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67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검은 소란 (소설 부문 당선작) 〈1096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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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67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검은 소란 (소설 부문 당선작) 〈1096호(종강호)〉
  • 최수미 학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1.11.2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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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소란

 

화장실 바닥의 물때가 천장까지 가득해진 것은 오래지 않은 일이었다. 검버섯처럼 피어난 얼룩이 날이 갈수록 크기를 키우며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은 오래된 타일의 틈은 물론 거울과 비누의 표면까지 피어나곤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만 눈이 갔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에 묻은 그것은 내 손가락에 물먹은 김 가루처럼 힘없이 들러붙었다. 물때에서는 시시한 냄새가 났다. 거뭇한 생김새와 다르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순진무구한 냄새였다. 호기심을 해결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는 쏟아지는 물에 손을 벅벅 씻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원장님이 새벽 두 시까지 학원 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화면 속 일타 강사의 독특한 글씨체나 따라 써보다가 그냥 집으로 갔다. 집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목이 말라 컵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니 그릇들이 언제 어그러질지 모르는 바벨탑처럼 쌓여있었다. 그릇에 들러붙은 찌꺼기들은 썩은 지 족히 삼 년은 된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거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온갖 일회용품과 집안의 먼지를 다 삼킨 것 같은 이불들로 엉켜있었다. 집안은 오래전부터 버려진 것처럼 조용했지만, 바닥에 너절히 깔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시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아저씨들의 격정적인 말싸움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우리 집은 대체로 평화로웠고 그럭저럭 살만했다. 가끔 집안이 엉망이 되긴 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 상냥하고 깨끗해지는 게 우리 집이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말은 못 하지만 감당하고 살아가는 보편적인 불행쯤은 하나씩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지금 불행한가 생각해봤다. 생각하다 보면 그건 정말 아무 소용이 없고 귀찮은 짓이었다. 세상에는 바뀌지 않을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곱씹어 생각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쪽은 언제나 나였다. 엄마는 항상 감사하라고 했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착실하게 감사하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유리컵의 파편을 볼 때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었다.

화장실의 물때가 변기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보고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 선반 구석에 처박아 뒀던 솔에도 물때가 잔뜩 끼어있어서 닦을 때마다 이게 때를 벗겨내는 것인지 오히려 더 묻히는 것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의자를 딛고 올라가 천장도 닦았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렸던 미켈란젤로도 아니면서 대낮에 고개를 획 젖히고 화장실 천장을 박박 문대는 내 모습이 조금 멋쩍기도 했다. 힘을 잃은 물때가 내 이마와 콧잔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다음 영역으로 이동했고 천장을 벗겨낼 기세로 물때를 닦아댔다. 그렇게 꼬박 두 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내고 물때를 없애느라 땀범벅이 된 나는 기세등등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저녁이 되자 엄마 아빠와 나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주님, 오늘도 함께할 수 있는 저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가 대표로 드리는 식전 기도가 끝나고 우리는 방어회와 매콤한 꽁치찌개를 먹었다. 나는 열심히 꽁치 가시를 발랐다. 내일까지 해야 할 숙제의 양을 생각하다가 미처 바르지 못한 가시에 혀를 찌르기도 했지만 방어회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엄마가 꽁치 살을 발라 먹다 말고 갑자기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조용한 공기를 가로지르는 둔탁한 소리에 익숙하게 내 몸이 들썩거렸다. 나는 엄마 아빠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듣지 않았다. 대체로 그 얘기들은 이미 스스로 일인극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고 귀를 기울여봤자 나만 피곤해져서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눅눅한 고사리를 집어먹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엄마는 무언가에 버림받은 표정이었다. 아빠는 긴 눈을 내리깔고 목소리도 같이 깔았다. 별안간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침착한 아빠는 회를 쌈 싸 먹으며 길에서 우연히 만난 회사 후배를 대하는 말투로 엄마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엄마가 바로 맞받아쳤다. 적당히 하긴 뭘 적당히 해. 가르치려고 하지 마.

지원 엄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때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몇 번을 더 해야 해? 해봤자 당신 마음이 풀리기는 해?”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끝이야? 끝이냐고. 그러면 당신한테는 없던 일처럼 되는 거야?”

