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생계에 가족 간병까지 책임지는 ‘영케어러’ 〈10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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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 생계에 가족 간병까지 책임지는 ‘영케어러’ 〈1099호〉
  • 이예은 기자
  • 승인 2022.03.2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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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간병인의 현실

지난해 청년 A씨는 뇌졸중으로 치료를 받던 아버지의 병원비 부담이 커지자 아버지를 집에서 홀로 간병했다. 그러나 A 씨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에게 약과 치료식을 제공하지 않았고, 이후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존속살해에 해당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나 조부모를 부양하는 상황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은 A 씨의 상황은 벼랑 끝에 놓인 ‘영 케어러’(Young Carer)의 ‘간병 살인’으로 불리며 주목 받았다. 이처럼 복지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영 케어러의 현실과 간병 복지 제도에 대해 본지가 알아봤다.

 

가족 간병을 짊어진 ‘영케어러'

영 케어러(Young Carer)란,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부모나 조부모의 간병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청년 · 청소년을 의미한다. 영 케어러는 1980년대 말 영국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사회보장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돌봄자(케어러) 실태조사를 실시했고, 미성년자와 청년의 간병 실태가 드러나며 영 케어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국과 일본에서는 영 케어러를 ‘△장애 △질병 △정신질환 △약물 △알코올 문제를 가진 가족이나 친척을 돌보는 18세 이하 청소년’으로 정의내리고 있으며, 연령대에 따라 18세 미만의 아동을 ‘영 케어러’, 18세부터 넓게는 30세까지 ‘영 어덜트 케어러’로 구분하기도 한다. 호주는 ‘△장애 △신체/정신질환 △약물중독 △고령의 가족이나 친구를 돌보는 25세 이하 청년’을 영 케어러로 정의내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영 케어러에 대한 법적 정의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학업이나 일을 병행해야 하는 만 25세 미만의 젊은 간병인이 영 케어러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학업과 취업에 집중할 시기에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지 못하고 가족 돌봄까지 홀로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통해 조부모님 간병 경험을 이야기한 작가 길성장(필명, 이하 길 씨)씨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옆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상황에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특히나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체력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라며 간병 당시의 어려움을 전했다.

 

해외는 적극지원, 우리나라는?

▲표는 국가별 영 케어러 규모와 지원 정책을 정리한 것이다.
▲표는 국가별 영 케어러 규모와 지원 정책을 정리한 것이다.

이렇듯 복지 부담을 홀로 떠안은 영 케어러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영 케어러에 대한 법적 정의를 마련한 영국이나 호주 등 해외에서는 영 케어러를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2011년 영 케어러가 49만 1천여 명으로 집계된 영국은 영 케어러 지원과 서비스 개선을 논의하기 위한 ‘영 케어러 의원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2019년부터 16세~18세 사이의 영 케어러들은 연간 3백 파운드(약 48만 원) 가량의 복지 급여도 지급받고 있다. 호주의 영 케어러는 2017년 기준 23만 5천여 명으로 집계됐다. 호주는 2010년 「케어 러인정법(Carer Recognition Act)」을 제정해 장애인과 심신질환자, 노인에게 일상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영 케어러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했고, 2015년부터 영 케어러 학비보조금을 제공했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4월 첫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에서만 약 10만 명에 이르는 영 케어러가 확인됐다. 일본은 후속 대책을 발표하고, 그중 사이타마 현에서 가장 먼저 영 케어러의 사회적 고립을 방지하기 위한 관련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 등 정부 부처에서도 영 케어러에 대한 통계나 현황 자료가 전무하다. 영 케어러로 추정할 수 있는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 중 만 25세 미만 청소년ㆍ청년’은 2020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3만 1,921명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ㆍ청년까지 고려하면 영 케어러 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중앙정부 차원의 영 케어러의 법적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고, 실태조사와 지원 정책 마련도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복지제도를 정리한 것이다.
▲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복지제도를 정리한 것이다.

길 씨는 “중증환자라는 것을 인정받아 진료비의 5%만 부담해 금전적인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다만, 비급여 항목은 산정특례 혜택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지원에 한계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복지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복지제도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기초생활보장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의사 소견서 제출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수급자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수급자로 판정 받기 어렵고, 수급자가 되더라도 지원금이 너무 적어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등급판정이 까다로워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으나 퇴원했거나, 거동이 불편하지만 노인장기요양등급 인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방치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는 따로 간병인을 고용하지 않아도 돼 비용부담이 적지만, 간호인력 부족과 과중한 간병 문제로 간호 · 간병통합서비스를 지원받기 어려운 상황일 뿐만 아니라 경중증 환자 중심 서비스다. 이처럼 간병에 대한 복지제도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의료급여로는 비급여 항목인 간병비를 해결하지 못하고 비싼 간병비를 감당하지 못해 직접 간병돌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적 간병 규모를 추산한 보건복지부 학술자료에 따르면, 2008년 3조 6,550억 원에서 2018년 8조 240억 원으로 사적 간병비 규모가 치솟았다.

