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神弓의 나라로, 서거원(전기 78) 동문을 만나다〈10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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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神弓의 나라로, 서거원(전기 78) 동문을 만나다〈1069호〉
  • 김태민 기자
  • 승인 2020.04.13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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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양궁은 왜 이렇게 강한 것입니까?” 외신 기자들이 매 대회마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여기, 대한민국 양궁을 1984년 미국 로스앤젤 레스 올림픽 이후 약 30년간 세계 최정상으로 올려놓은 주인공이 있다. 우리나라 양궁이 오랜 기간 동안 최정상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서거원(전기 78) 동문을 본지가 만나봤다.

 

축구선수에서 전기공학도, 그리고 늦깎이 양궁선수로

Q. 고교시절까지 축구선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양궁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축구는 조직적 시스템이 중요한 종목이에요. 그래서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전략에 따라 포지션이 정해지는 종목이죠. 저는 거기에 싫증을 느꼈고 ‘이제 운동은 그만하고 공부를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축구를 그만두게 됐어요. 축구를 그만두고 나니 마음 한 켠이 허전한 것 같아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자는 생각에 종로 3가에 위치한 낙원 악기 상가에 갔어요. 거기서 진열된 양궁 활을 우연히 보게 됐고, 순간 빠져들어 충동적으로 활을 구입하게 됐죠. 판매하지 않는 물건이라고 했는데도, 사정을 해서 구입했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그때부터 취미삼아 양궁을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대중에게 양궁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미국에 있던 지인을 통해 양궁 관련된 책자를 받아 독학했어요. 그렇게 양궁을 접하다 보니 양궁계에서 ‘양궁에 완전히 미친 공대생 하나가 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그러던 중 한국 최초의 양궁 실업 팀인 삼익악기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고, 창단 멤버로 입사하게 됐죠.

Q. 대학에 다니면서 삼익악기 양궁팀에 입사하셨어요. 공대생이 양궁 선수를 시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삼익악기 양궁팀에 입사하기 전까지 6개월 정도 양궁을 했어요. 물론 취미생활로요. 취미로 양궁을 하던 저에게 숙식제공, 출전비 지원과 급여까지 준다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삼익악기에 입단했죠. 팀에 입단하고 나서야 체계적으로 양궁을 배울 수 있었어요. 선수생활을 시작한 뒤부터는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연습하느라 밤 10시 이전에 자본 적이 없어요. 손가락이랑 입술이 다 찢어졌을 정도니 정말 양궁에 미쳤었네요. 그러다 보니 좋은 기록이 나올 수 있던 것 같아요.

Q. 갑자기 시작하게 된 양궁, 주변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시작할 때는 양궁에 미쳐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어요. “정통 양궁 선수가 아니다”, “공대생이다”, “대학 와서 취미로 양궁 시작한 놈이야”라면서요. 그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죠. 이후, 최연소 국가대표 코치가 되고 좋은 성적을 만들어 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낸다”라면서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정말 힘들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좌절을 느꼈어요. 그런데 주변의 시기와 비난이 오히려 양궁에만 몰입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너희는 어릴 때부터 운동했다면서 왜 나보다 못하는데? 나보다 잘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더 투지를 불태워서 운동했어요.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이런 힘듦이 오히려 양궁을 더 잘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서른둘의 양궁 국가대표팀 감독

Q. 서른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셨는데, 지도자가 되기로 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당시에 저는 대학을 중퇴한 상태였고, 실업팀 생활을 하다 보니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지도자밖에 없었어요. ‘그래 양궁에 승부를 한 번 걸어보자’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어요. 비록 주변 친구들이 받는 급여의 70%도 되지 않았지만,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했죠. 고졸 신분이고, 운동만 했는데 은퇴하면 뭘 하겠어요. (웃음)

Q.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팀 감독, 쉽지만은 않았을 거 같은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82년, 83년에는 코치 겸 선수로 뛰었어요. 또, 선수 당시 여러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면서 좋은 성적이 나오다 보니 인정을 받아서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된 거죠. 당시가 양궁 초창기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도 선배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도 선배들을 제치고 최연소로 대표팀을 맡다보니 기존에 있던 양궁 지도자 사이에서 시기와 견제, 모함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비난 때문에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다는 열정이 커졌고,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사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제가 여자팀 코치로 발탁 됐는데, 이미 여자 양궁은 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정상의 자리에 있었어요. 당시 남녀 선수들이 같이 연습하고 있는데도 온갖 스포트라이트는 여자 양궁에만 집중돼 있다보니 남자 선수들은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그게 너무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쁜 거예요. 또, 제가 지도자들 사이에서 정통 양궁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남자팀을 맡아서 남자팀을 정상의 자리로 올려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래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 양궁 국가대표팀을 맡았어요.