집요한 대화의 꼬리는 머리카락처럼 잔뜩 엉켜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는 둘 중 하나가 식탁을 엎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다행히도 엄마는 눈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촉촉한 상추 더미를 아빠 얼굴에 내던졌다. 아빠는 물기를 닦으면서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고 순순히 사과했다. 아빠가 저지른 실수라는 이름의 무수한 잘못들과 습관처럼 내뱉은 식어버린 사과들은 주렁주렁 엄마의 마음에 매달렸다. 말이 오갈 때마다 엄마 아빠 입에서 꽁치찌개의 양념이 튀었다. 나는 비린내 나는 대화의 꼬리를 보며 조용히 입에 밥을 쑤셔 넣었다. 나는 없는 사람처럼 구는 재주가 있었다.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 웅크린 다음 바싹 구워진 생선처럼 입만 쩍 벌리고 밥을 먹었다. 숨죽이며 조심스럽게 음식을 씹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엄마 아빠 목소리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최대한 행동반경을 좁히고 두 사람의 몸에 닿지 않게 어깨를 웅크리는 편이 더 노련했다. 나는 싱크대에 내가 먹은 그릇을 차곡차곡 쌓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연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낙후된 건물의 벽돌색처럼 탁해지면서 온몸이 흐려졌다. 손가락으로 하루 종일 부빈 듯한 지우개 가루의 색을 띠기도 했다. 혹시나 시력이 나빠진 건가 싶어 안경알을 교체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여전히 희미해지다가 말고를 반복했다. 투명해지는 건 아니었다. 영화에 많이 봤던 것 같이 몸이 통과된다거나 속이 훤히 보이는 일은 없었다. 분명 몸의 형태와 내부가 여느 사람들처럼 존재했지만, 채도와 선명도가 줄어들어 묘하게 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뿌옇게 뭉개져 갔다. 새벽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나오니 때아닌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에게 연락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집이 코앞이라 나는 그냥 비를 맞고 집까지 걸어갔다. 비에 흠뻑 젖은 내 몸은 실수로 물을 쏟아 잔뜩 불은 갱지처럼 흐리터분했다. 가로등에 비쳐 노랗게 빛나는 상가의 벽면이 물때로 가득했다. 나는 물때를 보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꼭 한 번씩 그것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집 앞에 있는 그 건물은 웬만해선 망하지 않는 슈퍼마켓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교회,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태권도장이 있었다. 그곳은 내가 사는 아파트와 학원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지름길과도 같은데,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그곳에 들어가 계단을 내려갈 때면 지독한 지하실 냄새에 숨을 급히 들이마시곤 했다. 하지만 이내 궁금해져서 꼭 한 번씩 그 냄새를 확인했다. 수천 년도 지난 전생의 기억을 불러오는 듯한 아득한 냄새가 났다. 맡으면 맡을수록 후회가 밀려오는 냄새였다.

잠결에 화장실에 갔더니 물때가 그새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자다 깨서 잘못 본건가 싶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았다. 청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물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빈 공간 없이 야무지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장실의 누런 조명에 비친 물때로 가득 찬 벽은 검은 반점으로 뒤덮인 바나나 껍질 같았다. 나는 괘씸해서 솔을 꺼내 비장하게 물때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날이 새도록 벅벅 씻으니 어느새 물때가 내 몸으로 기어 와서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간지러워 내 몸도 벅벅 긁어댔다. 정신없이 닦다 보니 어느새 나도 화장실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 집은 대체로 평화로웠고 그럭저럭 살만했다. 활발하고 상냥한 엄마는 전날 본 드라마의 줄거리를 쉬지 않고 줄줄 들려주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의 얘기를 아주 재밌게 들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빠가 회식을 하고 늦게 들어온 날에는 엄마는 여자 직원도 거기 있었냐고 눈을 흘기며 새침하게 쏘아붙였고, 아빠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하더니 질투하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불쾌한 대화에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사근사근한 집안 분위기에 만족하며 오랜만에 머릿속이 조용함을 느꼈다. 나를 고생시킨 화장실도 깨끗하고 보송보송했다. 아예 지워질 듯이 희미해지던 몸도 알록달록 빛깔을 띠었다.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성실하게 얼굴을 붉혔고, 실수로 침대에 정강이를 박으면 포도알 같은 멍이 차올랐다. 내 방에 들어와 일기를 펼치면 지난날의 기록들이 남 일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무수히 깨지고 부서진 것들이 그저 나의 망상 같았다.