▲사진은 우리나라의 연도별 사적 간병비 간병 및 수요 규모를 나타낸 자료이다. (출처/ 『보건경제와 정책연구』 제27권 제1호)
▲사진은 우리나라의 연도별 사적 간병비 간병 및 수요 규모를 나타낸 자료이다. (출처/ 『보건경제와 정책연구』 제27권 제1호)

 

확대 중인 청년간병인 지원 정책, 아직 부족한 점 많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은 지난해 10월 「청소년복지 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영 케어러를 ‘가족돌봄청소년’으로 명명하고 ‘부모가 사망 · 이혼 · 가출하거나 장애 · 질병 등의 사유로 노동 능력을 상실해, 스스로 가족 구성원을 돌보거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청소년’으로 정의했다. 또한 청소년 복지 향상을 위한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경우, 청소년의 근로 · 가족돌봄 및 부양에 관한 실태조사를 교육부 장관과 협의해 진행하도록 명시했다.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장관과 지방자치단체장 이 가족돌봄청소년의 지원을 위한 정책을 수립 · 시행하도록 하는 한편, 가족돌봄청소년을 위한 상담 · 간병 및 돌봄 지원 · 교육지원 · 취업지원 등의 지원 방안을 마련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각 지자체와 민간기업에서 먼저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부산 중구는 지난해 9월 전국 최초로 ‘돌봄제공자인 아동 · 청소년 지원 조례안’을 제정했다. 조례는 영 케어러를 만 19세 미만의 돌봄제공자인 아동 · 청소년으로 규정하고 지원 확대를 계획했다. 광주시 광산구에서는 지난해 연말부터 사회적 돌봄대상자 중 영 케어러로 추정할 수 있는 청소년, 청년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해 대책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센터장 전윤경)에서도 지난해 청년안전망 구축의 일환으로 ‘영 케어러 케어링(YCC; Young Carer Caring)’ 사업을 시작했다. 가족 간병 및 돌봄으로 생애발달과업 수행이 어려운 19~39세 서울시 청년 누구나 신청가능하며, 심사과정을 통해 생활 지원 및 자기계발을 위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서울시 서대문구는 지난해 12월에 ‘가족돌봄 청소년ㆍ청년 발굴 조사’를 긴급 실시했으며, 지난 2월 보건 복지부에서 진행하는 가족돌봄 청년(영 케어러) 지원 제도 마련을 위한 시범사업 대상 지자체로 선정돼 대상자 관리 방안 마련, 지원 예산 편성, 맞춤형 복지서비스 시행 등 영 케어러 지원을 이어나가고 있다.

 

영 케어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길 씨는 “간병비 지원에 대한 복지가 더 늘어나면 좋을 것 같다. 다행히 할머니와 번갈아 간병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교대로 가족 간병이 불가능한 영 케어러는 생업을 정상적으로 이어나갈 수 없다. 직접 간병이 오랜 시간 이어진다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적절한 심사를 거쳐 교대 간병이 어려운 영 케어러에게 간병 서비스를 지원해 주는 제도가 더 확대되었으면 한다”라고 전했다.

우리 대학 미래융합대학 사회복지학과 백주희 교수는 “영 케어러는 본인의 경력을 확고히 하고 발전시켜야 할 시기에 가족부양이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어 경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상황을 맞는다”라며 “특히 장기적인 돌봄의 경우, 가족돌봄이 끝났을 때 이들은 경제적 독립성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장의 변동에서 배제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노동자로 전락해버릴 여지가 많다”라고 영 케어러 문제 장기화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또한, “장기적인 돌봄을 위한 제도는 일부 존재하지만, 질병의 회복기 환자를 위한 간병은 제도적인 지원이 특히 미약하다. 의료와 간병의 통합, 또는 간병에 대한 국가적 지원책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현재의 지원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지난해 12월, 돌봄위기 해법을 논하는 토론회 “청년 간병인 강도영, 우리 사회에 남은 과제는?”에서 세밧사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이명묵 대표는 “실제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담당 공무원, 집주인, 이웃도 공적인 지원을 신청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양난주 교수는 “부양자와 피부양자에게 어떤 문제든지 연락받으면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필요하며, 알아서 해법을 찾아가라 하지 말고 단일한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돌봄전달체계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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