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미니텃밭세트 (소설 부문 가작) 〈1110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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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미니텃밭세트 (소설 부문 가작) 〈1110호(종강호)〉
  • 곽재민 학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 승인 2022.11.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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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텃밭세트 

 

해가 중천에 떴지만 창가 쪽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칸막이커튼 탓에 병실 바닥만 밝았다. 그마저도 내 자리가 있는 병실 입구까진 하나의 칸막이를 더 거쳐야 했기에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다. 창가 쪽 아줌마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고, 쩔쩔매는 그녀의 그림자가 바닥을 가득 채웠다. 이내 그녀는 한숨을 쉬며 무의미한 시도를 그만두었다. 입구 쪽에 앉아 좋은 점은 딱 한 가지로, 티비와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칸막이를 친 덕에 채널 선택권은 순전히 맞은편 침대의 김씨와 내게만 주어졌다. 6인 병실에서 입구 쪽 침대 2개만큼은 내 땅인 셈이다. 충남뉴스에선 예고도 없던 폭설로 인해 무너진 석곡리의 딸기하우스 상황이 보도됐다. 직산읍 청년회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석곡리 이장에게 전화하려다, 2주 전에 보냈던 신년인사 메시지에 답이 없는 걸 보고 그만뒀다.

내가 속한 6인용 병실엔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모여 있다. 맞은편 침대의 김씨는 당뇨로 인해 발가락 7개가 괴사했다. 밭일을 마칠 때마다 손톱과 발톱에 낀 흙을 정리하던 나와 달리 경비원이었던 그는 양말 벗을 시간이 부족했다. 김씨는 일주일 전부터 휠체어에서 벗어나 보행기를 사용하며 조금씩 걸었다. 밤마다 복도를 걷는 습관이 있다고 고백한 김씨는 재활훈련을 할 때마다 가려운 데를 긁은 느낌이라며 만족해했다. 그런 그의 보행기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걸 보아 3주 만에 아내가 찾아온 모양이다. 나 역시 사흘 만에 보는 아내와 산책을 바라고 있기에 김씨가 돌아오면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산책은 할 만한지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돈 아끼겠다고 병원 밥을 나눠먹던 부부가 점심시간이 되도 돌아오지 않았다.

병실로 연근조림 냄새가 스멀스멀 들어올 때 즈음, 복도는 배식준비로 어수선해졌다.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들은 잘 지내던 환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만큼 허망한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내 간호사가 카트에 식판을 실은 채 문을 열었고, 난 그녀에게 병실 불을 켜 달라 부탁했다. 갑작스런 밝은 빛에 칸막이커튼이 일제히 걷혔다가 순식간에 다시 쳐졌다. 수간호사는 내게 점심 식판을 건넨 뒤, 늘 그랬듯 뇌졸중 전조증상을 하나씩 읊었다. 난 마비도 없고 특별히 발작 증세가 느껴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옆에 있던 보조 간호사는 신년이 된지 2주 만에 수납장에 붙어있던 내 인적사항의 나이를 47세로 바꿔줬다. 난 아직 오지 않은 김씨 대신 간호사에게 눈의 높이를 물어야했다.

산책하시게요? 햇살이 강해서 사모님 오실 즈음이면 꽤 녹을 거예요.”

