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씨앗을 머금으면, 잠잠 (소설 부문 당선작) 〈1110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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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씨앗을 머금으면, 잠잠 (소설 부문 당선작) 〈1110호(종강호)〉
  • 권승섭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2.11.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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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머금으면, 잠잠

 

이제 슬슬 집을 허물어도 될 것 같다고. 그런 말을 몇 차례나 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새집을 짓는 일을 결정했다. 다른 곳으로 가는 일도 염두했으나 죽림을 떠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죽림은 이름만큼 대나무가 많은 마을은 아니었다. 뒷산을 바라보면 우거진 초목 사이로 대나무가 층층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대숲에 올라 가는 사람이 없었고, 관리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올라간 것도 아주 어릴 적이라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죽림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마을의 입구를 중심으로 오른편으로 가면 시내가 나왔다. 시내에는 병원과 은행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설과 농업 전문 대학교도 있었다. 은재는 그곳 대학교에서 작물재배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마을 입구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면 은재는 항상 내가 사는 집 앞을 지나야 했다. 뒤뜰로 들어온 은재는 종종 바깥에서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나는 신발을 꺾어 신고 뒷문으로 나갔다.

은재와 나는 자주 함께 걸었다. 은재의 집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종택이었고, 마을의 입구에서 가장 먼 집이었다. 입구에서 종택을 바라보면 희미하게 기와집의 형상이 보였다. 은재는 종종 집까지 혼자 걸어가기 심심하다며 찾아왔다. 그런 날이면 함께 걸어주었다. 한 번은 저녁운동을 하자는 은재의 전화를 받고 나간 적도 있었다. 저녁운동은 횟수로 따지면 일주일도 채우지 못했지만 자주 함께 걸었다. 은재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고택들이 여럿 있었고 논과 밭도 있었다. 여름의 벼는 꼿꼿하고 푸르렀으며 노을이 질 때면 황록색으로 변하고는 했다.

우리 집 허물어. 은재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언제 옮기는데? 아빠가 옮기라고 하면.

얼른 비가 와야 할 텐데.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말라 붙은 개울을 지날 때쯤에 은재가 말했다. 나는 문득 몇 해 전 여름을 떠올렸다. 그해의 과수원은 태풍을 맞아 낙과들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마치 여름에게 심판을 받고 난 뒤의 폐허 같았다. 태풍이 지난 후의 낙과들은 햇빛을 받아 썩어가고 물러갔다. 나에게 여름은 그런 모습이었다. 여름에는 멍이 들어가듯 빛의 멍울이 번져갔다. 그것이 아프지 않게 보였다.

 

마을에는 삼백 년이 다 되어가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정확히는 이백팔십 년이 다 되어가는 정도라고 예측하는 나무였지만 나는 나머지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삼백까지의 시간은 나의 나이만큼 더 채워야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로 여겼다. 나는 자주 멀다를 높다로 이해하고는 했다.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멀지 않았다고. 삼백 살의 시간을 담기에는 그리 웅장하지 못한 나무라고. 그러니 쑥쑥 자라야 한다고. 나무의 꼭대기를 자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은재도 느티나무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느티나무는 무늬나 색상이 좋아서 예로부터 고급 목재로 쓰였대.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 귀하게 쓰였다더라고. 그때 나는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을의 느티나무가 집이나 가구가 된다면. 몇 가지의 조각으로 군데군데 흩어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나무의 시간이 멀게 느껴졌다.

느티나무는 나와 은재의 집 중간쯤에 있었다. 나의 집이 느티나무에서는 조금 더 먼 듯했지만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곳을 중간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했다. 나무 아래에는 플라스틱 의자와 나무 의자와 철제의자가 하나씩 있었다. 철제의자는 이음새 한곳이 헐거운지 삐걱거렸는데 은재는 늘 그곳에 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앞 뒤로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때때로 그 소리가 적막을 채워주고는 했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가 붉은 하늘이 거뭇거뭇해지면 일어서는 날이 많았다. 특히 여름에는 해가 빨리 지지 않으니 더욱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해가 져도 하늘이 푸르를 때가 많았다.

