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제66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너무나 평범해 모두가 기억할 (소설 부문 당선작) 〈10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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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66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너무나 평범해 모두가 기억할 (소설 부문 당선작) 〈1081호〉
  • 이태희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0.11.3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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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친구와 헤어지고서 나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별과 칩거라는 개별적인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가령 한 동기는―그 사려 깊은 친구는 내가 일주일 넘게 학교에서 보이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내가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해 “걔는 그냥 오럴섹스에 미친 또라이였어”라고 말한 것을 연인과 이별한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부리는 위악 정도로 받아들였는지 연신 “그래, 괜찮지?”만 반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래, 괜찮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래, 괜찮지?”

 그 친구는 나를 위로하고 싶어 했다. 어느 정도 그 진심 어린 위로에 맞장구를 치기는 했지만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건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리를 다친 채로 나돌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사람들―그러니까 그 동기를 포함한 일군의 사려 깊은 사람들은 어쩌다 다쳤느냐고 물어올 것이 빤하고,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만취한 채로 뛰어다니다 계단에서 굴렀다’고 말하기는 창피한 일이니까. 차라리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느라 칩거 중이라고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다.

 집에만 머물면서 나는 평소에는 거들떠본 적도 없는 영화를 내려받아 보았다. 영화는 작품성이 높기로 정평이 난, 요컨대 평론가들이 별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를 선사한 영화나, 주요 영화제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대체로 지루했다.

 구미가 당기는 영화를 찾기 어려워졌을 즈음에 평소에는 연락도 하지 않던 동기―앞서 전화를 걸어왔던 그 사려 깊은 동기가 아니라 약간 고지식하고 말수도 별로 없는 동기 남자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문을 들었거나, 내가 몇 주씩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은 탓에 전화를 걸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시답잖게 “그래, 괜찮지?” 타령을 해대면 주저 없이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는데, 그 동기는 느닷없이 “괜찮은 외부강의가 있는데 들어볼래?”하고 물었다.

 괜찮다는 외부강의는 번역포럼인데, 허울 좋게 포장 하느라 포럼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지 실은 평범한 강의 형식이며, 자신이 수강 등록을 하고 수강료까지 지불한 마당에 사정이 생겨 그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어서 문의해본 바, 환불은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추천할 만한 사람을 생각하다 나를 떠올렸고, 돈은 자신이 냈지만 어차피 듣지 않으면 허비하게 될 돈이었으므로 차라리 누구라도 자신을 대신해 강의를 들어준다면 돈을 아끼는 기분이 들 것 같으니 자신이 낸 돈으로 강의를 듣게 된다는 데에는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고, 아주 장황하게 설명해주었다. 실제로도 그 내용을 전부 한 문장으로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왜 나를 떠올렸냐고 물었다. 혹시 내가 몇 주째 학교에 나가지 않아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 같았냐고 덧붙였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너 학교 안 나오고 있었어?” 대답이 왠지 마음에 들었고, 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동기를 대신해 강의를 듣기로 했다. 그래, 괜찮겠지.

 

 곧 기말고사 시즌이었다. 한 학기뿐 아니라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제야 집에만 처박혀 있는 꼴이 조금 궁상맞았다고 느껴졌다. 깁스를 뜯어 내고 압박붕대를 발목에 둘렀다. 두꺼운 양말을 신으면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웬만큼 눈썰미가 좋은 동시에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다친 다리에 대해 물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강의는 주말에 합정역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무슨 출판사에서 시행하는 인문학 강의의 일환인 듯했다. 번역과 인문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외벽에 붙은 A3 사이즈의 포스터에 써 있는 바에 따르자면 아무튼 인문학 강의였다. ‘인문학이 힘이다’ 같은―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런 구태의연한 캐치프레이즈를 뒤로 하고 3층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러저러해서 찾아왔노라고 말하자 구취가 심한 직원이 사무실 맞은편 강의실로 가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맨 뒷자리에 앉으려는데 좀 전의 그 직원이 강의실로 들어와 앞줄부터 채워 앉아 달라고 말했다. 강의실이 비좁아서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앞줄로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늦지를 말지. 나는 군소리 없이 맨 앞줄에 앉았다. 직원은 화이트보드에 ‘앞줄부터 채워 앉아주세요’하고 써두고 강의실을 나가다가,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또 “앞줄부터 채워 앉아 주세요”했다.