겨울이면 곳곳에 언 곳이 있다 보니 휠체어 신세로 밖을 돌아다니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예보에도 없던 눈이 내려 얼마나 쌓였을지 감이 안 잡혔다. 내가 혼자서 밥을 먹게 되고 나서부터 아내는 매일 추가근무를 하고 온다. 아내가 자주 늦다보니 산책을 하려면 눈이 녹은 뒤에 저녁공기로 얼어붙는 상황까지 고려해야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할 아내에게 얼어붙은 산책로에서 휠체어를 밀어 달라 하기에도 미안하다. 하지만 눈의 높이가 줄어들면 미안한 감정도 줄어든다. 충남뉴스는 폭설이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니 농민과 시민의 안전에 유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오늘은 밖으로 나가야 기나긴 폭설기간 동안의 무료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점심 부식으로 나온 샤인머스켓을 떨어트려버렸다. 나를 휠체어 신세로 만든 원인을 마주하는 건 버거운 일이다. 수확할 때면 허리만 살짝 숙였던 고추에 비해 포도는 고개를 치켜들 일이 많았다. 병원신세를 지고 나서부터 고추만 키웠다면 뇌졸중이 안 왔을 거란 쓰잘머리 없는 생각이 맴돌았다. 어쩌면 기존의 대출금을 다 갚지 못한 상황에 샤인머스켓 밭까지 대출해서 사들인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안정을 찾았던 10, 아내는 밭을 정리하기 위해 판정리로 갔었다. 그녀는 값비싼 샤인머스켓이 땅바닥에 떨어져 썩어가는 걸 목격했다. 아내는 이장이란 사람이 동네 사람 아프면 자기가 수확해주지, 나몰라할 거면 뭣 하러 이장을 뽑느냐고 욕했다. 샤인머스켓은 보관성이 좋아 포도 중 가장 늦게 수확한다. 내 병원비는 작년에 수확한 캠벨포도의 값으로 내고 있다. 난 기존에 키우던 캠벨포도보다 단가가 높은 샤인머스켓을 먼저 땄어야 한다고 아내 몰래 후회했다.

간혹 미처 따지 못한 포도들이 아른거린다. 이는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간 포도밭으로 이어진다. 김씨나 아내가 있다면 말을 걸며 잡생각을 떨쳐냈겠지만 그러지 못할 땐 나만의 의식을 시작한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 왼쪽 2번, 오른쪽 2번씩 꺾어준 뒤 고개를 젖힌다. 중간에 순서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며 이런 행동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 둘 수가 없다.

4번째 순환을 마쳤을 때, 양복을 입은 남자가 김씨의 자리에 찾아와선 수납장을 뒤적거렸다. 난 그가 김씨를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사람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았고 여러 범죄행각으로 절연했다던 그의 막내아들이라 짐작했다. 나는 김씨의 지갑이 들어있는 위치를 알고 있기에 거침없이 수납장을 열어젖히는 그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남자는 칸막이 커튼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려다가 고개를 한 번에 너무 많이 올려버렸고, 그 탓에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혹시 김희필씨와 자주 얘기하셨나요?”

내가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박이자 그는 김씨가 간밤에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경찰이라 소개한 그는 내게 구겨진 편지를 보여주며 편지의 내용을 요약했다. 병수발을 다 들었으니 이제 이혼하자는 김씨 아내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구겨진 편지는 김씨 침대 밑에 떨어져있었던 연두색 종이였다. 내가 김씨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연두색 종이의 존재를 말한 것은 3주 전 즈음으로 그건 김씨의 아내가 찾아오지 않았던 기간과 비슷했다. 아내와 연락이 끊기자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의심했던 모양이다. 김씨가 2월에 시작할 예정이었던 보행기 훈련을 1월 2일로 앞당긴 건 편지를 줍기 위해서였다. 종종 우리 부부의 대화에 참여하던 김씨는 요 근래 칸막이커튼을 쳤다. 우리를 위한 배려라 생각했지만 단절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경찰은 김씨의 아내가 최근에 찾아온 적이 언제인지 물었고 난 김씨가 재활훈련을 시작했던 1월 2일 전후라 답했다.

새벽에 눈이 얼마나 높이 쌓였었죠?”

그건 왜 물으시죠?”