내가 사는 집은 마을의 입구와 가장 가까웠다. 동네 사람들이나 이웃마을로 넘어가는 차들이 자주 지나다녔다. 집의 구조는 디귿자 모양이었는데 정확히는 冂 자 모양이었고 정중앙의 현관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갈라지는 구조였다. 왼편으로는 나와 언수의 방이 차례로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안방과 부엌과 화장실이 있었다. 그러니까 왼편 가장 끝에는 나의 방이, 오른편 가장 끝에는 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冂 자 모양인 탓에 거실이 따로 없는 셈이었지만 복도를 거실이라 불렀다. 기다란 거실에서는 어느 창문으로든 마당이 보였다. 나는 창문을 통해 부추나 대파 같은 채소가 텃밭에 자라는 것을 내다보고는 했다.

손님들이나 친척들은 올 때마다 집의 모양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기다란 복도에서 거실처럼 둘러앉아 얘기를 나눌 때 사람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에 대해 말할 때 대부분 특이함이나 이상함에 가깝게 말하고는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평생을 살아온 집에 정이 남아 있음도 틀림이 없었다. 새집을 짓는 일에 크게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크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집을 짓는 동안에는 마을회관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전기세, 수도세를 포함한 일종의 월세를 사십만 원씩 내는 조건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크게 생각 하지 않았다.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일은 그리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마을의 집들이 대부분 오래된 탓에 허물고 새로 지은 집들이 있었다. 집을 허물지 않고 지붕만 새로 올리거나 기울어진 담벼락을 다시 쌓거나 시멘트를 바르거나 배관을 교체하기도 했다. 사용하지 않는 우사를 없애고 텃밭을 가꾸는 집도 있었다. 종택을 빼고는 대부분 오랜 세월에 맞춰 모두 조금씩 뜯어고쳤다.

 

*

 

짐을 옮기는 날은 조용하고도 소란스러웠다. 역할을 나누지는 않았으나 각자가 자기의 일을 맡았다. 나는 책과 옷들, 그리고 많지 않은 짐을 상자에 담아 하나씩 날랐다. 짐들이 빠져나가자 방이 휑해졌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를 울리는 듯도 했다. 언수와 나는 아버지를 도와 서랍장을 함께 날랐다. 발가락을 찍힐까 조마조마하며 옮겼다. 옷장을 나를 때에는 반대편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더욱 낑낑거리며 현관을 나갔다. 집의 가구들은 대부분 내가 어릴 적부터 있던 것이었다. 모서리가 닳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들이라 폐기 스티커를 붙여 내놓았다.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었고 자개장 하나를 빼고는 모두 버려졌다.

자개장과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아버지의 트럭에 싣고 나머지 짐들을 뒤뜰을 통해 날랐다. 마치 가족 절도단처럼 짐을 옮기며 집과 마을회관을 오갔다. 수십 번을 옮기고 나서야 제법 집이 정리되는 듯했다. 회관은 이층이었고 아치형의 초록색 플라스틱 지붕이 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였다. 건물의 일층에는 주방과 화장실이 있었고, 방 두 개가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방 하나에 짐을 몰아서 넣었다. 엄마는 주방과 냉장고를 정리하고 챙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겨울에 마당에 묻었던 김치도 꺼내어 통에 옮겨 담았다. 언수는 자기 짐을 다 옮기고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금방 실증이 나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누나 와이파이 어딨어? 회관에 와이파이 없어. 가서 티브이 봐.