 그 공지사항 때문인지 직원이 나가고서 강의실로 들어온 수강생은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옷차림이 단정한 남자였다. 그는 맨 앞줄의 다른 자리를 놔두고 굳이 내게 가방을 치워달라고 부탁하고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남자는 해맑게 웃었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고, 나는 정말이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웃고 있는데도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웃고 있어서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속내를 알 필요도 의지도 없었지만, 그는 내게 “어쩌다 다치셨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예?”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 본 상대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틀 줄 아는, 아주 재수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가는 나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 꼴이 우스워보였겠다고 생각하다가 이번에도 나도 모르게 “제가 다리를 절뚝거렸어요?”하고 되묻고 말았다. 그는 내가 마음을 열기라도 했다고 받아들였는지 다시 한 번 해맑게 웃어보였다. 나는 의아해졌다. 그는 시종 웃고 있었는데, 한 순간 ‘해맑음 모드’로 전환되기라도 한 듯이 그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보였던 것이다. 이내 그의 표정은 ‘해맑음 모드’에서 ‘평범한 웃음 모드’로 돌아왔다. 그의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표정 전환을 신기해하며 쳐다보다가 나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한 것같은데 제대로 듣지 못했다.

 몇몇 수강생이 강의실로 들어와 앞줄부터 착실하게 채워가며 앉았다. 강의가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시각을 한참 넘기고서도 강의를 담당한 변역가―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대로라면 젊은 데다 주목을 받고 있는 인기 번역가라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번역가가 유명하다거나 주목을 받는다거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사이 내 옆자리의 남자는 내게 “책은 뭐로 고르셨어요?”하고 물었다.

 “책이요?” 내가 되묻자 그는 각자 책을 한 권씩 골라 와야 한다는 공지 문자를 받지 못했느냐고 다시 되물었다. 나는 몰랐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이 책 두 권 가운데 어떤 것을 가져오는 것이 좋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두 권을 다 들고 왔으니 그중 한 권을 내게 주겠다고 선뜻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받는 것은 부담스럽고 오늘 하루만 빌리겠다고, 다음 주에는 같은 책을 구해서 사오든 도서관에서 빌려오든 할 테니 오늘만 빌려달라고 했다. 남자는 다시 ‘해맑음 모드’로 웃었다.

 남자는 내게 책 두 권을 내밀며 내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다. 한 권은 『킬리만자로의 눈』이었고, 다른 한권은 『꿈과 현혹과 문』이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왠지 조용필의 소설 같다. 표지는 그쪽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나는 『꿈과 현혹과 문』을 골랐다. 남자는 “그럼 제가 헤밍웨이로 하게 됐군요.”하고 웃었다.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를 쓴 작가입니다만.” 아. 예. 알아요. 전도유망하다는 예의 번역가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지하철이 연착됐다나. 궁색한 변명이었다.

 

 “설마 헤밍웨이나 코맥 맥카시를 골라온 분은 없겠죠?” 그게 번역가의 첫 질문이었다. 나는 쿡, 하고 웃었다. 웃으면 실례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강사가 내게 “학생은 무슨 책을 골라오셨죠?”하고 물었다. 나는 책을 들어 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도 알수 있도록 작가명과 제목을 큰소리로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헤밍웨이만큼이나 낯선 이름이었다. “좋은 작품을 골라왔군요. 잠깐 빌려주시겠어요?” 좋은 작품이라니, 정말로 읽어봤을까? 나는 어정쩡하게 일어나 그에게 책을 건넸다.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작가가 쓴 본래의 문장에 충실할 것이냐, 그 문장의 의미를 한국어에 적합한 방식으로 옮기는 데에 집중할 것이냐. 앞으로 우리 강의에서는 전자를 형식주의, 후자를 내용주의라고 부르겠습니다. 편의상이요. 내용주의라는 말이 조금 이상한가요? 자, 이 학생 분이 빌려준 책을 볼까요? 장 선생님이 번역한 책이군요. 훌륭한 번역가죠. 이 분은 형식주의를 택했는지 내용주의를 택했는지 한 번 봅시다. 물론 저는 이미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음, 우스갯소리인데 아무도 안 웃네요.

