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칼럼]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다 〈1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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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칼럼]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다 〈1106호〉
  • 박순만 부동산학과 교수
  • 승인 2022.09.2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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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만 부동산학과 교수
박순만 부동산학과 교수

2001년 7월, 그야말로 20년도 더 된 일이다. 말년 휴가를 나와 집에서 쉬던 중에 친한 친구 J 의 전화를 받았다. 신림동 반지하에 자취하던 그는 폭우에 신림천이 넘치는 바람에 자취방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며 마침 휴가를 나와 있던 나에게 세간살이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J의 자취방은 그야말로 ‘물지옥’이었다. 온갖 이불과 옷가지는 물론이고, 전공 서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책들, 각종 앨범과 사진부터 가전제품까지 흙탕물에 파묻혀 있는 데다, 정화조가 역류한 탓인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갓 복학한 20대 초중반의 남학생이 지난밤에 겪은 홍수와의 사투의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는 현장이었다. 그나마 벽에 걸려 있던 표창장과 상장 몇 개와 가족사진,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나니 더 이상 챙길 물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저건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나의 질문에 J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냥 다 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아”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수많은 전공 책과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졸업앨범, 그리고 가족사진까지 모두 분리수거를 한 뒤, 많지도 않은 이삿짐과 함께 그가 임시로 거처를 정한 곳은 인근의 고시원 5층이었다. 물난리 때문에 급하게 머물 곳을 구한 탓인지 볕이 들기는커녕 환기조차 잘 안되는 손바닥만 한 창문에 성인 한 명이 겨우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그 고시원 방을 둘러본 뒤, J는 “그래도 5층이니 물난리는 안 나겠네”라며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J가 정말 힘들었던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당장 복학해서 입을 옷들, 그리고 전공 책도 다시 마련해야 했다. 무엇보다 언제까지 손바닥만 한 고시원에 살 수는 없으니 이사를 다시 가야 했는데, 이전에 살던 반지하 자취방의 월세 보증금은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들일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물난리가 나서 아무리 청소해도 퀴퀴한 냄새가 빠질 리 없는 반지하 방에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보증금을 되돌려 받을 때까지 몇 달간 J는 고시원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지난 8월 11일, 하필이면 J가 살던 그 신림동에서 또 물난리로 ‘반지하의 비극’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수해 현장을 방문하고, 서울시장은 ‘반지하를 없애겠다’라는 방침을 내놓았다. 전국의 반지하 거주 가구가 2005년에 59만 가구에서 2020년에 33만 가구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음을 상기해보면, 앞으로 차차 반지하 주택을 줄이겠다는 정책에 큰 무리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반지하를 떠나 어디로 가게 될지,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의 반지하에 살고 있을 이들의 주거 안정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왔던 폭우가 또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장기적으로 반지하 주택을 줄인다고 해도 당장 근미래에 홍수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계획 또한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20년 전에 나의 친구 J가 겪은 물난리를 아직도 겪어야 하는 이 시대적 아이러니에 슬픔과 자괴감이 올라오기도 한다.

지금 J는 어엿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가끔 만나 술 한잔하며 그 물난리의 기억을 떠올린다. 전공 책을 두고 나온 건 아깝지만, 오물에 젖은 전공 책을 볼 때마다 간밤의 사투를 떠올릴까 봐 두려웠다고. 졸업앨범과 가족사진을 버린 것은 아쉽지만, 물에 젖어 퉁퉁 불은 사진을 볼 때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가족들과 좋았던 날들이 끔찍했던 지난밤의 기억에 묻힐까 두려웠다고, 그래서 그는 모두 버리고 나오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J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한 것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물난리에 쓸모없게 된 수많은 추억 앞에서 외로워진 자신을 지켜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추억을 기억으로만 남기게 된 그 순간을 함께 기억해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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