텅 빈 집은 뼈만 남은 생명체 같았다. 그 속에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뼈만 남은 집은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더욱 공허해졌다.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벽 곳곳이 시커멓고 벽지도 들떠 있었다. 가구가 있던 자리는 벽이 하얬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회관에서의 생활은 제법 괜찮았다. 티브이가 있는 일층에서 언수가 잠드는 날이면 넓은 이층을 혼자 썼다. 이층은 따로 방이 없이 화장실만 구분되어 있어 널찍했다. 살던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회색의 가벽으로 둘러싸였다.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했으나 회관의 이층 쪽창으로는 원래 집이 아주 잘 보였다. 허물어지는 과정부터 잔해가 치워지는 과정, 그리고 골격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살아온 집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는 것. 굴착기 한 대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것. 그런 불안전한 집에 살았다는 것을 알아갔다. 집이 무너지는 날에는 소음이 회관까지도 전해졌다. 거대한 동물이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듯 주기적으로 쿵쿵거렸다. 회관까지도 진동이 전해져서 건물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1층짜리 주택을 부수는 작업이었기에 그리 소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는 집이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창을 닫았다.

주말에는 격주로 회관에서 공예반을 열었다. 강사가 방문해서 작은 소품 같은 것을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이웃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엄마도 이웃들과 공예반 수업을 함께 들었다. 아버지는 놓을 곳도 없는데 하지 않는 게 낫지 않냐고 말했지만, 새집이 지어지면 놓으면 된다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수긍이라기보다는 엄마가 보내는 무료한 삶에 대한 이해에 가까웠다. 공예반이 있는 날의 나는 이층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으면 바닥에 달라붙은 귀로 공예반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웃음이 웅웅거리며 전해졌다. 그 속에는 엄마의 웃음도 섞여 있을 것이었다. 회관의 천장은 이상하게 높았다. 무너진 집, 그러니까 이미 옛집이 되어버린 곳에 살 때는 침대에 누워있었기 때문일지 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높은 곳을 올려볼 때마다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높고 거대한 것이 주저앉아 나를 덮치면 고통보다는 제법 아늑할 것 같았다.

 

*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자퇴한 일을 종종 꺼내며 비아냥거렸다. 기를 써서 대학에 갔던 일에 대해. 교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일에 대해. 혹은 할 거 없으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던가 때 되면 결혼이나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요즘은 은행원도 괜찮다더라. 그런 말을 덧붙이는 날도 있었다. 은재는 뭐하고 지내냐고 묻는 날도 있었는데 그 물음을 들을 때면 나는 명치 안쪽에 응어리가 생기는 기분을 느꼈다. 은재는 농대에서 착실하게 공부하고 지내죠. 여전히 밝고요. 그렇게 말해야 하나. 아버지의 눈에는 졸업하고 부모님 일을 돕게 될 은재의 모습이 좋게 보일 터였다. 대학에 붙었을 때 아버지는 곳곳에 자랑하고 다녔다. 농대에 간 은재와 비교하며 잘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방적인 대화를 아버지와 한 날이면 나는 은재를 찾아갔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어서 종택까지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종택 근처에는 언제나 꽃이 많았다. 엉겅퀴와 원추리가 곳곳에 있었고 개망초도 풀 사이마다 피어있었다. 꽃들은 해마다 소리 없이 피고 졌다. 언제 어떻게 피었는지도 모르게 피었다. 나는 작고 투박한 들꽃들이 은재를 닮았다고 여러 번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선명한 색깔을 띠는 것도 은재와 꼭 닮은 듯했다. 종택에 들어서자 마루에서 도라지를 다듬던 아줌마가 나를 반겼다. 아줌마는 엄마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짧은 대답을 했다. 엄마와 나는 명절이 다가오면 종택에서 일을 돕고는 했다. 설날에는 만두를, 추석에는 송편을 동네 사람들이 마루에 모여 함께 빚었는데 그중에는 나와 엄마도 있었다. 일을 도와주고 가족들이 먹을 만큼 음식을 가져왔다. 엄마는 재료를 준비하는 일을 줄일 수 있어서 해마다 그렇게 하는 일을 좋아했다.

