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무지한 스승 〈10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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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무지한 스승 〈1084호〉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 승인 2021.04.0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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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도권 학교의 선생이라면 해보고 싶은 실험이 하나 있다. 배우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끌어내 스스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실험, 비제도권 인문학 공동체에서는 실패한 실험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책 『무지한 스승』에는 200년 전 벨기에(당시 네덜란드) 루벵대학의 프랑스인 강사였던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이 소개되어 있다.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가르쳤지만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다. 수업을 들으려던 학생들 대다수는 프랑스어를 몰랐다. 학생들과 연결고리를 찾던 그는 마침 출판된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덜란 드어 대역 판』을 발견했다. 자코토는 이 책을 학생들에게 주고, 통역을 통해 네덜란드어 번역문으로 프랑스어 텍스트를 스스로 익히라고 주문했다.

  학생들이 제1장의 절반까지 왔을 때, 그는 학생들에게 익힌 것을 열심히 암송하거나 외워 쓰기를 연습하되, 나머지는 내용을 이야기할수 있을 만큼만 공부하라고 시켰다. 그렇게 준비한 학생들은 시험을 치렀다. 이 책의 내용을 프랑스어로 써보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프랑스어 동사의 복잡한 어미변화까지 터득해 작문 시험을 치렀고 점수는 매우 높았다. 수업과 시험이 진행될수록 문법과 맞춤법도 점차 정교해졌다.

  자코토의 모험은 계속된다. 스스로는 할 줄도 모르는 그림과 피아노를 가르쳤고, 법학부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변론을 가르쳤다. 학생 들은 가르치는 것 하나 없는 이 외국인 강사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설명도 하지 않은 자코토에게 배운 학생들은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며 변론을 아주 잘했다.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프랑스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심지어 미국과 브라질에서도 학생이 찾아왔다.

  자코토가 말도 통하지 않는 학생에게 프랑스 어와 네덜란드어 변론을 가르치고, 그림과 피아노까지 교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이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설명해주는 선생 없이도, 누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을 해방하고 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쓸 수 있게만 하면 선생은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자코토의 학습법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믿음이 깔려있다. 그에 따르면 선생의 역할은 설명하는 일이 아니다. 학생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학생이 자신의 힘으로 과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생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힘, 자신의 진정한 역량을 깨달아야 한다. 선생은 학생이 과제를 스스로 할 수 있음을 믿어주며 역량을 끌어내고 학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배운다.

  작은 공동체의 장점은 자유롭게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 공부를 몇 차례 시도 했으나 중도 포기한 이들을 모아 자코토 모험의 재현에 나섰다. 몇 개월 안에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실험에 나서면서 믿은 것은단 하나, 한 번 가능했던 것은 반복될 수 있다는 자코토의 말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일본어 학습법을 채용한 일본어에서만 일부 성공하고 나머지에 서는 대체로 실패했다. 자체 진단한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다. 결정적인 것은, 공동체 참여자들이 과제를 수행하게 하는 강제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중도 포기해도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설명을 듣든, 스스로 깨치든 외국어 하나를 습득하려면 적어도 얼마 간은 몰입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참여자의 잠재력을 끌어내 공부에 빠지게 할 유인이 없었다. 그나마 일본어에서 성공한 것은 옛 운동권 학생 들의 전례가 있어 참여자가 스스로를 믿고 공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는 아니나 비슷한 성공 사례는 많다. 공동체에서 한동안 일본어와 한문을 가르친 선생은 일본어는 물론 중국어, 프랑스어, 베트남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스스로 깨쳤다. 자신의 힘으로 일본어를 익히며 다른 언어도 혼자 공부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설명하며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 선생들의 불편함으로, 잠시 유럽을 달구었던 자코토의 학습법은 사라졌다. 요즘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gmail.com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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