 어디 보자. 첫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군요. 동료로부터 연주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을 받은 남자가 자신의 동료를 총으로 쏘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꽤 긴 문장이네요. 원문과 비교해봐야 알 수 있겠 습니다만, 아마 본래의 문장을 직역해놓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걸 형식주의라고 부르기로 했죠. 장 선생님은 아주 유명한, 아, 여기 책 돌려드리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형식주의 번역가입니다. 어디 가서 잘난 척한다고 형식주의 번역가라는 말은 하시면 안 됩니다. 그 표현은 이 강의실에서만 쓰기로 한 거니까요.

 번역가는 내 책을 가져가 나름대로 즉흥적인 강의를 펼치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하려 애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미리 준비해온 말을 되는 대로 늘어놓는 데에 급급해하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구사하는 유머마저도 이미 준비해온 티가 역력했을뿐더러, 그 유머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자 당황했는지 말을 자주 더듬었다.

 “선생님 자기소개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번역가가 말을 잠시 멈추고 어물쩍거리고 있을 때 별안간 내 옆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번역가는 그제야 화이트보드를 돌아보고, ‘앞줄부터 채워 앉아주세요’를 지운 다음 자신의 이름을 큼직하게 썼다.

 

 남자의 이름은 윤배였다. 강사가 아닌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 남자의 이름 말이다. 정식으로 번역가가 되면 익현이라는 필명을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번역가가 필명을 쓰는 경우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야 자기 마음이죠”하고 대답했다. 그럼 윤배 씨와 익현 씨 가운데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그야 희수씨 마음이죠”하고 대답했다.

 호프집은 소란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 남자를 윤배 씨라고 부르기로 했고―그야 익현이라는 이름은 번역가가 된 다음에 쓰기로 한 이름이고 그는 아직 번역가가 아니니까― 윤배 씨와 나는 번역 강좌의 ‘번역 메이트’였다. 강사가 멋대로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이 여러분의 번역 메이트입니다. 앞으로 한 조가 되어서 번역을 공부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하고 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조가 되었으니 친해지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의미에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윤배 씨가 제안했고, 책까지 빌린 마당에 제안을 거절하기 난처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배 씨는 왠지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 내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윤배 씨가 자신이 불쌍해 보이도록 표정이나 말투를 과장한다거나 반대로 묘하게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식의 비열한 태도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냥 느낌이 그랬다.

 내가 대학생이라고 말하자 그는 조금 놀랐다. “그렇게 늙어 보여요?” 농담이랍시고 말하면서도 그 강사의 형편 없는 유머 감각이 내게 옮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와는 별개로 만난 지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상대에게 그런 농담을 했다는 데에 나 스스로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는 그게 아니라고, 이 강의를 들으면서 대학생은 처음 봐서 조금 놀랐을 뿐이라고 황급하게 덧붙였다.

 그렇다는 건 윤배 씨는 이 수업을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는 뜻이네요? 그는 선뜻 이번이 벌써 세 번째라고 답했다. 그렇다는 건 윤배 씨는 옆에 앉은 사람과 한 조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요? 그는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는 건 윤배 씨는 한 조가 될 걸 알고서 일부러 제 옆자리에 앉았다는 뜻이네요? 그는 ‘해맑음 모드’로 웃었다. 가증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나는 반 정도 남은 생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윤배 씨는 『꿈과 현혹과 문』을 쓴 그 작가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해주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의 이유는 그가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첫 장편소설 『모두를 위한 거짓말』을 통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정확히 예측해냈다는 것이 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알죠?” 나는 새로 주문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술이 약한 편이 아닌데도 나는 엄청나게 빨리 취했다. 그야 엄청나게 빨리 마셨으니까.

