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백마문화상 비평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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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백마문화상 비평부문 당선작
  • 이지언(문창 13) 학우
  • 승인 2015.12.07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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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문화상 비평부문 당선작

 

사라진 화음, 당신이 침묵하는 이유

 

-몸과 性을 중심으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침묵에서 벗어나 거기에 따라붙는 많은 편견들과의 투쟁을 선포하며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성을 침묵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은 언어적·신체적으로 여성의 몸과 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성기를 내보이며 공포감을 느끼는 여성들의 반응을 즐기는 바바리맨은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성 권력의 힘으로부터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은 여성을 침묵하게 하고 복종하게 한다. 여성의 몸과 성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나의 존재는 당연히 몸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투쟁의 시작인 것이다. 자궁(子宮)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자궁은 분명히 여성의 몸을 지칭하는 신체 기관이면서도 자식의 집이고, 정확히는 아들을 뜻하는 글자로 상형화된 단어이다. 남성의 정낭(精囊)이나 음경(陰莖)에서는 자식을 위한 생식의 의미보다는 성기 자체에 대한 특징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 여성의 몸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기보다 가부장제 내에서 생산성을 기준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성 또한 어느 때나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섹슈얼리티는 가부장적 가정 내에서 아내와 어머니로 존재할 때, 혹은 지켜질 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존중받는다. 미혼모, 사생아라는 단어는 있지만 무책임한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명되지 않는 남성의 존재는 은폐되어 있지만 가시화되어있는 여성의 몸은 네이밍 되어 통제당하는 것이다.

‘지켜질 만한’의 기준에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주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성은 성범죄 피해를 입었을 때도 자신이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증명해야 하고 이것은 곧 ‘침묵하기’를 말한다. 침묵하는 피해자 여성일 때 자신의 입은 피해의 정당함, 타당함을 증명하고 설득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침묵의 말하기 방식은 피해자화(化)를 동반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가부장제 안의 여성상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은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주변의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대부분의 여성이 여기서 또다시 침묵하기를 택한다.

필자가 말하는 주변의 시선이란 성범죄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가부장적 시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성폭력을 여성 개인의 고통으로 보지 않고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함께 논의하는 시선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환향녀라는 단어의 유래나 정신대 문제,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 사건 등, 이 여성들을 바라보는 입장은 모두 피해자 여성의 아픔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으로 환원된다. 때문에 정신대에 관한 담론은 국가의 아픔, 민족의 수치심으로도 환원되기 때문에 1990년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공론화가 된 것이다. 한일, 한미관계에서 이들의 아픔은 국가의 아픔으로 전시될 뿐이지 여성 개인의 아픔으로 언급되지 못한다. 윤금이 씨 살해 현장 당시의 참혹한 사진 또한, 후에 <로젤> (Rosel)이라는 연극이 상연되는 곳에 전시되기도 했으며, <우리들의 금이>라는 소책자의 수필에서 ‘그녀의 죽음은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의 자존심이 죽은 것이라고 한탄하며 한국인들이 민족 독립과 한반도 통일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일어서자’는 내용으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광주 민주 항쟁의 오월을 두부처럼 잘린 젖가슴으로 기억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위에서 소개한 사례들은 모두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한다기보다 애도를 통해 희생된 여성들의 몸이 공동체에 남성적 분노를 일으키며, 결속력을 만들어 주는 소비적 차원으로 전시되는 것에 불과하다.

앞의 사례들은 국가적 단위의 공동체 사이에서 나타난 폭력이기 때문에 그 여성들의 아픔은 적어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집단 안에서 ‘아픔’을 인정받게 된다. 같은 맥락이지만 아픔을 인정받지 못한 집단 내 성범죄 사실을 말하는 것은 집단의 명예를 더럽히는 ‘내부 고발자’, ‘배반자’가 된다. 밀양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의 경찰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에게‘내가 고향이 밀양인데 네가 밀양 물을 다 흐려놨다’고 한 발언도 단순히 개인이 가한 2차 피해가 아니라 피해자가 내부 고발자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일을 발설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인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이 태도는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친족 성폭력 사례에서도 적용된다. 친족 관계의 성폭력은 매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이 또한 가족들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진술이 계속해서 바뀌는 경우가 많고, 때문에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확보가 우선 과제로 언급될 정도이다.

