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그 많던 선배는 다 어디로 갔을까? 〈10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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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그 많던 선배는 다 어디로 갔을까? 〈1082호〉
  • 이유리
  • 승인 2021.03.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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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 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다 야. 잘지냈지?”
  새로 이사한 선배의 집은 선배만큼이나 군더더기 없고, 또 따뜻했다. 모난 곳 없이 하얗고 말끔하게 칠해진 벽과 천장, 필요한 것들은 모두 준비돼 있지만, 결코 과하지는 않은 가전과 가구들, 처음 오는 사람이라도 용도를 알 수 있을 만큼 잘 정돈된 방까지. “선배, 집 너무 예쁜데요? 꼭 선배 같아요.” “너 온다고 급하게 치웠어. 평소에는 애들 본다고 아주 난장판이다, 야.” 선배는 특유의 쿨한 화법으로 대답하며 내 멋쩍은 칭찬을 넘겼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역시나 아이였다. 올해 미운 일곱 살이 된 첫째가 얼마나 말을 안 듣는지, 게다가 말귀 알아듣는 영악함까지 더해져서 얼마나 귀찮게 떼를 쓰는지,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갓 100 일을 넘긴 아이는 밤에도 두 시간마다 깨는데 나와 남편이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는 상황인지 등등. 선배는 “그래도 첫째 기를 때랑은 다르게 사소한 문제들은 넘겨버리게 되더라고” 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의 꽃으로 주목 받는 음성학 분야를 연구한 뒤 글로벌 IT업체에서 근무한 사람이었다. 본인은 매번 별거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선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선배가 얼마나 치열하고, 또 치밀하게 미래를 준비해 왔는지를.

  선배의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한 건 출산 이후부터였다. 과정은 시시했다. 육아에 대한 부담과 ‘당분간’이라는 합리화로 퇴사를 선택하는 아내.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당분간이지 못한’ 당분간. 경력, 직급 등 여러 면에서 치고 나가는 동기. 정체된 자의 불안까 지. “잘 모르겠어. 가까스로 면접에 올라가도 일단 얼마 전에 아기 낳았다고 하면 반응이 싸해지더라고. 이러다 그냥 계속 아이만 길러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야.” 늘상 유쾌하던 선배의 표정이 이때만큼은 조금 무겁 게만 느껴졌다.

  “정의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 된다.”

  1980년 어느 날, 뮌헨 필하모니의 오디션이 열렸다. 이날 응시자 중엔 앞서 10번 넘게 오디션에서 탈락한 트롬본 연주자가 있었다. 이름은 아비 코난트. 당시 보기 드문 여성 트롬본 연주자였다. 오디션이 시작되었고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심사위원 전원의 동의로 합격이 결정된 것. 합격의 비밀은 ‘방식’에 있었다. 이름하여 블라인드 오디션. 심사 위원들이 성별, 나이 등을 모른 채 오로지 실력 만으로 그를 평가할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앞서 도덕철학자 존 롤스(1921~2002)는 공 정한 결과를 얻기 위한 핵심 요소로 ‘운의 중립화’를 말했다. 출신, 성별 등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연하게 주어진 조건을 배제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으로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운이 돌아가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무지(無知)의 상태를 제시했다. 마치 블라인드 오디션처럼 말이다.
  선배의 집을 나서며 아비 코난트의 사례를 언급한 유튜버의 의미심장한 마무리를 떠올렸다.

  “블라인드 오디션이 아니라도 그는 합격할수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지난해 경기 불황으로 대량 해고 사태가 많았죠? 통계를 보니 남성 취업자 대비 1.75배나 많은 14만 명의 여성 취업자가 감소했다고 해요.”

 

이유리 작가
이유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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