 술값은 내가 치렀다. 그는 자신은 돈을 벌고 있고, 나는 아직 대학생이니까 돈은 자신이 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나는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나도 아르바이트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나는 그저 책을 빌려 생긴 가벼운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윤배 씨는 2차는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2차를 가요?” 그는 만화 캐릭터처럼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럼 안 가요?”

 그럼 안 가겠는가. 윤배 씨와의 2차는 연남동 이자카야로 갔다. 사실 합정역에서 연남동까지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연남동이었고, 이자카야였는데, 앉자마자 윤배 씨는 사케를 주문했다. 이미 취한 상태에서 도쿠리 두 병을 비웠다. 윤배 씨도 꽤 취했다. 3차 가자! 이미 열두 시가 가까워 있었다. 이미 많이 마신것 같은데요. 3차는 노래방이었다.

 

 정오를 넘기고서야 겨우 잠에서 깼다. 용케 집에는 잘돌아왔네. 제대로 씻고 화장까지 지우고 잠든 모양이었다. 술을 또 그렇게 먹으면 내가 인간도 아니지. 다짐하며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 문자는 내게 강의 자리를 내어준 동기로부터 온 것이었다. ‘수업은 어땠어?’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최악의 대목은 강의 말미에 강사가 날린 회심의 멘트였는데.

 자, 각자 가져온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손을 얹어 보세요. 눈을 감고 저자의 목소리를, 문장의 박동을 느껴보는 겁니다.

 ‘생각보다 유익할 듯. 고마워.’ 그렇게 답신을 보냈다. 그 다음 문자는 윤배 씨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제 집에 잘 들어갔어요?’ 시각을 보니 아침에 온 것이었다. 정오를 넘기고서야 잠에서 깼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자는 카드 사용 확인 문자였다. 1차 호프집에서 내가 지불한 금액이 표시되어 있었다. 분명 안주는 하나만 주문했을 텐데, 맥주를 대체 몇 잔이나 먹은 걸까.

 변기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나니 조금 후련했다. 무슨 과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노트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이다 『꿈과 현혹과 문』을 발견했다. 책을 돌려주려고 가방에서 꺼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아마 윤배 씨가 내게 선물로 주겠다고 했거나―그걸 또 냉큼 받았다는 말인가― 적어도 강의가 끝날 때까지는 빌려주겠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책의 헛장에 무언가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었다. ‘익현에게’로 시작하는 짧은 편지인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게 틀림없었다. 보나 마나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가 헤어진 후에 책을 버리지는 못하고 편지만 지웠겠지. 소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책 안쪽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노트에 써놓은 과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자신이 고른 책―내 경우에는 『꿈과 현혹과 문』의 원서를 구해 번역된 판본과 비교하기. 형식주의에 입각해 번역 되어 있다면 내용주의로, 내용주의에 입각해 번역되어 있다면 형식주의로 열 문장만 다시 번역해보기.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이름으로 검색되는 책의 편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금방 『꿈과 현혹과 문』의 원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서의 제목은 『The Dream, The Daze, The Door』였다. 아, 머리글자만 따서 보면 D, D, D구나. 번역으로는 ㄲ, ㅎ, ㅁ인데. 다음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검색했다. 예측은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동료로부터 ‘연주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을 받은 남자가 자신의 동료를 총으로 쏘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게 번역된 첫 문장이었다. 나는 노트에 번역된 첫 문장과 원문의 첫 문장을 옮겨 적었다. The rumor which I heard this morning had it that the man shot his band member just because the member pointed out his mistake. 문장을 다시 내 식대로 써보았다. 소문…내가 오늘 아침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그는 쏘았다 자신의 밴드 멤버를…그의 실수를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오늘 아침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밴드 멤버를 쏘았다.

