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스펙 만들기에도 바쁜데 〈10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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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의 인문학 공동체] 스펙 만들기에도 바쁜데 〈1083호〉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 승인 2021.03.15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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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를 잘난 척하며 써대는 것이다. 『논어』, 『맹자』, 『주역』, 『일리 아스』, 『오디세이아』, 『소포클레스 비극』, 『국가』…. 하하, 벌써 지겨워지지 않은가? 사람들이 지겨워하건 말건 이를 주기적으로 반복 하는 곳이 있다. 대학들의 권장 도서나 필독 도서 같은 도서 목록이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이 도서 목록에는 고전이 단골로 등장한다. 책을 선정하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그리스 비극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으니 그럭저럭 읽는다 치자.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만 해도 전공자의 영역에 가깝다. 문학 고전에 반드시 꼽히는 단테의 『신곡』은 인내력 시험하기에 알맞고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은 등장인물 이름 익히는 것에도 공력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지나치게 두껍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너무 어렵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뉴턴의 『프린키피아』 같은 자연과학 고전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니 ‘고전이란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대학들은 여전히 필독서 목록에 고전을 포함한다. 그래야 대학의 권위가 산다고 생각하는지, 닥치고 읽으라는 것이다. 고전이 수백, 수천 년 온축된 인류의 지혜를 담 고, 긴 세월의 마모를 견뎌낸 책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이런 고리타분한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학이 시대를 선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따라가지도 못하거나 심지어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아닌가.

  글쎄다. 내가 속한 작은 인문학 공동체는 몸이 가벼운 편이다. 조직 변화에 따른 이해관계가 없어 세상의 변화에도 비교적 민감하게 대응한다. 이런 인문학 공동체에서 최근 ‘고전 100권 읽고 토론하기’ 모임을 비롯해 ‘명저 서평 쓰기’, ‘과학 고전 읽기’, ‘문학 고전 깊이 읽기’ 따위의 모임이 여럿 생겼다. 책을 읽기로 작정한 기간도 5년, 10년으로 길다. 이 모임에 참여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벌이는 주축은 30대에서 50대다. 그렇다면 고전은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세대들이 긴 세월에 걸쳐 즐기는 책일까?

  급변하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나만의,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이라고 흔히 말한다. 나만의 생각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 나만의 생각이라고 여긴 것도 알고 보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SNS 나 유튜브에서 얻어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다. 나만의 생각이 없으니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이 나올 리 없다. 모두가 달려드는 곳에 너도 나도 뛰어들어 와글와글 경쟁률만 높인다. 나만의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생각의 뿌리를 바꿀 필요가 있다. 생각의 피를 바꾸는,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급진 적(radical)이라는 말은 뿌리, 근원이라는 말과 통한다. 인류 생각의 뿌리이자 사상의 근원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고전이다.

  많은 경우 고전은 처음 나올 당시의 통념과 상식, 그리고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었 다. 시류에 휩쓸리기보다 질문을 던지며 맞서는 책이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빛깔이 바랬지만 적잖은 고전의 역사에는 피가 배어있다. 인류사를 뒤흔들며 피로 물들인 고전 몇 권 떠올 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고전은 안정된 중장년이 허영기로 읽는 책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에 질문을 던지며 맞서야 하는 청년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들이 스펙 만들기에도 바쁘다는 걸 잘 알면서도, 고전을 외면하지 않은 대학들이 고마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적잖은 고전이 어렵 다는 거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나 함께하면 힘이 세다. 혼자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던 책도 여럿이 읽고 토론하면 쉽고 재미있어진다. 지겨운 소리로 시작했으니 뻔한 말로 글을 마치자. 나만의,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길 바라는가. 함께, 고전을 읽고 토론하시라,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질문을 던지며 맞서시라. 답보다 중요한 것, 긴 삶에서 스펙 보다 결정적인 것은 제대로 된 질문 하나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gmail.com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paide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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