 이들이 자신의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인 수준과 개인적인 수주에 관계하지 않는다. 두 명 이상의 모든 관계와 집단에서 문제제기가 가능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민주주의를 합의의 제도라고 할 때, 전제엔 갈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문제제기를 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자유롭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바꾸어야 할 것을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제기가 단순히 잠깐의 문제로 소비된다면, 일상에서의 변혁은 어렵다. 근본적인 변화, 가치의 보존도 불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경청의 능력은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여기서 경청은 단순히 공감하는 듣기와는 다르다. 단순 공감은 민주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문제의식을 공유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을 해결할 순 없다. 경청의 핵심은 정리이다. 문제제기의 층위를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태도가 일상에서도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에서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수많은 대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경청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경청이 존재해야 우리는 진정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다.
 

단순하고 일상에서 많이 얘기하는 가치들이다. 적절한 문제제기와 경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중요한 관계의 기술이 아니다. 이것들은 합의의 전부이며, 일상의 공간이 민주주의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가족, 연인, 친구 사이에까지도 우리는 이러한 원칙과 태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 일상의 공간을 민주적으로 만들어야만 존엄이 파괴되고 존재가 폭행을 당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민주주의의 전략. 개별적 당사자
 

직장에서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신입사원, 그리고 그것을 경청하고서 문제를 해결하는 집단.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순간 그 신입사원의 평범한 직장생활은 지옥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태도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는 건 다른 문제다. 민주적인 태도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현실에서 무턱대고 민주적 태도로 생활을 하면 일상의 영역에서 배제당할 확률이 높다. 누군가의 삶이 민주적으로 되기 위해선 민주적인 태도를 사회 전반에 확립하기 위한 전략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있었다. 단순히 정치적 이슈를 넘어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70년대, 80년대에 그들은 공장에서 일터를 바꾸기 위해 싸웠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소리쳤다. 성소수자, 학생인권을 위한 운동도 계속해서 있어왔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과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은 다르다. 여태까지의 노력은 대부분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리가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다른 전략과 방식을 취해야 한다.
 

그동안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전략은 연대였다. 주체들이 책임을 지고 한 연대의 방식은 그동안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 전략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모인 연대는 그 사람들의 개별적인 요구와 당사자성을 무시한다. 정치적인 이슈로 모였지만 그들의 감수성과 의식은 다르다. 이러한 전략을 계속 취할 경우에 사람들은 이슈중심으로만 사고하고, 총체적인 수준에서 민주적인 태도를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지이고 내 편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따라서 민주적인 태도를 위한 전략은 단순 연대가 아니다. 이 전략에선 소수자가 자신의 문제제기를 명확히 할 수도 없고, 그것을 경청할 주체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풍자이다. 다양하게 분할된 당사자 집단으로부터 사회 전반과 존엄을 침해하는 존재를 향한 풍자와 비판이 필요하다. 여기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정치적 집단성, 지역관계, 그 어떤 것도 없이 당사자성에 입각한 풍자와 조롱이 필요하다.
 

실제로 풍자는 굉장히 좋은 경청의 전략이다. 사람들은 풍자를 보면 메시지를 해석하고 그 방식을 존중한다. 풍자의 대상이 되는 존재조차도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풍자를 당해서 기분이 나쁜 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메시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풍자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메시지 전략이며, 가장 강한 문제제기의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의 풍자는 절대로 집단 중심적이지 않고 평등한 개인 중심적이어야 한다. 풍자가 집단 중심이 되면 메시지에는 권력관계에 내재된다. 그 순간부터 민주적인 문제제기는 권위의 발현으로 변질한다. 따라서 풍자가 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주체성을 지닌 동등한 당사자 개인들로부터 출발해 그들에게서 끝나야 한다. 민주적인 태도를 개인들에게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이기에 풍자는 개인적인 단위에서 일어나야 하며, 결국 이것은 풍자에 일정부분 익명적인 속성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개인이 풍자를 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억압을 받으면 민주주의가 오히려 퇴보한다. 개인의 안전은 풍자에 앞서서 보장받아야 한다.
 

풍자의 전략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주의 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메갈리아에서부터 시작한 지금의 여성주의 조류는 완전 평등한 주체들간의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이들은 풍자를 통해 자신의 문제제기를 관철하고 자신의 존엄을 세운다. 이때 풍자에는 성역이 없다. 이들의 풍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풍자의 대상인 남성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스스로를 성찰한다. 결국 성별의 민주주의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일상에서의 여성은 주체적 개인이 되었고, 관계는 드디어 평등한 합의의 관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죽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고 있다. 국가의 무책임함의 남성들의 차별에, 직장에서의 괴롭힘에 사람들은 죽는다. 이 모든 죽음에는 주체성 결여가 자리하고 있다. 폭력의 대상이 된 그들이 민주적인 주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그들은 안심하면서 살 수 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인권과 민주적 삶은 다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삶의 양식이 있어야만 발화자와 맥락을 모두 고려한 진정한 인권과 존엄이 가능하다.

김종하 중앙대학교(경제학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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