이곳의 종택은 사방이 둘러싸인 구조여서 어릴 적부터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종택 뒤편으로 산이 있어서 산의 그늘이 종택을 덮을 때면 더욱 어두워졌다. 은재의 방은 대문 오른편에 있었다. 작은 방이었다. 은재 의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은재의 방에 올 때마다 시간이 지나면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다. 어릴 때는 방이 좁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같이 있으면 금세 방이 후덥지근해졌다. 은재가 자기 얼굴만 한 배와 과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반으로 가른 배를 슥슥 깎아 나에게 내밀었다. 달지는 않은데 제법 시원해.

방 안에 배를 사각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내가 이유 없이 종택에 찾아온 날이면 은재는 먼저 묻지 않았다. 나의 표정을 살피며 짐작할 뿐이었다. 나갈래? 남은 배를 우물거리며 은재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은재를 따라 나갔다. 그늘이 있는 곳을 찾다가 별채 마루에 올라갔다.

저건 뭐야?

씨씨티비. 몇 달 전에 도둑 든 이후에 시에서 설치해주더라고.

종택의 별채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있었다. 나는 보물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보물에 대해서는 은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일기들일 거야. 할아버지가 한 번 읽어주신 적이 있는데 꼭 시처럼 들리더라고. 조선시대에 대제학까지 지냈던 분의 물건이래. 내가 물었을 때 은재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내가 흠칫했던 모습을 나는 기억했다. 일기가 보물이 된다는 것. 보물이 될 줄 알지 못하고 남긴 기록이라는 것. 나는 그때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듬성듬성한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그 얘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종택에 올 때마다 별채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 일기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별채의 문을 바라봤다. 저 문을 열고 일기를 뒤지고 훔쳐서 달아난 도둑의 행적을 상상했다. 보물이 될 줄 알지 못하고 쓴 일기가 보물이 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남의 손에 넘어가다니. 일기의 주인은 자신의 기록이 상세히 연구되고, 남의 손에 읽히게 될 줄 상상도 못했던 것 아닌가.

은재는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마당의 꽃을 바라봤다. 별채 옆 담장 너머에는 배롱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다른 것들보다 오랫동안 꽃이 피어있어서 나는 종택의 배롱나무를 좋아했다. 무리를 지은 새들이 엇박자로 울어댔다. 새소리는 매미와 풀벌레의 소리와 뒤섞였다. 소리는 곳곳에서 퍼졌는데 마치 빛이 번지며 울어대는 듯했다. 나는 은재에게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너랑 비교하면서 또 대학 나온 얘기하더라. 직장을 구하든지 때 되면 결혼이나 하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은재는 내가 대학에서 나올 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잘 고민하여 결정했으리라 생각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다른 이유없이 묻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종택에서 나와서는 마을회관을 보며 걸었다. 동네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걸을 때마다 조그만 돌들이 발에 차였다. 저녁때가 다가오는데도 해가 지지 않고 뜨거웠다. 벼들이 날카롭게 돋고 있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회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무너진 집 앞을 지났다. 가벽 안쪽으로 모습이 보였다. 잘 다듬어진 땅 위에 여러 철골들이 창살처럼 세워져 있었다. 집이 지어지는 순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아직 기초적인 작업 과정에 있음은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안쪽을 쳐다보자 작업자가 나를 힐끗 거렸다. 햇볕에 그을렸지만 앳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가 다시 자재를 날랐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만의 집 만들기’ 같은 주제의 공작시간이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이층집에 살고 싶어. 내 방은 이층으로 할 거야. 어릴 적 나는 미래의 집에 대해 늘 그렇게 말했으나 막상 공작시간에는 수수깡과 고무찰흙으로 작은 오두막 형태의 집을 만들었다. 만약 미래의 집이 아니라 현재의 집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디귿 자 모양이 되어야 했다. 내가 만든 집은 내부도 공간 구분이 전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개집을 연상하게 했다. 공작시간에 완성된 집들은 사물함 위에 나란히 놓였다. 모두 비슷비슷한 집들이었다. 우리는 집을 구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집을 구경했다. 집 만들기뿐만 아니라 집을 그릴 때도 나는 오두막을 그렸다. 미래의 집과 방에 대한 생각이 뚜렷했으나 막상 그림을 그리면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전형적인 형태를 떠올렸다.