앞서 잠시 말했던 지켜질 만한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즉, 남성들이 만든 이원항 속의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몸과 성을 기준으로 하며 그 뿌리는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서 출발한다. ‘MINO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가 사회적 논란이 일었던 것은 여성이 소품적으로 성적 대상이 된다거나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전히 순결 이데올로기가 작용되는데 반해 남성은 여성과의 잠자리 경험이 일종의 영웅담이나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논란을 일으킨 게 아니다. 단지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성(창녀)을 섹스를 할 수 없는 여성(성녀)에 빗대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부장제 내에서 보호받는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남성의 시각을 기준으로 성적 대상화되어 호명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동료로 인식되지 않는다. 어떤 집단 내에서 동료여야만 하는 관계임에도 성희롱적 발언들이 여성의 일상을 침범하는 것은, 만연해있는 불필요한 성적 대상화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필자는 평소 젠더와 관련된 사회 문제로 온·오프라인에서 논쟁을 자주 벌이는데, 몇 가지로 정형화된 남성들의 공격 방식이 있다. 상대방의 정치적 견해나 논지의 타당성을 떠나 발화자의 성별을 통해 발화의 가치조차 무시해버린다. ‘아무리 사상이 좋아봤자 여자는 사회 나가면 홀아비들 사이에서 냄새나지 말라고 놔두는 방향제’, ‘어차피 내 여자 될 사람 아니니 사상이 어떻던’, ‘너 같은 여자는 별로’라는 식의 공격 등이 그렇다. 단지 오프라인에서만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발화자의 존재성을 자신의 여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행위 또한 가부장적 프레임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타나는 성녀/창녀를 가르는 방식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자신의 여자’에는 여성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여성’자체에 대한 태도와 발화자를 불필요하게 성적 대상화를 하는 것,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여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드러나게 된다.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성은 이러한 성적 대상화를 빈번하게 겪게 되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것이 여성 개인이 갖는 가치를 주변화·타자화 시키며 폄훼하는데 쓰인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존재가 단지 여성이라는 성별로 한정 지어진다는 것은 곧 가부장제 내에서 필연적으로 이원항 프레임의 어느 쪽에 맞춰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 여성은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언어의 테두리에 구속받게 되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이제껏 내면화 되어왔던 가부장적 자아를 통해 소극적으로 모방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앞서 말한 가부장적 언어들은(텍스트로써의 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화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며 여성의 몸에도 집약되어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성 경험이 많은 남성의 성기 크기가 줄어든다는 설은 없지만 여성의 질은 성 경험이 많을수록 질이 늘어나고 질 모양이 변형된다고 알려져 있다. 처녀막 또한 막이 아니라 질 주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질 주름이 없이 태어나거나 원래부터 파열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성교를 할 때 출혈을 동반하는 여성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여성의 건강과 연결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삽입형 생리대 사용이 질 주름을 파열시키며 여성의 성기에 변형을 일으킨다는 등의 여러 가지 여성의 몸에 대한 신화들 때문에 한국 여성은 몸에 삽입하는 생리대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낌을 갖고 있다. 때문에 삽입형 생리대의 편리함과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삽입형 생리대 사용률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멕시코 등의 남미나 이슬람 문화권은 한국과 같은 이유로 탐폰 사용률이 현저히 낮다). 또한 자궁 근종 수술을 할 때 자궁 거상기를 이용하는 것이 회복이나 수술의 정확도가 높아지고 난이도는 낮아진다. 그럼에도 성 경험이 없는 여성은 거상기의 삽입 과정에서 질주름이 파열된다는 이유로 수술의 난이도가 높고 회복도가 느리며 수술의 악영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복강경 수술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편의보다 가부장제 내의 이데올로기가 우선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사례들이다. 이렇듯 2015년인 지금도 여전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들은 여전히 여성의 몸과 성을 통해서 작동하고 있다.