많이 쌓였으면 덜 아프게 갔을 테니까 묻는 겁니다.’라고 웅얼거렸다. 내 헛소리가 강원도 눈사태에 대한 속보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의 격양된 목소리에 묻혔다. 경찰은 한 시간 동안 김씨의 수납장을 뒤적거렸고 상황이 정리되자 보조간호사가 병실을 정리하러 들어왔다. 나는 그걸 쳐다보기 싫어 수간호사에게 휠체어에 올려 달라 부탁했다. 간호사들을 허망하게 만든 건 회복에 열심이었던 김씨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복도에서 밖을 바라봤지만 휠체어에 앉아있어 병원 바깥풍경만 보였다. 그러니 정작 병원 산책로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난 복도 한 편에 있는 미니텃밭 앞에 섰다. 퇴원 후 귀농을 꿈꿨던 김씨에게 내가 선물해줬던 것이다. 미니텃밭엔 상추와 청경채가 힘없이 서있다. 미니가뭄이 온 것처럼 이파리와 흙이 상당히 건조했다. 지난 10월, 우리 부부가 농사꾼이라고 소개하자 김씨와 그의 아내는 퇴원 후에 귀농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맞장구쳤다. 아파트 화단을 관리했던 김씨는 여러 제초제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귀농에 관해 조언하기 한층 수월했다. 농사 얘기를 할 때면 끝은 항상 기상청 얘기였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기상청을 너무 믿지 말라고. 난 생각이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우선 병실에서 미니텃밭을 키워보라 권했다. 귀농은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이 아닌 김씨 부부는 귀농 혜택도 없다. 김씨 부부는 유기농 고추를 키우고 싶다 말했으나 나는 그들을 뜯어 말렸다. 고추는 병약한 사람과 같아서 주기적으로 약을 안 주면 제대로 키우질 못한다. 3월 달에 퇴원 예정이었던 김씨는 미니텃밭에서 키운 작물을 첫째 아들이 마련해준 땅으로 옮겨 심으려했다.

아내가 김씨 부부를 위해 미니텃밭세트를 사온 건 12월 중순이었다. 창가 쪽 자리가 비면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해 햇볕이 잘 드는 복도에 놓고 키웠다. 담당 의사도 재활에 도움이 된다며 김씨를 응원했다. 하지만 2주전부터 김씨는 미니텃밭에 나가지 않았다. 난 그동안 간간히 이뤄졌던 대화에서 미니텃밭에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었다. 귀농에 대한 환상은 금방 깨지는 법이니까. 물을 주기 편하라고 복도 옆 화장실에 뒀던 1L짜리 물 조리개엔 물때가 껴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다 보니 세면대에선 물을 받을 수가 없어 걸레를 빨기 위해 있는 수도를 틀었다. 물 조리개를 제대로 쥐지 못해 환자복에 물이 잔뜩 튀었다.

내겐 총 8750평의 포도밭이 있었다. 마을 회관 앞에 120평짜리 고추밭까지 하면 8870평의 농지가 내 이름 앞으로 있는 셈이었다. 거기엔 무리해서 넓힌 샤인머스켓 밭 2700평도 포함되어있다. 재작년, 샤인머스켓의 인기가 날로 올라갈 때 대출을 더 해서 밭을 사들였다. 작년 한 해 동안 농약과 비료를 뿌려가며 키웠던 과일 중 대부분을 수확하지 못했으니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틀 전, 8870평의 땅은 경매를 통해 농협으로 넘어갔다. 내게 남은 땅은 칸막이커튼으로 나눠진 병실의 2평 남짓한 공간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주인 잃은 미니텃밭은 자연스레 내게 상속되었고, 물을 줘야한다는 의무감이 딸려왔다. 복도 한편의 미니텃밭은 내가 잊고 있던 농사에 대한 의무감을 오랜만에 선사했다.

병실로 돌아왔을 때 앞 침대는 누가 있었냐는 듯 깨끗이 비워졌고, 보조간호사가 침대 밑을 빗자루로 쓸며 정리를 마무리했다. 그녀의 쓰레받기엔 김씨가 놓친 것들이 담겨있었다. 검정색 양말 한 짝, 곰팡이 핀 귤, 연습 삼아 써보라고 건네줬던 영농일지까지. 간호사는 영농일지 한 편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내게 돌려줬다.

일기마냥 감정이 담긴 건 거슬렸지만, 김씨는 기온도 써가며 나름 영농일지 흉내를 내려고 노력했다. 2주 전을 마지막으로 그의 영농일지는 멈췄다. 지속적인 관심이 사라진 미니텃밭은 건조한 겨울 공기에 금세 말라갔다. 충남뉴스에선 여전히 폭설피해에 대한 뉴스특보가 전달되고 있다. 금방 녹을 거란 간호사의 말과 달라 역시 일기예보는 믿을게 없다고 중얼거렸다.