또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간단한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다. 집과 나무와 사람을 그리는 것이었다. 각자의 종이 위에 비슷한 집과 나무와 사람이 그려졌다. 그때도 나는 디귿자 모양의 집 대신 오두막집을 그렸으며, 대나무나 느티나무를 그리지 않고 가지 위에 구름을 씌운 것 같은 모양의 나무를 그렸다. 집과 나무와 사람 그림은 각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서, 그림의 위치, 그림의 모양마다 모두 각자의 심리를 나타냈다. 같은 나무를 그리더라도 뿌리를 그리거나 새를 그리는 등의 특징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는 식이었다. 나는 그림의 의미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으나 옹이가 상처를 의미한다는 것은 기억했다. 나는 옹이를 떠올리면 나무가 되고는 했다. 가지가 옆구리를 뚫고 나올 것 같다고. 몸의 관절 마디마디마다 무엇이 돋을 것 같다고 느꼈다.

 

*

 

낮에는 과수원 일을 도왔다. 나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갔고, 과수원까지는 오 분 남짓 걸렸다. 트럭 뒷자리에 앉아 언덕을 올라갈 때면 몸이 들썩였다. 과수원은 들어가는 입구가 많았다. 팔백 평가량 되는 과수원에는 해마다 비슷비슷한 얼굴의 일꾼이 복숭아를 따러 왔다. 은재가 도울 때도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을 몰랐지만 은목이라는 이름의 아저씨는 알았다. 한참 한자를 배우던 시절에 木 자를 배우며 상목이나 영목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확용 작업차를 밀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복숭아를 수확하는 일은 아버지가 주로 했고 작업차 소리가 가까워지면 나는 작업 준비를 했다.

복숭아들은 여름의 팔뚝 위에서 물집처럼 부풀어 올랐다. 도랑에는 썩은 복숭아들이 모여 있었고 단내를 맡은 날벌레들이 주위에 꼬였다. 아버지가 목줄을 풀어주자 백구는 썩은 과육을 핥기 시작했다. 여름의 과수원은 부풀고 썩고 물렁물렁했으며 날카로웠다. 아버지가 복숭아를 싣고 오면 나는 크기와 상태를 분류하고 썩은 것은 도랑에 던졌다. 노란 포장봉지를 벗길 때마다 씨앗 깊이 썩어들어간 것을 보고 기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수원 안은 고요했고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바깥에는 백구가 왕왕 짖는 소리가 땡볕에 더 사납고 날카롭게 들릴 뿐이었다. 과수원 주위에는 포장봉지가 나뒹굴었다. 그것들을 주워 모았고 정수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작업은 이른 오후면 끝이 났다. 엄마와 내가 하는 일은 상자에 담아 트럭에 싣는 일까지였다. 몇 해 전까지는 포장작업과 개수를 기록하는 일까지 했지만, 지금은 따로 작업을 하지 않고 유통센터로 보냈다. 트럭에 실은 복숭아를 아버지가 전해주러 간 동안 엄마와 나는 과수원을 정리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자갈 때문에 걸음이 휘청거렸다.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집이 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와 나는 가벽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반장과 마주쳤다. 엄마는 인사를 주고받았고 작업반장은 엄마를 형수님이라 불렀다. 나는 그가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는 정도만 알고 어떻게 아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조금 있다가 저녁 먹으러 와요. 엄마가 말하자 짧은 인사를 하며 가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몇 작업자들이 드나들었다. 작업자들을 보면서 나는 어릴 적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복사꽃이 필 무렵에 엄마는 항상 친구들을 불렀다. 그래서 복사꽃이 필 때는 낯선 사람들을 보는 계절이었다. 나는 해마다 그들을 보았고 조금 커서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복사꽃을 오얏꽃이나 사과꽃이나 앵두꽃 같은 것과 자주 헷갈려 했다. “아, 이게 복숭아꽃이야?” 누가 그렇게 물으면 엄마는 꼭 복숭아꽃이 아니라 복사꽃이나 도화꽃으로 불러야 한다고 정정하고는 했다. 어린 나는 복사꽃과 복수꽃을 헷갈려 했다. 꽃의 이름이 어떻게 복수일 수가 있나 생각하기도 했으나 조금 커서는 두 꽃이 다른 것임을 알았다. 