 써놓고 보니 왠지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번역에 ‘내가 오늘 아침에 들은’이라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나, 원래의 문장에 따옴표 같은 건 있지도 않다는 점이나, ‘연주’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고 밴드 멤버를 동료라고 번역해놓았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근데 내가 이걸 왜 하고 앉았나,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딱히 과제를 끝내지 않아서 그 주말 수업에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 돈 내고―정확히 말해 내 돈은 아니지만 아무튼― 듣는 수업인데 과제 따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내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수업에 나가지 않고 이사를 했다. 이사라고는 해도 짐은 박스 몇 개 분량에 불과했고 살던 자취방과 살게 될 자취방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블록에 지나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일을 끝내고 보니 일을 거들어준 동기들에게 답례할 것이 마땅치 않아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밤새 술을 마셨다. 술 사줄 돈은 없어도 술자리로 제공할 자취방은 있으니까.

 다음날 아침에 보니 윤배 씨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왜수업에 나오지 않았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제가 뭐 실수했나요?’ 윤배 씨는 자기애가 참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버리다니. 그러면서 나는 윤배 씨가 자존감이 참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덮어놓고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버리다니.

 일이 있어서 못 갔을 뿐이에요. 그리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수 연락처를 뒤졌다. 내가 수강했던―그리고 기말고사는 가볍게 패스해버렸던 강의의 담당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마지막 몇 주의 수업에 나가지 못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했는데 추가 시험을 치르게 해주거나 레포트로 대체하도록 해준다면 감사하겠다, 불이익이 있다면 당연히 감수할 용의가 있다, 감기 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뭐 그런 구구절절한 내용이었다.

 발송한 메일 일곱 통. 수신 확인 결과 확인된 메일은 다섯 통. 내가 받은 답장 세 통. 그 중 두 통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학칙에 의거해 낙제 학점을 줄 수밖에 없어 유감이다.’ 나머지 한 통은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학칙에 의거해 낙제 학점을 줄 수밖에 없어 유감이다.’ 그럼 그렇지. 교수로부터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지적을 받은 여자가 교수를 총으로 쏘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괜히 그런 상상을 한번 해보았다. 아이고 부질없어라.


 2주 만에 다시 합정역을 찾아갔다. 수업을 듣지는 않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사람들이 빠져나와 한쪽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어디론가 몰려가고 난 뒤에도 윤배 씨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지 한번 강의실에 들어가 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윤배 씨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윤배 씨와 함께 나온 여자가 담배에 불을 붙였고, 윤배 씨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어라, 안 피우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했다.

 내 쪽으로 다가온 윤배 씨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는 웃었다. 그러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구나. 나도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윤배 씨에게 『꿈과 현혹과 문』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주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윤배 씨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누구한테 줘요?’하고 되묻고 싶은 마음으로 “안 받아요?”하고 물었다. “이제 수업 안 나와요?” 윤배 씨는 책을 받는 대신 그렇게 되물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고, 계속 나올 수도 그만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럼 이걸 왜 나한테 줘요?” 하고 윤배 씨는 말했고, 나는 ‘아니면 누구한테 줘요?’ 와 짜증 대신 “그러게요”와 웃음을 건넸다.

 담배를 다 피운 윤배 씨의 일행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수업에 나가지 않아 지난주부터 임시로 한 조가 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원래 조원은 급작스럽게 전근하는 바람에 수업에 나오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윤배 씨가 유쾌하게 말했다. 술은 마시고 싶지 않아서 저녁식사라면 함께 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고, 우리는 부대찌개 전문점에서 부대찌개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윤배 씨가 통화하러 나간 사이 부대찌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미성 씨―그러니까 윤배 씨의 새로운 조원인 그녀와 나는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통화 길게 하네요”하고 내가 짧은 침묵을 깨자 미성 씨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게요. 애인인가?”하고 곧바로 내 말을 되받아주었다.

 윤배 씨한테 애인이 있어요? 아까 미성 씨 막 윤배 씨 어깨에 기대고 막 장난 아니던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취한 상태는 아니어서 다행히 “윤배 씨한테 애인이 있어요?”에서 멈췄다. “그럼요. 전에 한 번 봤는데 되게 좋은 사람 같더라고요.” 미성 씨의 웃는 모습이 윤배 씨의 ‘해맑음 모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해맑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많은 걸까.