김씨의 아내는 김씨를 찾아오는 빈도수를 줄여나갔다. 그건 우리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내가 혼자 밥을 먹게 되자 이틀에 한 번씩 왔고, 화장실을 혼자 가게 되자 사흘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샤워도 할 수 있게 되어 나흘마다 오고, 혼자 빨래도 하게 되어 일주일마다 찾아오면 아내를 볼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까. 김씨는 칸막이커튼 안에서 그걸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100세 시대에 장애연금으로 둘이 살아가는 건 아내에게 무거운 짐을 나눠주는 꼴이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딸린 자식이 없다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할 만큼 다했다. 김씨 아내의 행동이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은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다 문득, 아내가 내게 일방적인 통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난 오늘 떨어진 샤인머스켓 말고 침대 밑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침대 밑을 봐야했다. 쓰레받기를 치우려는 보조 간호사를 불러 세우려다가, 환자 주제에 병간호하는 아내를 의심하고 있단 소문이 돌까 그러지 못했다.

보조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침대 옆 수납장에서 아내가 화장할 때 쓰는 손거울을 꺼냈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가져다대봤지만 바닥엔 먼지 쌓인 머리카락뿐이었다. 난 재활훈련 할 때처럼 몸을 오른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손거울이 비추는 바닥면이 점차 넓어졌지만 한계가 있었다. 몸에 힘을 실었더니 손거울을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빠져갔다. 결국 내 손이 아닌 느낌이 들며 손거울을 놓쳤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그때 옆 침대의 칸막이커튼이 쳐지며 조금 환해진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난 다리를 침대 왼쪽으로 빼고 몸을 오른쪽으로 기운, 상당히 어정쩡한 꼴을 한 채 옆 사람과 대면해야했다. 옆 침대의 청년은 이어폰을 손에 쥐곤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중요한 종이를 떨어트렸는데 어디 있는지 찾으려다가 거울을 깨트려버렸다고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침대 밑을 쳐다봤다.

청포도밖에 없어요.”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칸막이커튼이 다시 사납게 쳐졌고, 바닥은 어두워졌다. 재활치료를 위해 날 데리러 온 수간호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마비 증세가 온 건지 물었다. 나는 단순한 실수로 손거울을 놓쳐버렸다고 말했다.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걸 보아, 아내에게도 똑같이 변명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뇌졸중 집중치료실은 세탁실 맞은편에 있다. 병실의 쾨쾨한 냄새로 막힌 코가 세탁실을 지날 때면 시원하게 뚫린다. 겨울이랍시고 창가 쪽 환자들이 환기를 자주 안 하려드니 병실은 아침, 점심 식사와 묵은 빨래 냄새가 섞인 잡내로 가득하다. 내가 산책만 학수고대하는 또 다른 이유다.

치료실 바닥엔 재활치료에 쓰이는 콩과 플라스틱 컵이 군데군데 떨어져 지뢰밭을 연상케 했다. 환자들은 자기 앞에 놓인 콩을 주워 담느라 바쁘고, 담당의사는 바닥에 떨어진 콩을 줍느라 허리가 아프다고 곡소리를 냈다. 담당의사가 내게 와서 마비됐던 오른손을 볼펜으로 툭툭 치더니 회복속도가 빨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담당의사는 늘 그렇듯 뇌졸중 전조증상을 읊었고, 난 아무런 예고도 느끼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콩이 담긴 일회용 접시와 젓가락이 놓인 책상 앞에 나를 세웠다. 내가 오늘 놓친 건 콩자반이 아니라 샤인머스켓인데요.’라고 웅얼거렸다. 대각선의 노인환자가 콩이 담긴 유리병을 땅바닥에 엎은 바람에 담당의사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처음엔 두 시간이 걸렸던 유리병에 콩 넣기를 30분 만에 끝냈다. 담당의사는 콩이 담긴 유리병을 흔들어 보이며 곧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치료를 마치고 나올 때 휠체어 바퀴에 깔려 으스러진 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먼저 따지 못해 썩어서 땅바닥에 눌러 붙은 샤인머스켓으로 이어졌고, 난 저녁을 먹기 전까지 나만의 의식을 하면서 잡생각을 떨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 업무가 끝나지 않아 조금 늦는다는 아내의 연락이 왔다. 저녁식판을 치울 때 창가 아줌마의 요청으로 불이 꺼져 병실은 TV를 빼곤 완전히 어두워졌다. 칸막이커튼 속 핸드폰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병실을 미세하게 밝혀줄 뿐이었다. 그때 식판을 회수하러 온 보조간호사가 전조증상을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김씨의 장례식장이 1층에 마련되었다고 덧붙였다. 혼자라도 장례식장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수납장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인출기를 쓰지 못하는 게 걱정이었지만 다행이도 오만원권 한 장이 지갑에 남아있었다. 병원복 차림만으로 가는 것은 성의 없어 보일까봐 검정색 자켓을 걸쳤다. 나는 보조간호사에게 휠체어에 올려 달라 부탁했고, 그녀는 혼자 장례식장 가는 걸 아내한테 허락받았는지 물었다.