엄마는 잡곡을 여러 가지 넣어 밥을 안치고 밑반찬들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언수는 잡곡밥을 싫어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곡밥을 지었다. 나는 수돗가에서 상추를 씻었는데 아버지의 트럭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고기 봉지를 내게 주었고 모두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작업을 마친 작업반장과 작업자들이 회관으로 왔다. 그 속에는 앳되게 보이던 얼굴의 작업자도 있었다. 아들이에요. 작업반장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일 배우느라 고생이 많네.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때 되면 자기 자리 잡아야죠. 작업반장이 대신 대답했다.

주방으로 돌아와 밥그릇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은재도 오라 하지 그래. 돌아올 시간 아니야? 나는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돌아오던 은재가 문을 두드렸다. 회관 안에는 주로 아버지와 작업반장의 대화가 오갔지만,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와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다 지어지려면 아직 몇 달은 더 있어야죠. 작업 반장은 말했고 집에 대한 이야기를 두 사람이 늘여 놓는 동안 고기가 검게 그을렸다. 타요. 내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으나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먹었다.

저녁을 먹은 은재와 나는 먼저 회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벤치에 앉았고 은재는 양발을 움직이는 운동기구를 탔다. 무중력을 건너듯 은재는 어설프게 양쪽 다리를 움직였다. 밤의 시간을 건너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저녁의 공기는 밤보다 무거웠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소화시켜. 은재가 말했지만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다. 이상하게 여름에는 달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지 않아? 겨울보다 번져 보이는 것 같고. 내가 말하자 은재는 어느새 다른 운동기구에 앉아 낑낑 거리고 있었다.

 

*

 

아버지는 땅을 보러 다녔다. 몇 해 전까지는 주변에서 소개하는 땅을 둘러보려 주말마다 간간이 다녔고, 올해 초에 이천의 한 땅을 계약하여 주말마다 그곳에 가고는 했다. 땅을 계약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떤 형태와 모양의 땅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백 평이라는 이야기만 들어 그 크기를 가늠해보기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 집, 자기 땅을 가지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간혹 집도 없이 전세로 변변치 않게 사는 친척을 욕하고는 했다.

땅을 보러 아버지가 이천에 가는 주말이면 회관 안이 고요해지는 듯했다.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할 것이었다. 그런 주말에는 보통 각자의 일을 했다. 어떤 주말에는 회관 건물에 함께 있으면서도 온종일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엄마는 이웃집에 가거나 모임에 종종 나가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언수의 밥을 차렸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국이나 찌개가 있으면 그것을 데우고 햄이나 계란 같은 반찬만 만들면 되었다. 평일에도 과수원 일이 바빠 엄마가 과수원에서 끼니를 해결할 때면 집으로 내려와 언수의 밥을 챙겼다.

