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비문해 여성 노인, 어떻게 살아지는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비평 부문 가작) 〈1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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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비문해 여성 노인, 어떻게 살아지는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비평 부문 가작) 〈1066호〉
  • 윤종환(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 학생
  • 승인 2019.12.13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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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해 여성 노인, 어떻게 살아지는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1. 최소 문맹률 국가 담론의 내부 배제

 

지난 10월 9일, 573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텔레비전과 뉴스, 신문에는 온갖 한글 기사들이 쏟아졌다. 10월 2주차는 마치 한글 민족의 축제기간 같은 상징이 되었다. 이번 년도만의 상황이 아니다. 매년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국가’류의 기사가 타임라인을 가득 채운다.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글의 습득 용이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이제는 세계화 시대라며, 외국인들마저 한글을 아주 쉽게 배우고 쓴다는 인터뷰까지 송출된다. 이러한 보도들은 우리를 하나의 언어공동체로 묶어주며, 누구나 글을 읽고 쓰며 소통한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서로 간 한국어 사용의 영광을 축하한다.

매년 축하가 거듭되는 가운데 ‘최저 문맹률 국가’는 하나의 상징적 담론이 되었다. 이 담론은 초·중등의 정규교육 과정에 반영돼 근대 이후의 국민정서를 통합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 결과 한국을 국민 정체성으로 습득한 성원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우수한 모국어를 배울 수 있는 행운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특히 2000년대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구성원은 이러한 ‘최저 문맹률’이라는 국가 내부 담론에 익숙한 세대이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문맹률 제로 프레이즈는 이들 세대에 전혀 어색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명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역이나 대우 관계는 상정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문맹’은 이미 퇴치된 것, 박멸된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더 이상 ‘흑사병’이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위협적인 병명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문맹’이라는 말 역시 꺼림칙함을 넘어 역사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린 용어가 되었다. 이렇듯 최저 문맹률 국가 담론은 우리에게 깊숙이 침투해 우리의 언어와 사고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헌대 한국인은 ‘문맹’이라는 단어의 실질적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 성찰이 없으니 고민도 없다. 오히려 ‘문맹률 0%’ 프레이즈를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숨을 쉬는 것과 같이 본질적이며 생득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한글 사용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체화한 상황에서 담론은 힘을 얻었다.

위와 같은 언어민족·국가주의적 담론은, 해당 사회의 한글사용이라는 일반적 현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유효하다. 하지만, 담론지배적인 사회문화는 개별적 성원과 미시적 주체의 역사를 은폐·망각하기 쉬우며 극단적으로는 내부배제(Exclusion from inside)를 낳는다.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짙은 사회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소거되며 그 내부에서 소외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문맹률 최저’는 일반 언어 이용자의 무한 자긍심을 고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모퉁이에서 ‘문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약자를 소외시킨다.

특히, 이 국가에서는 ‘비문해 여성 노인’이 그러하다. 이들 대부분은 2019년 현재 70세 이상의 여성 노인으로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비문해로 전락한 소외자이다. 통계조사에 따르면 2008년 전국 비문해자 수는 623,626명이었으며 그중 남성 비문해자는 98,625명(15%)인 반면 여성 비문해자는525,001명(85%)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연령별 비문해 수는 70대 369,111명(60%), 60대 203,532명(32%)로 60대 이상이 92%를 차지했으며, 50대 42,459명(6%)로 급감하였다.1) 조사당시(2008년) 기준 50대(1948~57년생)는 문교부가 1946년 문맹퇴치운동을 위해 설치한 공민학교가 1947년 전국 8,000여개로 확대됨에 따라 보통학교 및 공민학교에서 한글 교육을 이수할 수 있던 세대다. 1942년 12월 교육법이 공포됨에 따라 공민학교가 국가 교육과정으로 편입되어 1948~57년생 이후부터는 어린이·아동기부터 문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 세대는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을 경험했고 교육적 인프라가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문해율 차이에서도 급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다. 이들 세대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별개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문해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며, 그중에서도 여성은 남아선호사상과 남성중심이데올로기,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같은 관습을 이유로 최소한의 한글 교육 기회마저 박탈당한 집단이다. 이 집단이야 말로 사회구조적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역사와 사회적 폭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다. 그리고 이들은 거대해진 한글-언어민족주의와 최저 문맹률 국가 담론에 가려져 점차 사라져가는 중이다. 논외로 할 것도 없이 논외라고 규정되어진 적도 없는, 가려진 소외자로 남겨져 있다.

문맹은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름. 또는 그런 사람(국립국어원)”으로 정의된다. 이른바 기회 부족으로 인해 문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UN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는 1956년부터 이 ‘문해력’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기초적인 능력을 말하는 ‘최소 문해력’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인 ‘기능적 문해력’이다. 후자가 전자를 전제한 개념임을 고려할 때, 문맹은 ‘배움의 기회가 없어 최소 문해력이 없는 사람’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본고에서는 공민학교 및 보통학교의 국민 문해 교육을 제도적으로 이수 받지 못했던 1950년대 이전 출생 세대의 여성을 ‘비문해 여성 노인’이라고 명명하며 이들은 최소 문해력 결핍 상황에 놓여있다고 본다. 또한, 문맹의 발생이 사회구조와 관습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이며, 이들의 생애는 구조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야할 것임을 밝힌다.