 “희수 씨는 소설가 중에 누구 좋아해요?” 미성 씨는 내게 물었다. 소설을 좋아하냐고 먼저 묻는 게 예의가 아니려나. 어쨌든 번역 관련 강의를 신청했으니 소설은 당연히 좋아하리라고 단정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좋아하는 작가라. “근데 이 수업에서는 소설만 번역해요?”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야 인문 서적은 전문지식이 없으면 아무래도 접근하기 어려우니까요.”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소설이 아닌 책은 전부 인문 서적인 것일까.―‘인문학이 힘이다!’― “사실 좋아하는 작가 같은 거 딱히 없어요.” 미성 씨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도 그런데.”

 윤배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소주를 반병 정도 마셨다. 미성 씨는 “사장님 여기 육수 좀 더 주세요”했고, 사장님―알바생일 수도 있고―이 양은냄비를 들고 와 말간 육수를 부어주었고, 육수를 새로 부운 부대찌개가 채 끓기도 전에 미성 씨는 불어터진 떡을 국자로 뜨다가 국자를 떨어뜨렸고, 국물이 사정없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중 상당수의 국물이 내 흰 블라우스에 산개했다.

 “미안해요. 그러게 앞치마 있는데.” 그러면 진작 말씀을 해주시지 좀. 미성 씨는 내게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물수건으로 아까 테이블 닦지 않았어요? 그렇게 묻지 않았다. 아, 이런 건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몇 번 더 입고 버릴 옷이었는데 잘됐네요. 그렇게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미성 씨가 건넨 물수건을 손에 쥐고, 물기도 별로 없는 물수건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질 정도로 꽉 쥔 채로 나는 울었다.

 때마침 윤배 씨가 돌아왔다. 미성 씨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뒤늦게 부대찌개가 끓기 시작했다.

 

 윤배 씨는 미성 씨의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따로 연락 안 해요? 안 해요. 같은 조 아니에요? 같은 조 맞아요. 같은 조면 서로 연락할 일 없어요? 없던데요, 아직까지는. 해맑음끼리 내외해요? 그게 뭔데요? 아니에요.

 미성 씨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합정역 수업에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만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기왕이면 사과하고 싶었다. 만나더라도 수업은 듣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날이 추워서 기왕이면 밖에서 기다리느니 수업도 듣고 싶었다. 수업을 듣더라도 과제는 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기왕이면 과제를 해 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이번 주 과제는 각자 번역한 소설을 원문과 비교하지 않고 퇴고해오는 것이라고 했다. 윤배 씨는 지난주에 이미 각자 한 편씩의 번역 초안을 끝냈다는 사실도 덧붙여 알려주었다.

 갑자기 수화기 너머가 조금 소란해졌다. 그러고 보니 다리는 다 나았어요? 어제는 멀쩡하게 걷는 것 같던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별로 고맙지도 않은데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아직 아프다고 생각하면 조금 아팠고, 이제는 아프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 아프지 않았다.

 결국 돌려주지 못한 『꿈과 현혹과 문』을 다시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동료로부터 ‘연주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을 받은 남자가 자신의 동료를 총으로 쏘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까지만 읽었던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소설의 제목은 「흰나비 연주」 였다. 원제는 「The play of white butterfly」였는데, ‘흰 나비의 연주’라고 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하지 않은가 싶으면서도 ‘의’라는 조사가 생략된 게 왠지 세련된것 같기도 했다.

 첫 문장만 읽고서 으레 추리소설이겠지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지적받았다는 이유로 동료를 쏜 남자’, 그러니까 shot his band member just because the member pointed out his mistake한 the man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소설 말미에 어느 술집에서 연주하고 있는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그 소문의 당사자가 아닐지 주인공이 상상하는 장면이 있기는 했다. 그게 다였다.