아내가 늦는다는데 어쩝니까. 이제 혼자서 가보기도 해야죠.”

간호사는 장례식장으로 갈 수 있으면서도 최대한 미끄럽지 않은 길을 알려줬다. 그녀는 눈이 덜 녹았으니 건물 밖으로 나서진 말라고 당부하며, 장례식장 앞에 돈 봉투가 구비되어있다고 일러줬다.

나는 복도에 있는 미니텃밭세트를 챙겨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경찰이 미처 챙기지 못한 김씨의 유품을 김씨의 아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이걸 꼭 밭에 심는 게 김씨의 꿈이었으니 양지바른 곳에 심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엘리베이터는 10층부터 매 층마다 사람을 태웠고, 내가 있는 7층까지 왔을 땐 나 하나 들어가기에도 벅찰 만큼 사람이 많았다. 같이 기다리던 환자가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겠다며 선뜻 휠체어를 돌린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장례식장은 1층 외곽 쪽에 마련되어있었다. 문상객들에게서 딸려온 눈이 녹아 복도엔 구정물이 생겼고, 이는 휠체어 바퀴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병원 어느 층에서건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 과반수였지만 장례식장은 아니다. 입구에 있는 조의금 봉투를 챙기려했다가 팔이 닿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김희필이란 이름은 7층 재활의학과의 환자 수납장에서 장례식장 5호실 모니터로 옮겨졌다. 5호실 안에는 건장한 체격의 상주만 앉아있었다. 난 상주가 먼저 묻기도 전에 김씨의 앞자리에 입원해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상주에게 첫째냐고 묻자 그는 둘째라 답했다. 둘째는 자신의 형이 파나마에서 무역 일을 하느라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것이 힘들다고 설명했다. 막내 동생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조문을 위해선 발목 높이의 턱을 넘어야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둘째는 팔을 건네주어 나를 김씨의 영정 앞에 올려줬다. 영정사진은 김씨가 정정할 때로, 내게 익숙했던 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절을 했다간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기에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간단한 목례를 했다. 난 생전에 김씨가 귀농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둘째는 어눌한 말투 때문에 잘못 이해했는지 그거 참 안됐군요.’라고 답했다. 내가 미니텃밭세트를 건네주자 둘째는 맡아달라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형이 아버지의 귀농을 위해 땅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를 괜히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떠나려는 제스쳐를 취했고, 그는 다시 나를 휠체어에 내려줬다. 그는 내게 미니텃밭세트를 다시 건넸다. 난 조의금 봉투대신 그의 손에 오만원권 한 장을 쥐어준 뒤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통유리로 된 병원 입구는 습기가 차있어서 밖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 혼자 바깥에 나가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 금기를 깨려는 건 김씨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간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김씨는 미니텃밭의 작물을 자신의 땅에 옮겨 심겠다고 다짐했다. 또 다른 이유지만, 아내에게 산책 얘기를 꺼내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봐야했다. 그래야 눈이 얼마나 쌓였냐는 질문에 내 스스로 답할 테고 아내가 산책을 거절해도 무안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밖으로 새지 말라는 보조간호사의 부탁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내 머릿속엔 오로지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고개를 돌렸다간 김씨가 떨어진 곳을 보게 될까봐 입구만 보고 내달렸다. 미니텃밭을 들고 밭으로 향하는 건 그를 향한 일종의 추모행위다. 단지 김씨의 밭 주소를 몰라 내 밭이었던 판정리로 가는 것뿐이다. 내가 입원한 대학병원은 판정리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다. 대학병원이라 앞을 지나는 버스가 3대나 있었다. 그 간격도 짧아 버스가 많이 멈춰 섰다. 하지만 휠체어 탄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저상버스는 많지 않았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저상버스가 올 줄 알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서둘러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직산으로 향하는 버스가 멈출 때면 혹시 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버스 기사는 단호했다. 그는 승객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며 눈치를 봤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핸드폰만 쳐다볼 뿐이었다.