오랜만에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었다. 붉은 구름이 연기처럼 하늘을 채웠다. 집안이 한차례 부서져 있었다. 엄마는 온갖 새끼들을 불러모아 아빠에게 쏟아내었다. 천하의 개새끼가 된 아빠는 엄마 입에서 새끼가 나올 때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그릇들을 집어 던졌다. 우리 집 그릇들은 모두 언제나 깨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말 없는 그것들은 바닥에 부닥칠 때 지금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쨍그랑이라는 말은 아주 귀여운 수준의 의성어였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언어의 한계 따위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우리 집 그릇들은 그렇게 얌전하지 않았다. 화가 난 우리 엄마가 아빠에게 나쁜 새끼가 아닌 개새끼라고 하듯이 부서지는 그릇들도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피아노 건반을 깔고 앉아 행패를 부리는 사람과 새벽의 주차장에서 끝도 없이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의 소리 같았다. 아빠는 닥치는 대로 그릇을 던지다가 퐁퐁도 집어던졌다. 뚜껑이 열린 퐁퐁이 질질 울기 시작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미끌미끌한 물바다를 닦으니 퐁신한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달큰한 포도향이 퍼져 나왔다. 향긋한 거실에서 심장 깊은 곳까지 찌르는 뾰족한 말들이 오갔다. 뚝뚝 끊기는 철심 같았다. 아빠는 손에 묻은 물을 탈탈 털고 의자를 던졌다. 방금 의자를 집어 던진 사람 치고 아빠는 꽤 이성적이었다. 나는 처음 이성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아빠를 보며 그 뜻을 차가움으로 이해했다. 아빠는 너무 차가웠다. 엄마는 온몸이 흘러내릴 듯 큰 소리로 울었고 아빠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집 안을 걷어찼다. 내 머릿속에 있는 창문이 연달아 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딘가에 붙고 싶다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잠깐 멍하니 앉아있다가 일기를 꺼냈다. 집안이 부서질 때마다 나는 오늘 깨진 물건은 무엇인지 일기에 기록했다. 오늘은 클래식하게 그릇과 의자였다. 아빠는 웬만해선 이성을 잃지 않았다. 물건을 던지고 깨부수는 것도 전부 맨정신에 하는 것이었다. 잔뜩 흥분해서 집안을 뒤집는 것은 아빠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업무를 해내듯 착실하게 부셨다. 그것은 마치 엄마의 울음소리를 덮어버리기 위한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한동안 깨끗했던 화장실이 어느새 물때로 어둑했다. 나는 망연해진 상태로 멍하니 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물때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뚫어지게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람 얼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흡사 모차르트의 얼굴을 성의 없이 휘갈겨 놓은 크로키처럼 보였다. 물때의 물컹한 성질 때문인지 글라스데코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닦아버렸다. 한숨 돌리고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는데 아까 그 모차르트가 거울에 비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쳐다보았다. 수건걸이 위에 분명 내가 방금 닦아낸 물때가 똑같은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지도 못한 채 도망쳐 나왔다. 그날부터 화장실의 물때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 날 작정하고 락스를 희석해서 치열하게 그것을 닦아내도 나를 놀리듯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내가 눈을 피할 수 없게 항상 내 시야에 자리 잡았다. 바닥에 들러붙어 헤죽거리는 얼굴을 피해 세면대로 눈을 돌리면 수도꼭지에 나타나 줄줄 흘러내렸다. 몸이 흐려지다 못해 이제는 움직이는 물때까지 보인다니. 꼼짝없이 그 얼굴과 마주해야 하는 나는 무서워서 아파트 관리실 1층에 있는 공용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기 시작했다. 샤워를 해야 할 때만 눈을 꼭 감고 후다닥 씻었다. 샴푸를 짜기 위해 슬쩍 눈을 뜰 때면 어김없이 샴푸 통에 붙은 그것이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었는데 공용화장실이 동파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사까지 시작해서 더는 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화장실을 가야 했다.

물때의 눈동자가 어김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우둑하니 서서 쳐다보았다. 두 쌍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치는 것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이제 안 피하기로 한 거야?”

갑자기 그것이 말을 걸었다. 나는 당황해서 입을 쩍 벌렸다. 안 봐도 우스꽝스러울 게 뻔한 내 얼굴을 보며 그것이 화장실이 쩌렁쩌렁 울리게 웃어댔다. 그러고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에 대해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계속 있었어. 그리고.