 

2. 성원권 없는 존재의 타자성

 

한국의 ‘비문해 여성 노인’은 사회구성원에게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원권’이 없는 존재다.1) 일차적으로 비문해 여성 노인은 최소 문해력이 없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기존의 주류사회가 계약하여 만든 언어 질서를 이해하기 힘들며 그에 따라 ‘인정’을 받지 못한다. 모든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듯, 개인의 정체성 수립과 실현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의 역할’이다. 자기 정체성의 실현은 독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의 의사소통을 통해 가능하다.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인정을 통해 ‘자기 주인됨’의 권리를 갖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그에 반해, 비문해 여성 노인은 자기 주인 됨의 권리를 갖기 힘들다. 소통의 가장 기본 단계인 최소 문해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적으로 구어(입말)로서의 소통에 만전을 기하지만, 어떤 형태로의 문어(글말) 또는 문자를 마주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마주하는 현실이 내보이는 언어 체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며, 그 체계가 당사자의 시선을 압도하며 몰아닥치기 때문이다. 또한, 관공서에서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신청서 작성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대표 질서체계인 행정과 법률이 모두 언어로 구성된 사실을 고려하면, 비문해 여성 노인은 평생을 ‘관’과 ‘법’에 자신을 접속시킬 수 없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자기 삶을 구성하는 시스템에 접속·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존재이다. 그리고 이 타자화의 폭력성은 매 순간 어느 공간에서든 끊임없이 작용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문자를 읽어낼 수 없는 근본적 한계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개인의 위치 인식도 불안정해진다. 이처럼 비문해 여성 노인은 일반 성인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절차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에게 한글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의 창살 같은 것이며, 이동식 감옥을 형성하는 긴밀한 무형의 기호들이다.

성원권을 획득하는 가장 첫 단계인 ‘인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은 ‘이름’을 불리는 것이다. 이때 이름은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인데, 비문해 노인 여성은 탄생과 함께 고유한 이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명으로 불리며 살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할머니”라는 보통 명사로의 삶을 살아왔다.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자신의 이름을 자필로 드러낸 경험이 생의 대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통용하는 보편적 명칭인 “할머니”로 불려온 것이다. 시인 김혜순은 저서 『여성: 시하다』(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이와 같은 보통명사로서의 여성의 삶을 “이름이 없으므로 폐기되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진 구조적 폭력의 결과로 본다. 그리고 이 폭력에 억압당한 여성을 “호모사케르”라고 일컫는다. 시인의 지적은 비문해 노인 여성이 “할머니”로 불리며 일생을 살아온 것이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며, 그렇기에 이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올 수 없었음을 환기한다. 이른 바, 내부적으로 배제된 삶을 영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들은 나아가 자발적으로 ‘권리 없음 인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문해 여성 노인은 그들의 문맹이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기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비문해자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3) 일찍이 현대인으로부터 외면되어 살아온 이들은, 한글로 인한 뚜렷한 경멸이나 멸시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수치를 느낀다. 그리고 이들의 감정은 견고한 현재의 사회구조에서 더욱 견고히 은폐됐으며, ‘최저 문맹률 국가’라는 민족주의적 한글 담론 아래서 형상화될 수조차 없었다. 이들의 비문해 경험은 분명 시대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폭력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발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시대의 “할머니”들은 스스로 폭력의 피해자임을 증언할 수 없다는 자기 검열에 도전받는다. 주류 사회의 성원은 이들의 숨겨진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세대 비문해 여성 노인은 주체도 객체도 아니게 된다. 이들이 언제인가 마치고 또 다른 새 세대로 전환된다면, 그 존재는 보편적 역사 밖으로 잊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비체의 삶은 ‘장소 없음’4)과 맞닿아 있다. 비문해 여성 노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장소 없음’을 느낀다. 우선 그들에게 가정 밖은 온통 낯선 문자로 가득한 세계다. 개인이 자리하는 공간에 대한 실질적 인식이 없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현상은 해당 공간을 개인의 체험의 장소로까지 확장하지 못하는 장소 없음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거리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한다. 거리로 나가는 순간부터는 불안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데, 이미 정신적·신체적으로 쇠약한 상태이므로 이겨내는 데에 꽤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라는 보통명사로서 구성원에게 인정받지 못함을 인지할 때 비롯되는 ‘장소 없음’이다. 70세 이상의 비문해 여성 노인은 전쟁과 남성중심구조의 폭력으로부터 학습의 자유를 억압당한 데서 생긴 정신적 외상(trauma)을 입은 채 반 세기 넘게 살아왔다. 이들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는 계약에 진입할 수 없었으며, 그것이 삶의 후반부까지 오랜 시간을 지속하여 지금까지도 구성원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타자가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곳은 ‘길이 나’ 있음에도 ‘막혀 있는 길’이나 다름없다.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상황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장소 없음의 증거이며, 이들에게 늘 먼 타자인 우리는 비문해 여성 노인의 장소 없음에 대한 또 다른 실증물이다.