저상버스가 오고 승객들이 하차하는 문에서 휠체어 리프트가 나왔다. 그럼에도 탑승은 꽤나 오래 걸렸고, 접혀져있는 좌석을 버스 기사가 직접 와서 펼쳐야했다. 사람들은 핸드폰을 치운 뒤, 어정쩡한 모습으로 버스 한가운데에 있는 나를 쳐다봤다. 탑승을 마무리하고 버스가 출발하자 그들은 다시 핸드폰을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그들의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판정리로 더 들어가려면 안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갈아타야했다. 다행이도 직산 관내에 도착했을 때엔 승객은 많이 빠져 내리는 과정이 눈치 보이진 않았다. 더군다나 저녁이었기에 버스를 타려는 사람도 몇 명 없었다. 판정리로 가는 버스는 40분마다 있지만 저상버스는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은 상당히 오래되어 균열이 많이 보였다. 군데군데 뚫려있는 틈 사이로 눈이 떨어졌다. 분명 쌓이게 될 함박눈이었다.

판정리행 버스기사는 정차한 뒤 나를 업어 직접 의자에 앉혔다. 그는 능숙하게 휠체어를 접어 내 옆에 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역시 뇌졸중에 걸려 휠체어 접는 법쯤은 알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버스엔 오로지 나뿐이었기에 내 사연을 설명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내 얘기를 듣곤 그 동네 이장이 참 못된 사람이군요라며 나를 위로했다.

원래 살던 집을 지나 삼육두유공장 정류장에 내렸다. 그곳에 내 소유였던 포도밭이 위치했다. 시골은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친화적이지 않다. 농촌은 순전히 건강한 사람들 위주로 길이 만들어져있다. 눈으로 뒤덮인 농로는 입구부터 가파름이 상당했다. 결국 휠체어가 턱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고, 약간의 힘을 주는 순간 그대로 고꾸라져 미니텃밭과 함께 밭으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휠체어를 짚은 뒤, 걷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오른손으론 미니텃밭세트를 감싸고 왼손으로 땅바닥을 짚어가며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양지바른 곳을 골라 세트 용품 중 하나였던 미니 삽으로 땅을 팠다. 그러곤 미니텃밭에서 축 처진 청경채와 상추를 조심히 꺼내 그곳에 심었다. 죽어있는 작물을 심었으니 얼마나 더 살지 걱정할 필욘 없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소주 한 병을 미처 가져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씨는 씨앗처럼 땅 속에 묻힌다. 그 주변에 꽃이 핀다면 해바라기는 아닐 것이다. 김씨는 밤에 걷는 걸 좋아했으니까. 나는 청경채와 상추 주위로 흙을 뿌린 후 묵념을 했다.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 시골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특정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주변에 있는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고 시골집에는 불이 켜졌다. 갓길에 차를 세운 경찰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불러댔다. 그들은 휠체어를 발견한 뒤 머지않아 밭에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있는 나를 발견했다. 뒤쪽에 서있던 경찰은 한숨과 함께 욕설을 뱉었으며, 다른 경찰이 뛰어와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나름 정확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과 함께 그러니까 이새니씨요?’라고 다시 물었다. ‘이재민이란 명찰을 확인한 뒤로는 내 이름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아내 분이 엄청나게 걱정 중이십니다.”

그야 명복을 빌어야하니까요.”