네가 계속 닦아봤자 언제든 다시 생겨.”

내가 왜냐고 묻자 자신은 소음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이것저것 따져 물으니 그것은 반말하지 말라고 꼰대처럼 굴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것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매번 저기요, 하며 부르기가 애매해서 나는 그것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것은 엄마 아빠가 매주 챙겨보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얼굴을 하기도 했고, 엔딩 요정으로 유명한 모 걸그룹 멤버의 얼굴을 하기도 했다. 매번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자주 짓는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해봤다. 주로 서양인의 이목구비를 가진 사회성이 부족한 음악가나 괴팍한 과학자의 얼굴을 했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인터넷에 외국인 이름, 하고 검색해보았다. 매튜, 레베카, 알렉스 따위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수많은 리스트 중에 별생각 없이 제일 고상해 보이는 크리스토퍼로 결정했다. 크리스토퍼 씨는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헛기침하며 나쁘지 않네, 하는 크리스토퍼 씨를 보며 나는 괜히 뿌듯해졌다. 크리스토퍼 씨는 소음을 먹고 살아서 그런지 말이 조금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세수를 하거나 양치를 할 때마다 쉬지 않고 질문하는 크리스토퍼 씨에게 말 좀 그만 걸라고 짜증을 내면 삐져가지고 주르륵 녹아버리곤 했다. 온갖 곳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검은 물때를 보면 기분이 끔찍해져서 나는 얼른 사과하고 그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크리스토퍼 씨는 볼일을 보거나 샤워를 할 때는 눈은 지우고 입만 나불대는 예의를 보여줬다. 똥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궁시렁거릴 때면 볼일을 보다 말고 일어나서 그 주둥이를 벅벅 지워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주로 크리스토퍼 씨는 엄마 아빠 욕을 했다. 아주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본인이 더 시끄럽게 나불거렸다. 물론 그 덕에 크리스토퍼 씨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란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수다를 들어주었다. 시험 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크리스토퍼 씨는 이리저리 꼬아 자신을 수학 공식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내가 조금 감동하여 손뼉치니 신이 난 크리스토퍼 씨가 변형 문제까지 내주었다.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식을 외웠다.

처음으로 내 몸이 희미해졌던 건 지난 학기였다. 그날은 하복을 입었지만 아직은 한기가 있어 동복 카디건을 걸쳐야 했던 초여름의 시작이었다. 학교 분위기는 모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때문에 한창 들떠있었는데, 아이돌 데뷔를 꿈꾸는 소년들이 전국의 여학생들의 정신을 아주 쏙 빼놓았었다.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시간 날 때마다 방송 클립을 돌려보며 춤을 따라 췄고 심지어 수업 시간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을 붙들고 투표를 독려했다. 컴퓨터 배경화면은 연습생들 사진을 슬라이드로 설정해 약 10초에 한 번씩 연습생들이 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각자 사진을 최대 다섯 장까지만 골라야 하는 나름의 규칙도 있었다. 친구들은 평생 해볼 사랑을 다 쓰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온 마음을 다해 소년들을 응원했다. 생기 넘치는 점심시간이 끝이 났고 눈이 절로 감기는 5교시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와 법시간 만큼은 달랐는데, 국어나 수학과 달리 주요 과목이 아니라 부담이 적기도 했고 일단 선생님이 재밌는 분이셨다. 문을 열고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투표해달라고 영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자리를 차지하며 10초에 한 번씩 새롭게 등장하는 소년들을 유심히 보셨다. 꽤나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는 한 마디 툭 던지셨다. 이 사람 멋있네. 헉 감사합니다. 그 연습생의 팬인 친구가 감격스러워하자 선생님은 크게 웃으면서 네가 왜 감사해? 하셨다. 선생님은 일방적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수업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자리도 토론장에서 볼 법한 마주 보는 형태로 바꾸라고 하셨고 선생님은 중간에 생긴 공간 안으로 들어와 돌아다니면서 수업을 하시곤 했다. 선생님은 수업 시작 전에 꼭 오늘 하루 감사한 것 두 가지를 물어보셨는데, 선생님의 지목을 받은 애들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겨우 대답을 끄집어냈다. 그래서 친구들은 정치와 법 시간만 되면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아무나 붙잡고선 야, 오늘 뭐 감사하냐? 하고 부랴부랴 물어보곤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답변이 있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주일 학교 숙제로 지겹도록 썼던 게 감사일기였으니까. 챙겨주신 부모님께 감사, 맛있는 점심을 먹고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 고루하고 진부하지만 그만큼 흥미롭지가 않아서 더 이상 꼬리를 물 일이 없는 답변이었다. 지원아. 선생님이 처음으로 나를 부르셨다. 나는 준비한 대로 술술 내뱉었다. 옆에 앉은 친구가 역시 정지원, 하면서 내 팔을 살짝 쳤다. 교회 짬바가 여기서 드러난다면서 엄지를 척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랑 소곤거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지원이는 부모님께 어떤 부분이 감사해?

