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
지난 3일, 철도노동조합이 벌인 사상 최장기간 파업이 끝났다. 지난달 26일부터 시작돼 일주일간 지속된 이번 파업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철도노동조합과 코레일, 정부가 사태의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려 애쓰는 사이 피해액과 시민들의 불편은 늘어만 갔다. 지금으로서는 원하는 것을 얻은 쪽은 정부뿐인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 강경대응으로 철도노동조합은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파업을 철회했다. 정부는 강경대응 기조의 ‘성공’이라며 자축하겠지만, 성공이라 말하기엔 좀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수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홍세화씨는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를 우리에게 소개시켜줬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관용’, ‘이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똘레랑스의 반대말이 ‘앵똘레랑스Inolerance’다. 정부가 이번 파업에서처럼 ‘앵똘레랑스’로 일관한다면 정부와 노동조합은 철도 레일처럼 평행선만을 그리며 달려갈 것이며 수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선 안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코레일도 ‘파업 중 대화 불가’의 원칙을 내세워 철도노동조합의 대화 시도조차 무시했다. 이번 파업처럼 대화 없는 대립은 결국 ‘직접적인 힘과 힘의 대결’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필자가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던 시민에게 프랑스 기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자 “파업을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파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던 대목이었다. 우리에게도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발만 뒤로 물러서서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똘레랑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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