두 명의 경찰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팔을 부여잡은 뒤 질질 끌어 경찰차에 태웠다. 병원 슬리퍼엔 진흙이 묻었고, 양말이 축축해져 발이 시렸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경찰은 차 내부의 진흙을 치워야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병원 정문 앞에 아내가 서있었다. 경찰차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고, 진흙투성이인 내 자켓과 환자복을 보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혼자 다니는 거야. 당신이 이럴수록 난 계속 병원에 와야 된단 말이야. 이제 일 자주 나가야 하는데 어떡해.”

당신이 늦는다기에.”

아내는 조금이라니까 그걸 못 기다리냐면서 다그쳤다. 그나마 다행인건지 아내는 내 위험한 외출에 대해선 함구해줬다.

밖엔 함박눈이 줄곧 내려 눈이 쌓였다. 눈이 내리면 산책은 삼간다. 12월에 정해진 우리의 규칙이다. 아내가 산책해야 한단 의무감을 덜었을 테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우리는 7층에서 병원 전경을 보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했다. 나는 오늘 미니텃밭의 청경채와 상추를 판정리 밭에 옮겨 심은 걸 고백했고, 아내는 더 이상 시골에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했다.

충남뉴스에선 폭설로 무너진 석곡리 딸기하우스 뒤에 붕괴사건이란 단어를 붙였다. 내부에 있던 농민이 매몰되어 사망한 게 그 이유였다. 뉴스는 부실공사를 거론하며 해당 비닐하우스업체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기예보로 넘어가던 찰나에 아내가 칸막이커튼을 쳤고, 침대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당황하는 표정을 하자, 그녀는 이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라 짧게 답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퇴원하고 지낼 아파트를 다녀왔어.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지만, 엘리베이터가 2대야. 우리 입장에선 편하지. 시골이랑 멀어지고 좋을 거야.”

아파트를 알아봤다는 건 아내가 떠나지 않을 거란 안심을 주면서도, 22살에 내려와 27년간 살았던 시골에서 멀어진다는 걸 실감나게 했다. 아내는 판정리 밭이 경매에 넘어간 뒤, 병문안 온 사람 하나 없었다며 시골에 치를 떨었다. 농사를 짓지 못하면 농촌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게 아내의 생각이다. 아내는 이사 갈 아파트 내부의 장점을 나열했고, 난 좁은 복도에서 휠체어를 탄 채 사람을 마주치면 어떻게 지나가야할지 고민했다.

여름이 아니기 때문에 삼일에 한 번 씻는 것은 큰 무리가 되지 않는다. 한바탕 소동이 있던 탓에 평소보다 씻는 시간이 늦어졌고 샤워실엔 우리 부부 뿐이었다. 아내는 더러워진 환자복과 자켓을 비눗물에 불렸다. 유치원 교사를 그만두고 밭일을 도왔던 아내는 이제 전화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5일 근무에 190만원은 농사지을 때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돈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아내의 잔업이 되었다. 아내는 내 코를 풀어주며 자식을 안 낳은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짓을 두 번은 못하겠어.”

아내는 고개를 돌려 애꿎은 코를 풀었고, 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손이 저려 와서 그러지 못했다. 김씨 부부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김씨의 아내는 김씨를 떠나지 않았을까. 헛된 망상은 판정리의 포도밭으로 이어졌고, 난 병실에 돌아가면 아내와 잡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실에서 돌아오며 바깥을 봤는데, 눈발이 더욱 거세져있었다.

내일은 눈이 얼마나 높이 쌓이려나.”

그건 왜?”

당신 출근해야하니까.”

난 병실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바닥에 떨어진 샤인머스켓을 주워 달라했다. 포도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아내는 퇴원할 때 줍고 나가자 했다.

, 회복이 잘 된다면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 그땐 고추만 키울 거고.”

아내가 빨래를 개다말고 멈췄다. 내가 말을 뱉고 난 후로 뉴스를 전달하는 리포터의 목소리가 3번 바뀌었으니 아내는 꽤 긴 침묵을 유지한 셈이다. 앵커가 스포츠 뉴스를 안내할 때 아내가 입을 열었다.

시골로 다시 가기 싫어. 아주 지긋지긋해. 동네 사람들한테 잘해줘 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뭣 하러 거길 다시 가. 그렇게 살 거면 차라리 아파트에서 사는 게 훨씬 나아.”