나는 한순간에 멍해졌다.

구체적으로 더 말해줄 수 있을까?”

변명할 틈도 없이 황망한 우주로 걷어차진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왜 책임지지 못할 말을 주제도 모르고 당당하게 했을까.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렇게나 쉬운 질문에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내가 끔찍했다. 나는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고, 내뱉을 때마다 머릿속이 뿌연 연기로 가득 차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져 눈을 비볐더니 손가락이 같이 흐려졌다. 마디마디 떨리는 손가락을 팔에 벅벅 문댔더니 팔도 마찬가지였다. 덜컥 겁이 나서 나는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한순간에 나의 몸이 지워졌다. 솔직하지 못해서 덜컥 몸이 지워지기나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에게 더 꼭 붙었다. 바람이 불어와 살갗에 닿았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초여름의 바람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 속 소년이 평생 받을 사랑을 다 받은 사람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소란스러워 방문을 여니 화분을 내던지고 욕을 쏟아붓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나에게도 욕이 쏟아졌다. 아빠가 묵묵히 물건을 집어 던져 부순다면 엄마는 화가 나면 화분을 망가뜨리는 취미가 있었다. 주저앉아 화분을 껴안아 스투키의 모가지를 뽑고 인테리어를 위해 걸어둔 식물의 길게 늘어진 잎사귀들을 머리채 쥐어 잡아 뜯어냈다. 엄마는 집안을 꾸미는 데에 재능이 있어서 베란다를 정원처럼 아름답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온 식물들은 대부분 얼마 안 가서 엄마 손에 쥐어뜯긴 채 버려졌다. 그것들의 빈자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화분이 자리를 채웠다. 화가 난 엄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온갖 년으로 불렸다. 부드러운 니은으로 이루어진 단어는 한 글자 한 글자씩 파편으로 흩어져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금세 바스라질 것 같기도 했다. 엄마가 내던진 스투키의 모가지가 어항을 깨뜨렸다. 바닥을 빠르게 적시는 물살을 타고 구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유영했다. 형광등에 비친 어항 조각들이 반짝거렸다. 아빠가 파편을 느릿하게 발로 걷어내었다. 오늘도 나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아빠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나도 내던져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딘가 붕 뜬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오늘은 모가지가 부러진 화분들을 일기에 적었다. 산세베리아, 스투키, 베고니아. 그리고 어항. 내일이 되면 엄마 아빠는 오늘을 모른 척할 것이고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사실 나는 도무지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수백 번을 겪었어도 싫었고 동시에 간절히 원했다.

언젠가 내가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양치를 하고 있었는데 치약 거품을 가득 품고 웅얼거리며 벽을 쳐다보니 크리스토퍼 씨는 흡사 대동여지도 같은 모습으로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씨는 소음을 먹고 살잖아요.

지금까지 여기 살면서 어느 집이 제일 시끄러웠어요?”

크리스토퍼 씨는 북쪽과 남쪽을 거침없이 뒤바꾸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 지금도 충분히 먹고 살 만은 하지.

네가 오기 전에 혼자 살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때가 진짜 시끄러웠어.”

혼자 살았는데도요?”

. 너네 집 정도면 굶어 죽진 않을 정도지.”

그렇구나. 나는 우리 집보다 더욱 괴팍하고 히스테릭한 거주인을 상상해 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거실에서 일렉 기타를 쳐대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하루 온종일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살았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보더니 크리스토퍼 씨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내가 물어보니 빙글빙글 돌던 크리스토퍼 씨가 가만히 자리를 잡고 말했다. 지금도 너는 내가 보이잖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입을 헹궜고 오래 세수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물때를,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토퍼 씨를 만날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집안이 소란하든 그렇지 않든 크리스토퍼 씨가 알아서 화장실의 구석으로 숨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가끔씩 등장할 때마다 온갖 생색을 다 들어줘야 했지만 여러모로 나는 크리스토퍼 씨에게 고마운 점이 많았다. 이제는 물때가 없는 화사한 화장실을 볼 때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샤워기의 물소리조차 크게 느껴졌다.

