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인간의 조건 〈10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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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인간의 조건 〈1083호〉
  • 이유리
  • 승인 2021.03.1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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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어쩌지? 신고부터 해야 하나? 그러다가 괜히 엮이면 어쩌지? 나 지금도 늦었단 말야;’ 오전 일곱 시 이십칠 분. 아침도 거른 채 부리나케 집을 나서 버스 정류장에 막 도착한 시 이었다. 끼이익, 쿵. 전에 들어보지 못한 파열음과 함께 건너편 도로에선 두 물체의 충돌이 선명했다. 난생 처음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였다. 갈까, 말까. 갈등하는 순간 정류장에선 버스 도착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백, 칠십, 삼번, 이백, 칠십, 삼 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
  그날의 출근길이 유난히 기억나는 이유가 꼭 교통사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정규직 전환을 목전에 둔 면접일. 그러니까 적어도, 그때만큼 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일생일대의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고 여긴 날이었기 때문이다. 졸업후 세 개의 회사에서 인턴 삼 개월, 계약직 일 년, 다시 인턴 육 개월을 일했고, 틈틈이 공채 소식이 들릴 때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제가 귀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결과 통보 메일이 도착하는 순간이 설렘과 기대에서 자연스런 낙담으로 변해갈 즈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최종 합격 소식이 도착한 것이 다. 수습 삼 개월을 거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그리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급히 들어가 본 취업 관련 커뮤니티에서 ‘ㅂㅅ 아니면 다붙여주니 걱정말아요~^^’라는, 정규직 전환 경험자의 후기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규직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같은 엔딩은 아니었다. 밥 먹듯 하는 야근부터, “아직 수습이죠?”라는 질문에 담긴 은근한 압박까지. 그날은 내게 그런 날이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게 되는.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 心)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羞 惡之心)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 (辭讓之心)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은 지혜의 시작이다.”


  춘주전국시대의 철학자 맹자는 사람이 선한 존재인지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했다. 그가 사람이 선하다고 말하는 근거는 이렇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모두가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가 보기에 이처럼 모든 인간은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인의예지 (仁義禮智)라는 사덕(四德)을 쌓아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덕은 외적 조건의 방해가 없으면 자연히 내적으로 발현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마치 작은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동물적 본능 대신 선한 마음을 가꾸고 확장해 나가야 하는 걸까? 맹자는 ‘이것이 바로 인간과 짐승의 다른 점’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진실로 인간다워지기 위해선 선한 본성을 확충시키는 길뿐이라는 것이다.
  그날 나는, 못 이기는 척 곧이어 도착한 263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떡해...”라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말이다. 산산이 부서진 차체와 그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않던 운전자.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머릿속에선 사고 장면이 반복 또 반복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인터넷 후기처럼 화기애애하던 면접장을 나서며 나는 아침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이유리 작가 theyare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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