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죽어도 이걸 버릴 수 없습니다 〈1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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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죽어도 이걸 버릴 수 없습니다 〈1100호〉
  • 민보민 기자
  • 승인 2022.04.1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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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없이 물건을 사 모으는 수집가 A 씨에게는 타임캡슐을 만드는 독특한 취미가 있다. A 씨의 타임캡슐 안에는 세계 각국의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포장이 벗겨지지 않은 시계와 색이 변한 엽서, 다 먹은 통 조림 깡통, 지워져 가는 영수증 등의 잡동사니가 난무하다. 많은 사람이 A 씨에게 예술 작품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버리라고 충고하지만, A 씨는 물건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결국 A 씨는 600개가 넘는 타임캡슐을 집 안에 쌓아두었고, 그 안에는 약 50만 개의 물건이 담겨 있었다.

 

쌓여만 가는 쓰레기

A 씨는 바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다. 그의 모습은 저장강박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저장강박증 (Compulsive Hoarding Syndrome)이란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물건이든지 버리지 못하고 저장하는 강박 장애의 일종으로, 절약이나 취미로 수집하는 것과는 다르다. 저장강박증 환자들은 호더(Hoarder)라고 불린다. 이들은 주로 필요 없는 물건이나 음식, 쓰레기 등을 지나치게 모으는 행동을 보이며 물건에 둘러싸여 있을 때 안정을 느낀다. 또한 이들은 물건을 계속 저장하지 못 하면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타인이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행위를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으로 인지해 다른 사람을 기피하는 성향을 보인다.

▲사진은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호더)의 방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진은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호더)의 방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글로벌 의학 지식 웹사이트 ‘MSD Manuals’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체 인구의 약 3%가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주로 상실 혹은 외상의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인 트라우마에 대한 보상 심리로 발병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독거인에게서 많이 관찰된다고 한다. 이러한 저장강박증은 개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호더들이 물건과 음식, 쓰레기 등을 함께 모으면서 인근 주민들은 벌레와 악취, 악취로 인한 호흡기와 피부 질환 등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B 씨는 “옆집에 쌓인 물건으로 인해 악취와 날파리떼와 바퀴벌레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뿐만 아니라 화재나 낙상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현재 몇몇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조례를 제정해 적용하고 있지만, 당사자가 거부하면 강제로 치울 수 없어 과태료만 부과하거나 주거환경을 정비하는 식으로 대응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권준수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환자들은 당연히 병원에서 진단받고, 병에 의한 것인 만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과태료를 매기더라도 그 불안을 극복할 힘이 없으면 결국은 같은 행동이 계속 나타날 것”이라며 과태료 부과보다는 치료가 우선적이라고 제언했다.

 

저장강박증, 발병 원인은?

국립정신건강센터는 저장강박증의 주요 증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미국의 정신의학 저널 Psychiatric Times의 「Hoarding Throughout the Life Span」에 따르면 저장강박증은 다양한 연령층에서 발병했으며 50대 이상의 성인에게서 가장 높은 발병률을 보였다. 이와 더불어 성인의 경우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발병률이 높아졌다.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소영 교수(이하 유 교수)는 “저장강박증은 보통 10대에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나이 든 성인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등 여러 연령층에서 발생한다”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다양한 연령층에서 저장강박증이 발병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저장강박증은 가치판단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의 손상으로 가치평가를 내리지 못해 일단 저장해 두는 경우를 저장 강박으로 보는 것이 의학계의 주된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뇌기능연구자들은 △전두엽의 손상 및 기능 저하 △후두엽 대사 저하 △강박증에 영향을 미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과잉 등을 저장강박증 발병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외에도 심리적인 트라우마로 인해 저장강박증이 발생한다. 유 교수는 “심리적 기질로는 완벽주의,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성향,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성향,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이 저장강박증 환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났다는 보고들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심리 · 행동 분야 저널리스트 프란신 루소의 저서 『Our Stuff, Ourselves』에 따르면, 낮은 정서적 안정감이 물건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키며 어릴 적 애착 형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 물건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루소는 유아기 시절 주변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 경우 이를 심리적으로 보상하기 위해 물건에 과도한 애착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신건강의학과 박종석 전문의(이하 박 전문의)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저장강박증은 필연적으로 불안장애, 공황장애, 우울증으로 발전될 수 있다. 전두엽 기능도 지속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만성적인 불안 축적 때문에 예민성을 넘어 날카롭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며 극단적으로 악화되면 치매를 불러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추억이 나를 잠식한다

