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무지한 스승 〈1085호〉
상태바
[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무지한 스승 〈1085호〉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 승인 2021.04.19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2일, 우리 사회는 귀한 어른 한 분을 잃었다. 효암학원 무급 이사장 채현국 선생. 시대의 어른이라는 말에 걸맞게, 그의 삶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KBS 공채 1기로 PD가 된 뒤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정권의 나팔수가 되기 싫어 입사 3개월 만에 사표를 낸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 치자. 그 뒤 10여 년간 일군 국내 정상급 기업을 직원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 뒤 훌훌 털고 나온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민주화 단체에 몰래 자금을 대고, 언론자유 운동을 벌이다 직장을 잃고 셋방살이를 전전 하는 해직 기자에게 선뜻 집을 사준 것도 돈이 있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진 자들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온갖 그악스러운 짓을 하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 아닌가. 선생은 자신이 일군 부를 사회에 내놓으면서도 이를 자랑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재산을 남에게 주는 게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애초부터 재산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나이 예순을 넘긴 나로서는 새길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선생의 말이 따로 있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이다.

“(못난 노인들을)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 꼴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이 말이 죽비처럼 뒷덜미를 내리친 것은 나도 모르게 저 꼴이 되어간다는 말과도 통한다. 나는 나이가 들면 지혜롭고 관대해지는 줄 알았다. 욕심이 줄어들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고집도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리석음과 탐욕은 여전했고 원망도 사라지지 않았다. 남이 듣건 말건 내 말 하기에 바빴고 고집은 더 질겨졌다. 선생에 따르면 특히 이 땅의 노인들이 못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6.25와 자유당 및군부독재 시대를 관통한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교육도 삶도 부실했고 목숨이라도 보전하려면 비겁해야 했다. 힘이 있는 사람이, 남의 사정 같은 것은 볼 것 없이 야비하게 굴면서 남보다 편하게 사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몰아넣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에 따르면 세상의 직업엔 두 종류가 있다.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다. 산파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한다면 장의사적인 직업을 가진 이는 갈등이나 문제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범죄가 있어야 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가능한 직업, 선생은 이 직업의 대표적으로 판사나 검사 변호사 등을 꼽는다. 같은 직업도 하기에 따라 다른 듯하다. 정치인은 산파적인 직업도 될 수 있지만, 갈등을 부추겨 권력을 추구하는 작금의 정치인은 제일 고약한 장의사적 직업이다. ‘기레기’라는 말로도 모자라 ‘기데기’라는 조어까지 유통 되는 기자도 마찬가지일 테다.

한때 국내에서 소득세를 두 번째로 많이 냈던 선생이 경계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다. 흔히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하지만 “돈을 벌다 보면 그 매력이 얼마나 강한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인 것이 된다”라는 것이다. 이런 선생의 기록들을 다시 들추며 떠오르는 게 있다. 우리 사회에 적잖은 울림을 준, 경남 거창고의 직업 선택 십계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해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 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런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는데 왜 우리는 갈수록 나만 잘 살겠다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세상을 만들고 있을까? 살다 보면 경험으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못난 청년이 못난 장년이 되고 못난 장년은 못난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청년이라야 좋은 노인이 될 수 있다. 직업 선택 10계를 가르친 학교서 공부한 청년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