 

 자신이 번역한 버전과 원래의 번역가가 번역한 버전을 비교해보세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 소설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서 이 문장을 이렇게 썼을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오래 고민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첫 문장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소설의 핵심을 담아놓았을 겁니다. 그래서 원문을 참고하지 말고 여러분이 번역한 문장을 퇴고해보라는 과제를 내드린 것이기도 하죠. 나아가 번역가는 이 소설의 핵심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서 이 첫 문장을 이렇게 옮겼을까, 그걸 생각해보는 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까지만 듣고서, 나는 강의 내내 내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장 선생―어쩐지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하게 느껴졌다―의 첫 문장은 ‘동료로부터’라는 단어로 시작해 ‘소문이 돌았다’로 끝났고, 나의 첫 문장은 ‘내가’로 시작해 ‘밴드 멤버를 쏘았다’로 끝났다.

 동료로부터…소문이 돌았다. 내가…밴드 멤버를 쏘았다. 그렇게 반복해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동료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뜻 같았고, 내가 밴드 멤버를 쏘았다는 뜻 같았다. 원문은… 원문의 첫 문장은 The rumor로 시작해 his mistake로 끝난다. 소문…동 료로부터…내가…밴드 멤버를…실수…쏘았다…꿈, 현혹…문…D, D, D.

 

 쉬는 시간조차 제공되지 않는 열성적인 강의 덕분에 수업이 끝난 뒤에야 미성 씨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미성 씨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죄송했어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성 씨는 왜 사과하느냐고 물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미안해서요.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지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미성 씨가 웃었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해야죠. 세탁비라도 준다는게 당황해서 잊고 있었네. 미안해요” 미성 씨는 가방을 뒤적였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윤배 씨가 뒤늦게 건물에서 나왔다. “뭐가 괜찮아?” 윤배 씨는 그렇게 물었다. 나도 미성 씨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미성 씨는 “오늘도 술 먹으러 가야죠? 희수 씨한테는 내가 살게요”하고 담뱃재를 떨어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술자리 제안에 윤배 씨는 의외로 조금 머뭇거렸다. 지난주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애인을 만나지 못해서 연말인 오늘까지 그러기는 좀…하더니 이내 자신의 애인이 동석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와 미성 씨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강의가 크리스마스이브 였고, 이번 주 강의는 올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성 씨가 웃었다. “그야 12월 24일이랑 12 월 31일은 딱 일주일 차이니까 언제나 같은 요일일 수밖에 없죠.” 그러네.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크리스마스이브에 부대찌개 집이 거의 비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한 해의 마지막 날 빈자리가 있는 술집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골목을 헤집고 다닌 끝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윤배 씨와 처음 만났을 때갔던 이자카야였다. 여기라면 내 애인도 어딘지 잘 아니까, 라며 윤배 씨는 웃었다. 이런 팔불출. 소갈머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사케가 아닌 생맥주를 주문했다. 여기 생맥주도 끝내주거든요. 윤배 씨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윤배 씨는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문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이 왁자한데도 용케 문소리를 듣는다 싶었다. 몇 잔인가 기분 좋게 마셨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두 사람에 양해를 구하고서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이 점점 많이 오고 있었지만 조금도 쌓이지 않고 땅에 닿자마자 녹았다.

 “우리 다시 잘해볼 수는 없는 거야?” 얘가 미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년이나 사귀었으니 한번 쯤은 연락이 와도 이상할 게 없겠다 싶었지만, 다짜고짜 다시 잘해볼 수 없겠냐니. 그럼 언젠가는 잘해본 적이 있다는 의미 같잖아. “야, 넌 그냥 오럴섹스에 미친 또라이잖아.”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난 네가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의 말이 진심처럼 느껴져서 놀랐다. 됐고, 새해 복이나 많이 받아라. 나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가게 안으로 돌아가 보니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보신각 주변의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카운트다운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통화하는 동안 일행으로 부터 뒤처진 취기를 따라잡기 위해 맥주를 들이켰다. 윤배 씨의 옆자리 의자에 백팩이 걸려 있었다. 나는 애인이 도착했느냐고 물으면서 백팩을 가리켰다. 윤배 씨는 자신의 애인은 방금 도착했고, 화장실에 갔다고 말했다.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중계 멘트가 흘러나오자 주방장이 나와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카운트다운이나 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새해가 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미성 씨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말했다. 그러게요.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즈음에 화장실에 갔다던 윤배 씨의 애인이 돌아왔다. 윤배 씨의 애인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매가 거의 모델 수준에 가깝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굉장하네. 짧게 기른 수염만 없다면 정말 미남일 거라고 생각했다. 윤배 씨한테는 과분해 보이는데? 윤배 씨가 통성명을 시켜주려 할 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카운트다운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방금 나에게 말했던 미성 씨가 가장 큰 목소리로 카운트 다운을 따라 외치고 있었다. 나는 취한 김에 큰소리로 카운트다운에 동참했다. 윤배 씨와 윤배 씨의 애인도 즐거워보였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수상소감