한편,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저장강박증은 오프라인을 넘어 온라인상의 ‘디지털’로까지 전환되고 있다. 유 교수는 디지털 저장강박증에 대해 “환자들이 모으는 대상이 물건에서 데이터로 변화된 현상”이라고 전했다. 즉, 디지털 저장강박증이란 물건 대신 사진이나 메신저 대화 내용, 파일, 문서 등의 데이터 자료를 모으는 행위로 2030세대 사이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첩과 외장하드, 클라우드 등에 사진을 약 5만 장 저장하고 있는 C 씨(23)는 “모든 것이 다 추억인 느낌이라 지우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다 소중하게 느껴져 쉽게 지우지 못하는 편이고, 파일 같은 경우는 지운다는 것 자체만으로 불안하다. 언젠가는 쓸모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 모아두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사진이나 파일을 저장하기 위해 공기계 2대와 외장하드, 클라우드를 사용하는 D씨(24)는 “내 사진뿐만 아니라 언젠가 친구에게 사진을 보낼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찍은 친구들의 사진까지 전부 저장한다”라며 “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수정하기 전에 작성했던 내용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봐 초안부터 최종까지 다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C 씨와 D 씨 모두 ‘언젠가 쓸 수 있을거야’라는 가정을 전제로 데이터가 삭제되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모아둔 자료를 다시 꺼내 보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국제 데이터 관리 회사 베리타스가 2016년에 발표한 「데이터 적체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IT 의사결정권자 400명 중 86%가 데이터를 삭제하지 못하고 쌓아두는 ‘데이터 호더’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응답자 83%는 조직에 해가 될 수 있는 데이터를 개인 혹은 회사가 소유한 컴퓨터나 기기에 저장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해당 조사에서는 국내 응답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혹시 나도 저장강박증?

다음은 Frost와 Steketee, Grisham(2004)가 개발한 저장 척도(SI) 문항을 정교화 및 타당화 작업을 거쳐 구성한 한국판 저장 척도 개정판(K-SI-R)이다. 한국판 저장 척도 개정판은 총 18문항으로, 0점부터 4점까지 자신의 저장 강박을 측정할 수 있게 구성됐다. 점수의 총합 이 △38점 이상은 우울 및 불안 등 정서적 문제 및 저장 행동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는 고위험 저장 강박 수준이며 △27점에서 38점 사이일 경우 약간의 심리적 어려움과 저장 행동으로 인하여 비효율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저위험 저장 강박 수준이고 △27점 이하는 저장 강박의 정도가 낮아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판 저장 척도 개정판

척도

1. 나는 물건을 버리는 게 힘들다  
2. 나는 물건을 버리는 게 고통스럽다  
3. 나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게 너무 괴롭거나 시간이 많이 걸려 물건을 버리는 걸 꺼린다  
4. 만일 내가 원했던 어떤 것을 습득하지 못하면 괴롭거나 기분이 좋지 않다  
5. 집안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물건들 때문에 사회적인, 직업적인 또는 일상적인 활동이 지장을 받는다  
6. 본 걸 습득해야 하는 충동을 자주 느낀다(예를 들면, 쇼핑을 하거나 공짜 물건이 주어졌을 때)  
7. 당장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사거나 공짜 물건을 습득하려는 충동이 강하다  
8. 물건을 습득하려는 충동을 자제할 수 없다  
9. 필요하지 않고 둘 공간이 없는 물건을 자주 보관하기로 결심한다  
10. 집에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있어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11. 즉시 사용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실제로 자주 산다(또는 공짜 물건을 얻는다)  
12.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보관해 놓으려는 충동이 강하다  
13. 물건을 보관하려는 충동을 자제할 수 없다  
14. 집안에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걸어 다니기 어렵다  
15. 집안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물건들 때문에 집안 공간을 원래 용도로 쓸 수 없다 (예를 들면 요리하기, 가구 사용, 설거지, 청소하기 등)  
16. 집안에 물건이 어지럽게 쌓여 가는 걸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7. 물건 보관이나 통제할 수 없는 구매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18. 버리고 싶은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출처/ 「한국판 저장 척도 개정판의 타당화 연구」

이와 더불어 △똑같은 파일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외장하드 등 여러 장소에 가지고 다니거나 △문서 파일의 최종본뿐만 아니라 초고, 재수정 등의 파일을 모두 보관하고 △자료를 지우는 행위가 불안함을 유발한다면, 디지털 저장강박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저장강박증, 치료 방법은?

저장강박증 치료는 크게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 두 가지로 나뉜다. 약물치료는 강박증에 영향을 미치는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차단하기 위해 일종의 항우울제를 처방하기도 하며, 인지행동치료는 호더에게 왜 물건을 수집하는지 원인을 찾고, 이를 스스로 깨닫게 함과 동시에 소유물을 가치와 유용성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와 더불어 유성진 교수의 저서『저장장애』에서는 인지행동치료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러나 저장강박증은 다른 강박 장애보다 치료가 쉽지 않다. 유 교수는 “무엇보다 환자들이 본인의 저장 행동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치료가 쉽지 않다”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조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어 “나이가 어린 경우 가족의 협조, 특히 부모님의 협조가 필요하고 물건을 버린 이후 겪을 불안감, 우울감을 조절할 수 있도록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저장강박증은 물질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부분에서도 나타나는 정신질환으로, 다른 정신질환과 함께 나타나는 질병으로 인식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이다.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는 호더들이 자신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면서도 인간관계에서 안정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사회와 대중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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