오늘은 성탄절 전야제였다. 교회에서 하는 가장 큰 행사였고 엄마 아빠는 가장 말끔한 옷을 골라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 몸에 딱 붙는 치마를 입은 엄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황야의 마녀 같았고, 정장을 입은 아빠는 어깨를 옷걸이에 걸어놓은 것처럼 뻣뻣해서 마녀가 데리고 다니는 수하 같았다. 엄마는 교회에 갈 때마다 무조건 단장을 했다. 아침 예배가 시작되는 시간보다 세 시간은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하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한 다음 미리 다려 놓은 옷을 입었다. 엄마는 대충 준비하고 예배를 드리러 가면 주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줄곧 얘기했었다. 그렇게 단장한 엄마의 모습은, 나로서는 도무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나도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차려입었다. 희고 빳빳한 와이셔츠에 무릎 조금 위로 올라오는 스커트를 입고 아직 길들어지지 않아 딱딱한 워커를 신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교회에 들어갔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와 친분이 있는 집사님들 몇 분이 다가와 아는 체를 하셨다. 엄마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성함도 잘 모르는 분들이지만 나도 옆에서 꾸벅 인사했다. 전야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영유아부 아이들부터 다음 세대를 이끌 인재들이라며 교회에서 기대를 걸고 있는 청년부까지 각 부서에서 준비한 무대로 꾸며졌다. 불 꺼진 어두운 예배당은 오직 무대를 향해서만 조명이 비쳤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무대 위에는 초등부 아이들이 저마다 성경 인물을 맡아 연기를 했다. 흰옷을 입은 천사들과 마리아와 요셉이 손을 모아 기도했고, 구유 위에는 아기 예수가 누워있었다. 밝은 조명에 비친 가늘고 흰 먼지가 조용히 부유하다가 눈처럼 사르륵 떨어졌다.

기말고사가 끝나자 반 분위기는 느긋하게 풀어졌다. 아직 2학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예비 수험생이라고 겁을 주는 선생님들이 많았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오지 않을 여유를 즐겼다. 오늘만 살기로 한 것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교실을 휘저었다. 우리 반은 영화를 보기 위해 담당 교과 선생님들을 붙잡고 우리가 보려는 이 영화가 수업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설파한 끝에야 겨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시간에 들어오신 정치와 법 선생님을 꼬드긴 후에 보게 된 것은 몇 년 전 극장가를 휩쓸었던 범죄 스릴러 영화였다. 북적북적했던 교실은 하나둘 아이들이 영화에 집중하면서 고요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터지는 난폭한 마찰음이 교실에 울렸다. 잔뜩 얻어맞아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덤덤하게 몸을 떨었다. 짝꿍이 그런 나를 보면서 왜 이렇게 쫄았냐고 놀려댔다. 그런 짝꿍을 무시하고 다시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데 남자가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화에 먹혀버린 듯한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다. 남자의 손에 던져지는 모든 것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내 손이 차가워졌다.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어질 찰나에 교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새끼. 분노에 찬 나지막한 욕설이 적막을 깨뜨렸다. 그 순간 내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손을 문지르니 손가락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들은 흥분하며 영화 속 남자를 향해 거칠게 욕을 쏟아내었다. 짝꿍이 나를 치면서 거들었다. 저 새끼 완전 미친 거 아니냐? 딱히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험은 끝났지만 이제 나는 예비 수험생이라는 명목으로 더 바빠졌다. 학원 커리큘럼은 조금 더 강도가 세졌고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스스로 되뇌면서도 나는 은근히 심리적인 압박을 느꼈다. 밤늦게 학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집은 언제나 불이 꺼져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불청객 같은 형광등이 요란하게 쨍한 빛을 내었다. 엄마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다녀왔다고 인사했다. 이게 뭐니.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앞에는 일기가 놓여있었다. 일기를 다 쓰고 나면 혹시나 엄마 아빠에게 들킬까 봐 낡은 가방에 쑤셔 넣고 옷장에 매번 처박아 두었었는데, 그것은 허무하게 엄마 손에 쥐어있었다. 엄마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일기를 당장 찢으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어쭙잖게 더듬거리면서 싫다고 말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기를 내 얼굴에 집어 던졌다. 엄마는 감사하다는 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부모를 모욕하는 문장으로 가득한 내 일기를 보고 분노했다. 엄마는 일기 속의 자신의 모습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부서지기 전에 서둘러 일기를 찢었다. 내가 기록했던 부서진 물건들의 단어가 또다시 부서져 내렸다. 나를 내려다보다가 엄마는 안방에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았다.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단호한 소리였다. 거실의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자꾸만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사라지려는 내 몸을 붙잡고 어딘가에 달라붙고 싶었다. 그 순간 내 몸이 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운 가루가 되어 집안 곳곳에 흩어질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거울을 보고 싶어서 화장실 문을 열었다. 화장실이 빈틈없이 물때로 뒤덮여 있었다. 새카만 물때가 벽과 바닥을 타고 범람했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밤의 바다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소란한 귀울음이 들렸다. 한동안 나를 귀찮게 하다 사라진 크리스토퍼 씨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터져 나온 단 한 번의 소음을 급하게 삼키다가 잔뜩 몸이 불어난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끝이 사라지기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 넘쳐흐르는 물때를 만졌다. 부드럽고 미끄러웠다.