Q. 감독을 맡은 남자 양궁 국가대표팀의 88 서울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첫 무대에서부터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어떠셨나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겼어요. 남들이 한 번도 이뤄내지 못한 일을 제가 이뤄낸 거잖아요. 당시 남자 양궁은 예선 탈락 수준이었어요. 중간도 못 가는 팀이 올림픽이라는 세계무대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수상할 수 있게 만든거죠. 그 이후에도 세계 선수권, 아시안게임,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많이 수립했어요. 1년 동안 제가 세계신기록을 21번 갈아치울 정도로 말이죠. 그 이후로 ‘열정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생각과 자신감을 가지게 됐어요. 또, 선수들도 저를 믿고 따라올 수 있는 계기가 됐죠.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이전에 하던 프로그램들에 더 자신이 생기고 더 적극적으로 선수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의리 하나로 시작한 도전

Q. 오랫동안 몸담았던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된 후, 선수들을 위해 국가대표 감독직을 내려놓으셨는데,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신 건가요?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덕목은 신뢰라고 생각해요. 선수들과 리더 간에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 조직을 이끌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선수들을 그렇게 이끌어왔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 급여는 적지만 선수로서 성공하려면 삼익악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 았어요. 그런 인식을 심어준 데에는 지도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어요. 저는 선수들에게 항상 투명하게, 공정하게, 원칙대로, 차별하지 않으면서 믿고 따라올 수 있는 신뢰를 만들어왔어요. 그런데 94년도에 제가 감독으로 있었던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됐어요. 94년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 국가대표 감독을 겸직하고 있을 당시 “회사가 어려워서 해체해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는데, 청천벽력이었죠. 그때 국가대표 선수 8명 중 삼익악기에 소속돼 있었던 선수가 2명이나 있었어요. 오전에 세계 신기록, 오후에 세계 신기록, 개인전 1, 2, 3등, 단체전 우승까지 완전히 대회를 휩쓸고 있었는데 이런 소식이 들렸던 거예요. 그래서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보낼 수 있게 시간을 주시라”고 부탁을 했죠. 그래서 해체까지 5개월이라는 시간을 얻었어요.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선수들에게 “팀이 해체될 예정이니 최대한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팀으로 가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한 선수가 “우리는 다른 팀 으로 갈 수 있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두 명은 은퇴를 해 야 할 것 같습니다. 감독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업팀을 하나 만들어서 다 같이 가시죠”라고 역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국가대표 감독을 하면 일요일 하루만 쉬는 날인데, 언제 누구를 만나서 팀을 만들 수 있겠어요. (웃음) 그래서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죠.

Q. 새로운 팀을 만드는 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국가대표 감독직을 내려놓고 급여도 받지 못한 채 생활한 기간이 무려 16개월이에요.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16개월 동안 월급 못 받는다고 선수들 놀게 하면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 사비를 털어서 시합출전비, 식비, 숙소비, 생활비를 충당했죠. 국가대표 감독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 그 당시 돈으로 4천만 원을 전부 다 사용했어요. 그리고도 부족해서 88년 서울 올림픽 때 상금으로 사둔 천 평짜리 노후용 땅을 팔아서 그 돈도 거의 다 썼어요. 그때 너무 힘들어서 죽을 생각도 했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동해안에 갔었는데 그냥 돌아온 기억이 있네요. (웃음) 그 16개월 동안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과는 부자지간처럼 인연을 맺고 아직도 이어오고 있어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팀으로 갈 수 있는 선수들도 있었는데 저를 믿고 따라온 거잖아요. 당시 16개월이 10년 넘게 살아오며 느낀 모든 고통보다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 경험이 제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됐어요. 어떤 역경이 와도 다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결국, 16개월 만에 삼익악기 양궁팀 선수 모두와 계양구청 양궁팀을 창단하게 됐어요.

Q.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지금도 그 상황이라면 또 사표를 낼 거예요. 항상 선수들을 책임지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니까요.

 

神弓을 키워낸 서거원 감독

Q. 우리나라가 양궁 최정상인 것은 피에 흐르는 양궁 DNA 덕분이라는 말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요. 활 잘 쏘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생각해보세요. 양궁은 서양 활이에요. 서양인들이 체격도 좋고, 파워도 좋죠. 또 양궁 활은 그 사람들에게 맞게 설계된 활이에요. 동양 사람들한테는 맞지 않는 활이고, 작은 키와 적은 파워로 그 큰 활을 쏴야 하는데, 서양인들보다 더 잘 쏘고 유리하다? 말이 됩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Q. 감독님께서 UDT 훈련, 공동묘지 담력 키우기, 코린트 운하에서 번지점프 등 특별한 훈련을 많이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신데, 이런 훈련은 어떻게 개발하신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양궁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시각으로 양궁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양궁을 했으면 전혀 보지 못했을 부분들이 보이더라고요. 초창기에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비과학적이다’, ‘왜 저런 훈련을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런 점에 대해 메모해두었던 것들이 지도자 생활을 할 때 도움이 많이 됐죠. 앞으로 스포츠 과학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 양궁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도자를 준비하는 시간에 많은 것들을 구상하고 과학적인 훈련방법을 개발했어요. 체육과학연구원에 매일 찾아가서 스포츠 심리학, 생리학, 역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박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죠. (웃음) 연구원들과 ‘이런 훈련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결과가 도출될까’와 같은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고, 많은 실패도 겪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개발한 훈련 방법들이 지금도 한국 양궁에서 이용되고 있어요.

 

서거원이 후배들에게 주는 조언

  저는 네 가지 키워드를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것은 스포츠도 마찬가지이고, 대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이야기예요. 첫 번째는 적어도 10년 정도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이 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고민해보자는 거죠. 고민하다 보면 뭔가 집히는 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결단을 내리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키워드인 결단력이에요. 세 번째 키워드는 실행력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고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행동하는 2%가 생각만 하는 98%를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했으면 실행하세요. 네 번째 키워드는 지속력입니다. 내가 해보겠다고 결심하면 적어도 10년 정도는 미쳐보자는 거죠. 미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은 한 번 해보자고 물고 늘어지는 악바리 정신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 네 가지 키워드는 꼭 가슴에 안고 사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앞길을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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