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게 굴지마라
존속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한 빈민가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의 죄를 판결하기 위해 배심원단 12명이 모인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때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한 남자는 말한다. “빈민가에서 자란 애들은 잠재적 사회악이니 유죄요” 그 말을 들은 빈민가 출신 배심원은 사내에게 화를 냈고, 그러자 누군가 그에게 “예민하게 굴지마라”라고 비난한다. “그 애가 어디 출신인지는 이 일과 전혀 상관없소. 사실에 근거해 얘기해야지” 그 말을 들은 한 노인이 말한다. 출신과 인종은 소년이 유죄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편견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든다.
현 국정 사태에 국민들의 분노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가면서 가수 산이와 DJ DOC의 곡이 발표됐다. “충혈된 네 눈 *홍등가처럼 빨개”,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 “미스박씨와 같이 말아먹은 나라” 무엇이 보이는가? 국민을 우롱한 대통령과 기득권을 향한 시원한 일침? 아니, 이것은 일침도 비판도 될 수 없다. 이 가사가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차벽을 향해 고함을 지를 자격도, 촛불을 들 자격도 없다. DJ DOC의 공연이 취소되자 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을 받은 대상은 ‘여성’이다. “우리끼리 이런 사소한 것으로 싸울 때가 아니다”에서의 ‘우리’는 누구인가. 여성은 ‘우리’ 안에서 쉽게 배제되고 동시에 쉽게 포섭된다.
촛불을 든 모든 이들은 약자이다. 그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함께 분노할 수 있었다. 눈을 뜬 이들이 모여 의사를 표현한 것. 한 명 한 명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횃불이 어떻게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계급 사회와 권력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서 계급과 권력이 생기는 모순적 상황을 피해야한다. 끊임없이 의식하고, 의심하며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강남 아줌마’, ‘고아’, ‘여자’ 박근혜가 아니다. 국민들이 비판하고 나아가 심판해야 할 대상은 한 국가의 원수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대통령’ 박근혜이다. 차벽 앞에 또 차벽이 세워진다. 편견이란 차벽 앞에서 여성들은 혐오를 멈추어 달라고 소리친다. 살수차를 대동해 물대포를 쏠 것인가? 그저 촛불을 들었을 뿐이다. 예민하게 굴지 마라.
*홍등가 : 유곽이나 창가(娼家) 따위가 늘어선 거리를 이르는 말.
길혜연(문창 16)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