 

<2021 67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수상소감>

 

최수미 학생(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최수미 학생(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습니다. 세상에는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니까요. 그런 세상 속에서 성경의 유명한 구절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란 어려웠습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더더욱 오래 감사에 대해 생각했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받은 사람의 복잡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살아가는 용기를 꿈꾸게 됩니다. 함께 손잡고 오늘을 살아내는 삶을 상상합니다. 소설이 당장 우리의 삶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미약하지만 단단할 것입니다. 기꺼이 함께 살아내자는 용기를 주는 사람이 감히 되고 싶습니다. 삶에 부단히 깎여 맨몸으로 누워있는 사람에게 포근히 이불을 덮어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50매도 채 되지 않았던 초고를 좋게 읽어주시고 분량을 늘려서 잘 퇴고해 보라 하셨던 임현 교수님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용기를 얻고 무사히 퇴고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 항상 온 마음을 다해 내 글을 읽어주는 창희, 휴학 기간 동안 같이 즐겁게 글을 썼던 골콩트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끝으로 제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도무지 감사가 되지 않는 힘든 날들도 많았지만, 삶의 순간순간마다 제가 받은 사랑이 분명히 있었고 그것들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이해받기 어려운 신앙이라 하더라도요. 여러분의 곁이 사랑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을 꿋꿋이 살아가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1 67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심사평>

 

신수정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신수정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세계적 고립과 단절을 가져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글쓰기에 대한 의지마저 꺾은 것일까.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현격히 줄었으며,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도 여느 때 같지 않아서 심사하는 마음이 다소 무거웠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문학을 통한 모색과 빛나는 상상력이 존재하기 마련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두 작품을 선정하였다.

어떤 소설은 요약된 줄거리만 전할 때 작품의 빛이 사그라드는데, <미에는 다다>라는 소설이 그랬다. 공방에서 근무하는 미에와 그 공방을 운영하는 다다의 이별 이야기라고 짧게 정리해 버리면 이 소설이 가진 아름다움과 공들인 이미지, 문장의 리듬을 모두 잃어버리는 셈이다. 소설은 정리된 줄거리보다 문장과 문장 사이, 단락 사이, 인물의 말과 행동 사이의 여백이 어떤 무늬를 이루는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세계이다.

올해의 당선작은 <검은 소란>이라는 작품이다. 한 가족의 다툼과 불행을 아무리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화장실의 물때로 그려낸 이 소설은 불행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독보적으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가족의 불행이라는 익숙하고 진부한 세계를 귀엽고 다정하고 견딜만한 비극으로 바꿔놓는 힘은 화장실의 물때에게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다소 거친 듯한 장면의 연결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가진 불행을 대하는 태도와 인물에 대한 애정이 충분히 격려를 받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글쓰기는 골방에서 고독하게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골방에갇힌 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을 헛갈리면 소설은 그저 고리타분한 자기 독백이 되고 만다. 세계와 타인을 향해 관심과 마음을 열고, 그러는 과정에서 생긴 질문을 골방에서 진득하게 풀어나간 작품이어야 한다. 수상한 두 작가에게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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