언수는 언제쯤 집이 다 지어지냐고 자주 물었다. 그것은 기대에 대한 재촉이었다. 그러면 나는 밭에 복숭아를 모두 수확할 즈음에는 다 지어질 거라고 말했다. 언수의 일기 숙제는 계속 밀렸다. 너의 일기는 보물이 되기는 글렀구나. 어쩌면 기록을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너의 뜻과 상관없이 강탈당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나는 늘여놓았다. 언수는 일기뿐만 아니라 문제집과 기행문 과제까지 모두 밀렸다. 방학 동안 회관에서 있었던 탓에 일기나 기행문을 쓸 거리가 없을 터였다. 나의 옛 일기장에는 ‘선생님 죄송해요. 쓸 게 없어요.’ 그렇게 쓰인 날이 있었다. 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소한 그날은 일기로 쓸 거리가 하나도 없을 만큼 무료한 날로 기억되었다.

평일에도 마을은 조용한 편이지만 주말에는 더욱 한적했다. 공사현장이 조용해서인지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여름에는 동네가 더욱 반짝이고 적막해 보였다. 마치 음이 점점 높아지다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에 도달하듯, 점점 뜨거워지다가 절정에 다다른 햇빛의 열기는 적요했다. 저녁이 되면 열기가 숨을 죽이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저녁에도 나는 은재를 자주 만났다. 산책을 하자고 서로 불러내지 않아도 동네를 걷다가 종종 마주쳤다. 연락 없이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은재가 온 날도 있었고 혼자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간 날도 있었다.

 

*

 

집이 지어지는 동안 수확작업은 거의 끝이 났다. 여름의 끝 무렵에 수확하는 품종만 남은 상태였다. 해마다 뒤늦게 복숭아를 찾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백도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과수원에는 백도가 열리는 나무가 없었다. 조금 딸 게 남아서 주문을 많이는 못 받아요. 우리는 백도가 나는 나무가 없어요. 해마다 지인들에게 주문전화를 받고 엄마는 비슷한 말을 했다.

은재는 묘목 하나를 사왔다. 버스에서 화분을 내리고 내게 전화했다. 우리는 화분의 양쪽을 잡고 종택까지 걸었다. 실험재배 해보려고. 어떻게 월동을 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추위를 나는지 관찰할거야. 겨울이 오고 날이 다시 따뜻해질 때쯤에 끝날 것 같아. 나는 그것이 어떤 묘목인지 알지 못했다. 은재에게 물었으나 알려주 지 않고 열매가 열리면 알게 될 거라 말해주었다.

건축작업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서 아버지는 새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하루는 현관의 타일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개가 떨어져 나갔다. 엄마와 나는 다른 부분에도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아버지는 작업반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책임을 묻지 못했다.

새집은 네모반듯한 모양이었다. 옛집의 형태에서 마당 자리가 모두 집이 된 셈이었다. 새집을 구경하기 위해 주말마다 친척들이 찾아왔다. 친척들은 옛집과 새집을 비교하여 말하고는 했다. 새것을 좋은 것이라 말했고, 모두 입을 모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집과 같은 자리에 있는 집을 떠올렸다.

내 방이 있던 자리는 안방이 되었고 화장실에 있던 자리에 내 방이 생겼으며 현관문이 있던 자리는 거실이 되었다. 소파와 식탁, 그리고 장식장 같은 여러 가구가 바뀌었다. 나는 옛집에서 쓰던 매트리스와 옷장을 다시 들였다. 집이 조금 넓어지기는 했지만, 내 방의 크기는 거의 비슷했다. 은재도 새집을 구경하러 찾아와 집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깨끗해졌네. 매트리스랑 옷장은 같은 위치에 놓았구나? 은재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월이 시작되었는데도 햇살이 간간이 뜨겁게 느껴졌다. 밤마다 귀뚜라미들이 여름의 끝에서 울었다. 열대 야에 울던 울음은 귀에 박히는 음으로 느껴졌으나 가을에 우는 울음은 여유롭게 들렸다. 언젠가 일기에 복숭아 꽃이 피었다고. 너무 예뻐서 슬퍼진다고. 그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쓴 연유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 더 있으면 마을에 코스모스가 필 것이었다. 마당에 나와 의자에 앉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이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내뱉지 않은 말들이 입술 안쪽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수상소감>

권승섭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권승섭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잠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듭니다. 어두운 물가를 걸으면 빈번하게 느껴지는 감각입니다. 사는 세계가 낯설 때가 많은데, 마냥 좋은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용돌이로 자주 들어가고는 합니다.