 오랜 휴학 끝에 복학하게 되었는데, 개강 후 한 번도 캠퍼스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나 평범해 모두가 기억할’이라고 붙여둔 제목이 우리의 일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히기도 하는 듯합니다. 종종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제는 그 일상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일상이 정말이지 너무나 평범해서 기억할 만한 것이었음을 생각합니다.

 읽고 쓰는 일이 결국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 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일깨워준 친구들에게 언제나 고맙습니다. 언제나 기꺼이 최초의 독자가 되어주는 유선, 내 소설을 기다려주는 하영의 이름은 따로 불러둡니다. 남은 고마운 마음을 고백할 기회가 있길 바라며 다른 이름은 아껴두겠습니다.

 부족한 소설을 좋게 읽어주신 신수정 선생님, 편혜영 선생님께는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더 좋은 소설로 존경하는 두 분 선생님께 보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믿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두분의 믿음이 두 분께 언제나 복되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태희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이태희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심사평

 바이러스로 인해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예년과 유사한 정도로 작품이 응모되어 무척 반가웠다. 백마문학상은 현재 한국 문학에서 가장 젊은 상상력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만큼, 발랄하고 젊은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들이 많았다.

 올해의 당선작은 「너무나 평범해 모두가 기억할」 이라는 작품으로, 예심 단계에서부터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의 활달한 스타일과 느슨한 연대 감각은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번역 수업을 듣게 된다. 옆자리에 동석한 윤배 씨로부터 책을 빌려 서툴게 번역을 시도하지만 기실 ‘나’의 관심이 번역에 있지도 않고 소설의 핵심 역시 번역에 있지 않다. 소설은 그저 번역 수업을 매개로 느슨하게 만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 번역 수업 후 ‘나’와 윤배 씨의 만남이 그 후 ‘나’ 와 윤배 씨와 미성 씨의 만남으로, 다시 ‘나’와 윤배 씨와 미성 씨와 윤배 씨 남자친구와의 만남으로 느슨하고도 우연적으로 지속된다. 이들의 평범하지만 인상적인 관계는 이 시대에 중요한 윤리적 화제가 된 ‘연대’ 와도 그다지 상관 없고 굳이 마음의 ‘형식’과 ‘내용’을 번역할 필요도 없는, 그저 한 시기를 공유하려는 의도 외에는 없다.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서로를 지나치게 환대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해맑게’ 한 시기를 함께 보내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가 아닌 자리였더라도 단박에 눈에 띌 만한 작품이었다.

 「쇼룸」은 세련된 스타일이 돋보였다. 생략과 비약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내밀히 전달할 줄 알고 서사를 약진하게 만드는 남다른 힘을 가진 작품이었다. 위태롭지만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나가려는 등장인물의 노력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 평온해 보이는 소설적 표면에 잔뜩 금이 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두 명의 작가들은 개성과 완숙도에 있어서 현재 한국 문단에서 제 몫을 하는 기성 작가들에 뒤지지 않았다. 머지 않아 이들을 좀더 넓은 문학의 장에서 만날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편혜영 교수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 (문예창작학과)
신수정 교수 (문예창작학과)
신수정 교수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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