여성의 몸이 속하는 의식주 또한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통제 당한다. 옷차림에 관한 성범죄의 피해자 유발론은 이미 기존에 많이 논의된 담론이니 언급하지 않겠다. 몇 년 전부터 이루어졌던 ‘된장녀’, ‘김치녀’로 이어온 여성에 관한 혐오적 네이밍의 특성은 현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가 음식에도 젠더 이데올로기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된장녀나 김치녀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가며, 파스타를 먹는다. 혹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브런치를 즐긴다는 것이 특징이다. ‘맘충’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아이를 데리고 런치 타임에 특정 뷔페에 가서 밥을 먹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식생활에 대한 특징으로 규정하며 억압적 담론들을 생성시킨다. 반면 그 이원항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녀는 국밥이나, 김밥천국에서 밥을 먹어도 만족한다는 식의 담론들 또한 존재한다. 주거 공간뿐 아니라, 주거 공간에서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는 화장실도 마찬가지이다. 워터파크의 샤워실부터 대학교 내의 화장실까지 몰카가 수없이 돌아가고 그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공유된다. 과거부터 있던 섹스 동영상 유출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공간이 위협받는다. 심지어 이런 동영상이나 사진들을 무기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너의 피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직까지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기사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런 협박이 통한다는 뜻은 여성의 인격과 존재성을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로 환원시킨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게 여성의 성과 몸을 통제하는데 사용되는 젠더적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남성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서로를 부정함으로써 성립한다. 서로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닌데도 이것을 분리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아왔기 때문에 남성들은 노동을 국가와 사회, 가족에 대한 당연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며 수행해온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남성답지 못한 남성이 된다. 남성답지 못한 남성은 여성답지 못한 여성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존재성을 훼손당한다. 생계부양자로써의 역할을 해오던 남성에게 퇴직 후 찾아오는 우울증, 경제적 능력을 잃어버린 가장의 죄책감, 자살 사례 등이 이를 증명한다. 남성의 존재는 경제적 능력을 가진 가장일 때만 존재의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때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은폐된다. 이런 현상들은 가부장제를 해체하자는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현대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도되며, 안타까운 동정의 시선을 소비하는데 그친다. 여성 혐오적 발언이나 범죄는 남성 혼자 일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어려워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목소리는 억압된 여성뿐 아니라 남성 또한 해방시키고 현재의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디씨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출현한 ‘메갈리아의 딸들’은 그동안 인터넷에서 십 년이 넘도록 자행되던 여성 혐오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목소리였다. ‘우리는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이제 직접 행동하는 페미니즘을 외치기 시작했다. 원래의 혐오 발언에 기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혐오 발언을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시켜서 저항의 도구로 사용하며 여성 혐오, 근본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러링의 형태를 넘어 청소노동자들, 코피노들을 위한 모금 활동이나 온라인에서 거래되던 염산, 몰카 형태의 카메라 제품들에 대한 서명운동과 항의를 통해 판매 중단 조치가 취해졌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 시체 유기를 연상시키는 표지에 대한 남성잡지 Maxim에 판매 중지 서명운동과 항의로 전량 회수 조치와 사과문을 얻어냈다. 우리는 그들이 불편한 진실을 투사하고 있다고 해서 저것은 옳지 않은 페미니즘이라는 무조건적인 비난은 지양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출현하기 전에는 이렇게 여성 혐오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오갔던 적이 없었다.

침묵하던 사회는 그 소리들이 혐오를 더욱 부추긴다며 이전과 같은 침묵을 강요하지만, 그것은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여성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여성 혐오적 사건이나 네이밍들은 월장 사태부터 시작해 여태껏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아무런 저지 없이 여성의 일상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거나 투사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목소리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든 말콤 엑스의 연설이든,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지금의 목소리뿐 아니라, ‘내 몸은 나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과 고요는 다르다. 내 몸이 나인 것을 말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의 고요를 느끼고 싶다.

   

이지언(문창 13) 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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