몇 층이야?”

?”

굳이 아파트로 가면 1층이면 좋겠어. 아파트 현관 옆에 미니 텃밭도 놓을 수 있고, 밖에 눈이 쌓인 것도 볼 수 있으니까. 근데 또 1층은 수도를 타고 지렁이나 벌레가 많이 들어온다 하더라고.”

13층이야. 베란다에 텃밭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을 거야. 바깥은 거기서도 볼 수 있고. 여보, 그런 건 미련이야.”

미니텃밭 말이야, 더 큰 거 있으면 사다줘. 고추를 키우고 싶어.”

김씨가 죽어서 그래? 아니면 정말 판정리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내는 우리가 시골에 갈 수 없는 이유를 나열했다. 농약통을 짊어질 수 없다는 점, 물조리개를 손에 쥘 수 없다는 점, 시골은 결함이 있는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 아내는 내 반박을 듣지도 않은 채 병실을 나갔다. 아내가 진정하고 돌아오면 반대편 침대에서 편하게 재울 생각이었지만, 뉴스가 다 끝날 때까지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난 아내가 신경 쓰여 선잠을 잤고, 동이 트기 전에 깨어났다. 칸막이 커튼에 둘러싸인 병실은 초저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두웠다. TV에선 폭설로 인한 충남지역의 피해를 브리핑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병원에 있었더라도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라 병실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병원복도는 아침식사 준비로 분주하다. 간호사는 이제 병실 문과 커튼, 총 두 번 노크한다. 간호사가 일일이 식사를 건네주는 것이 번거로운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칸막이커튼 안은 독방과 다를 게 없다. 병실에 입원한 첫날부터 칸막이커튼을 친 이들에게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단절에 익숙해져야한다. 아파트라고 해서 칸막이커튼 안과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아내한테 필요한 미니텃밭의 구체적인 사이즈를 적어 카톡을 보냈다. 고추를 심을 생각이니 소량의 농약도 같이 사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내는 엉뚱하게도 어제 알아봤던 아파트 계약이 마무리됐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당분간 시골에 돌아가고 싶단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래도 미니텃밭을 열심히 키우다보면 아내가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

김씨의 죽음으로 칸막이커튼 내부에 1평 남짓한 침대가 내 땅이 되었다. 잠시나마 미니텃밭이 복도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면 1.5평 정도가 내 땅이었던 셈이다. 이런 방식은 시골에 처음 왔을 때와 같았다. 조금씩 내가 가진 땅을 넓혀가는 것. 내가 판정리로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며 TV를 껐고 이내 조용해졌다. 복도에 있는 간호사들의 잡담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 눈이 잔뜩 녹았는지, 간호사들은 역시 기상청은 믿을게 못 된다고 입을 모았다. 난 복도식 아파트로 가서 어느 곳에 미니텃밭을 놓아야 햇빛을 잘 받을지 생각했고, 아내와 잡담할 때처럼 흥분됨을 느꼈다. 더 이상 나만의 의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가작 수상소감>

곽재민 학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곽재민 학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가작 당선 소식을 듣기 전날까지도 저는 이 소설을 고쳤습니다. 그만큼 제 소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당선소식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시골에서 3년간 농약과 비료를 팔았습니다. 그때 봐왔던 농촌의 도시화와 부조리함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는데,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농촌은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도시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이 부조리한 상황에 놓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시선으로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문학의 꿈을 같이 꾸는 병헌 대성 성현, 그리고 제 소설을 읽어주고 합평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소설적 감각을 일깨워주신 김수진 교수님과 희망을 심어주신 김태수 교수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묵묵히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친구들은 요즘 들어 자주 웃는 제가 보기 좋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좋은 소설 쓰겠습니다. 제게 원동력을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내가 일하던 매장에 오시던 아저씨, 당신 덕분입니다. 직접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슬픔을 어렴풋이 예상해봤습니다. 제가 베풀었던 호의라곤 믹스커피를 타준 것과 신문을 내어준 것뿐이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어줬단 이유로 제게 고맙다고 해준 당신이 기억에 남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쓰러졌던 포도밭에 다시 서있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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