 

3. 여전히 무지한 존재들 사이에서의 생애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들 생애에 관하여 ‘무지’하다. 이 무지는 거대 담론의 베일에 가려진 채 은밀히 근대 국민의 정서에 침투한다.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무지는 그 집단에 대한 인정의 부재를 낳고, 인정의 부재는 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를 멸시하게 만들고, 그들 존재 가치를 왜곡시키며 심지어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5)고 주장했다. 비문해 여성 노인의 삶은 복잡한 사회적 제 관계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인류사에 대한 무지는 이들의 사람됨을 은폐하고, 이들을 무장소로 내몰았다. 우리들의 무지가 이들이 사회적 환대를 경험치 못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다. ‘모든 21세기 국민이 한글을 다 안다’는 상상된 공동체 정신은 이들 존재를 왜곡하였으며, “할머니”라는 보통명사로 이들 개인의 주체성과 주인됨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가 인정해온 것은 정작 우수한 민족의 언어로서 한글이 ‘최저 문맹률’을 기록했다는 허구일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 시스템으로 가동되어 인간 소외를 낳았고, 비문해 여성 노인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수십 년 째 고립되어 있다. 10월 2주차의 세계는 그 고립을 우리의 인식 밖으로 넘겨버리는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지금도 비문해 여성 노인의 삶은 조명 받지 못 한다. 이들이 언론에 비춰지는 시기는 어버이의 날 즈음이나 한글날 즈음이다. 하지만 이들을 다루는 것과 이들을 어떻게 언론에 보여주는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언론은 ‘성인 문해 교실’을 다루며 이들의 인류사, 개인사와 그 이면의 고통을 보도하지 않는다. 한글 교실을 다니는 극소수 여성 노인이 드디어 한글로 손자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다거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수 있게 됐다는 희망적 메시지의 글이 가득할 뿐이다. 이러한 프로그램 홍보와 같은 미디어의 긍정 편향 기사는 ‘여전히 최저 문맹률에 앞장서는 국가’ 시스템을 견고하게 할 뿐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느 언론사든 미화만을 전달하기 바쁘며, 자랑스러운 한글 미화를 위해 소수자의 말 못할 고통은 배경화 되었다.

현실에서는 비문해 여성 노인의 학업 수요가 꽤 되지만 교실 운영 기관에 내려지는 예산 문제로 인원 확충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당 강사에 대한 대우와 급여도 부족할 실정이어서, 한글 교실에 참여하는 강사들이 이른바 ‘열정 페이’로 봉사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는 해당 기관의 한글 교실은 극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예산을 늘리지 않거나 투자 하지 않는 것 또한 일상적인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성인 문해 교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소외된 이들의 존재를 고스란히 반증하는 셈이다. 이 장소의 의미는 비문해 여성 노인에게 간절한 기회,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치유 과정이면서 생생한 고통 경험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의 의미는 각종 매스컴에 의해 ‘최저 문맹률’을 위한 장치로 사라질 뿐이다. 전체를 향한 거대 담론의 맥락 안에서 복잡 미묘한 감정과 고통, 미시적 인류사는 소거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감히 따르자면, 비문해 여성 노인에게 진정한 ‘삶’은 없다. 이들은 애당초 없었으며,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는 채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기 때문에 사는 것이며 “할머니”로서 사라질 뿐이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을 짧은 글로 옮길 수 있으며, 누군가와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한국에서 당연한 일일까. 우리는 당연한 것들이 폭력이 된다는 것을 아는 시대에 사는데, 가장 당연한 언어 사용과 그 언어의 변두리는 생각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는 당연함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무지’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무지를 감싼 베일을 들춰내야 하는 일을 지나치게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지금도 이들의 삶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1)다음의 두 자료를 참고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민기초문해력조사:성별 비문해율, 국가통계포털, 2008. 문화체육관광부, 국민기초문해력조사:연령별 비문해율, 국가통계포털, 2008.

2)이 성원권은 김현경이 제시한 정의와 비슷한 맥락에 놓여있다. 그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도덕적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며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성원이 된다는 것으로 보았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31쪽 참고.

3)허영숙·기영화, 노인여성학습자의 문해교육 참여에 관한 연구, 한국평생교육·HRD4, 숭실대학교 한국평생교육·HRD연구소, 2008, 50.

4)김현경은 저서에서 여성은 자신이 그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라는 느낌, 언제나 더럽다는 비난을 들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보며, 이를 장소 없음인식이라고 명명하였다. 김현경, 위의 책, 288-291쪽 참고.

5)Charles Taylor, Multiculturalism (Examining the Politics of Recognition), Princeton Univ. Press, 1994, 25-27p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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