어느 주말에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 외출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그란 가로수가 예뻐서 잠시 사진을 찍었습니다. 케이크를 왜 먹고 싶었는지, 가로수가 왜 예뻤는지 알 수 없어서 낯선 기분입니다. 의문투성이인 세계입니다.

과일잼은 많고 생크림은 적은 케이크를 먹고 싶었습니다. 잎사귀가 한껏 물들되 떨어지지 않고 온전히 매달려 있는 은행나무를 보고 좋았습니다. 제법 까다로운 마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을 느끼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가를 지나 집으로 돌아옵니다. 케이크 상자를 든 손과 걸음은 조심스러워집니다. 어쩌면 그때 무언가를 반기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기념일이 아니어도 케이크를 마음껏 잘라 먹을 수 있는 낯섦이 좋았습니다.

발코니에 나가니 시린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부니 눈사람이 만들고 싶어집니다. 마음은 사방으로 뻗고,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세계입니다. 그것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으나, 쉽게 녹는 마음입니다. 섬세하게 언어로 보듬어야 합니다.

모난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해 자주 노력합니다.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마음을 다치지 않게 애를 써야 합니다. 탄생시킨 마음들이 상하거나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자주 듭니다. 겁이 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오븐을 자주 돌립니다. 케이크를 꼭 만들고는 하는데,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래도록 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가올 십이월에는 꽁꽁 언 물가를 걷고 싶어집니다. 안쪽으로 성큼 걷다가 미끄러지더라도 아프지 않을 문장들을 쓰겠습니다.

 

<2022년 제68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심사평>

신수정 교수 (문예창작학과)
신수정 교수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 (문예창작학과)

백마문화상은 가장 젊은 상상력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다. 장래 한국 문단의 스펙트럼을 넓힐 작가로 성장할 예비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시간이어서 심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밀고 나가는 소설도 있었고, 구성과 문장이 탄탄하여 완숙미가 넘치는 작품도 있었다. 진중하고 묵직하게 한 시기를 통과하는 성장에 관해 묻는 작품도 눈에 띄었다.

올해의 당선작은 <씨앗을 머금으면, 잠잠>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름의 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다. 높이 자란 나무와 종택 기와집의 어스름, 과육 냄새와 시원한 바람결에 묻어오는 땀 냄새, 웃자란 풀에 일렁이는 간지러움 같은 것들이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낡은 시골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과정을 소설의 핵심 서사로 두어, 현재 한국 소설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공간과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별다른 것 없는 잔잔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덩달아 마음이 일렁였다. 미래에 대한 남다른 설계가 없지만,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학교 밖으로 나오게 했는지 끝내 털어놓지 않지만, 이 여름을 지나온 주인공은 언젠가는 자기만의 집을 그리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흙이 머금은 씨앗은 대뜸 발아하지 않는 법이다. 잠잠하게 버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면에 고요히 머무는 시간을 알아봐 주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미니텃밭세트>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뇌졸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삶의 면적이 잔뜩 쪼그라든 화자가 미니 텃밭 세트를 들고 장례식장과 병원 근처를 순례하는 장면에서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결국 이렇게 점점 영토를 줄어나가다가 단 한 뼘의 텃밭을 가꾸는 것으로 그치리라는 애잔한 비애가 전해졌다. 삶에 대한 깊은 시선을 머금고 상징과 비유를 적절히 배합하여 소설로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난 작가였다.

이 두 명의 예비 작가를 좀 더 넓은 문학의 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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