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리무버블 러브 (소설 부문 가작) <1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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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리무버블 러브 (소설 부문 가작) <1066호>
  • 윤수빈(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
  • 승인 2019.12.1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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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버블 러브

 

새로 이사한 집의 문을 열자 휑한 창문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 창문에 달려 있어야 할 암막 커튼이 없었다.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집 주인은 암막 커튼따위야 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갑작스러운 이사에 전 재산을 보증금으로 보낸 수진에겐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줄곧 비슷한 방에서 살아온 그녀의 직감으로는 커튼 값으로 최소 오만 원은 생각해야 했다. 가로등과 창문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저렴한 커튼으로는 가려질 리가 없었다.

나흘 전, 수진은 중개업자와 함께 이 집을 보러 왔다. 인근의 좁은 집들을 여럿 보고 온 그녀였지만, 문을 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좁다,라고 읊조리게 한 집은 이 집 뿐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었다. 방 안엔 아기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아기 때문에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와서 보세요.

수진의 뒷목이 뻣뻣해졌다. 여자의 목소리가 소녕과 비슷했다. 수진은 신발을 조심스레 벗고 방에 들어섰다.

세 평 짜리 방의 오른쪽 벽에는 창문이 길게 나 있었고, 검은 커튼이 양쪽으로 끈에 묶여 있었다. 정면의 벽은 하단에 꽤 큰 유아용 학습 벽보 두 장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왼쪽에는 화장실 문이, 그 옆에 가스레인지, 개수대와 작은 냉장고가 일렬로 있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커튼을 만져보았다. 손에 검댕이 묻어 날 것만 같이 검었고 매우 두툼했다. 오후 4시가 막 지난 때 였음 에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밝았다.

빛이 하도 잘 들어와서 낮에는 등을 안 키고 살았어요.

여자가 말했다. 수진은 저녁에 다시 와보겠다고 했다.

이 앞에 가로등이 있던데, 밤에는 빛이 얼마나 들어오는지도 좀 봐야 하구요….

말끝을 흐렸다. 여러 매물 중 이 집이 가장 저렴했기 떄문에 딱히 다른 선택권은 없었지만, 이 집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따로 안 와보셔도 돼요.

여자가 커튼을 쳤다. 방 안에 어슴푸레하게 백색 빛이 퍼졌다. 2구용 소켓이었지만 끼워진형광등은 하나였다.

이 커튼은 놓고 갈거에요.

단호하고 낮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수진은 여자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순간 소녕이 떠올랐다. 여자와 같이 검은 눈,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머리, 작은 체구와 미세하게 올라선 입꼬리까지 오롯하게.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커튼을 꽉 쥐었다 놓았다.

그걸 계약서에 써 놓았어야 했는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더니, 역시 눈동자가 검은 사람들은 속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조금 퇴색했다. 곧 가로등이 켜질 것 같았다. 수진은 우선 짐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짐이라고 해 봤자 박스 다섯 개가 전부였다. 박스들을 신발장에 높이 쌓아두었다. 그것들을 놓을 마땅한 곳을 찾다 보니 가운데 벽 군데 군데 무언가 붙어있었다. 벽에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보았다. 각양각색의 스티커였다. 특이하게도 하나같이 일부분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떼어내려다 실패한 것처럼.

손톱을 세워 살살 긁어보았다. 눌어붙은 스티커들은 가장자리를 긁어내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마저도 조금 떼어지나 싶으면 코팅지만 죽 벗겨졌다. 수진은 구부정한 자세로 한참이나 벽을 긁었다. 포기하려는 찰나, 벽 위로 누런 빛이 드리웠다. 가로등이 켜졌다.

방을 가득 채운 불빛에 누더기 같은 스티커의 잔해는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그녀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저린 다리를 주물렀다.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여지껏 신발장에 방치 해 놓았던 짐들을 오른쪽 벽, 창문 아래에 일렬로 놓았다. 다행히 그 길이가 벽의 폭과 꼭 맞았다. 그리고는 방 한 가운데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방을 훤히 비추는 가로등 불빛 때문이었지만, 소녕과 같은 침대를 쓰는 동안 늘 벽 쪽에 붙어 자던 습관도 한 몫 했다. 커버도 없이 푹 꺼진 스펀지 베개와 홑겹 이불을 들고 오후 내내 쪼그려 앉아있던 가운데 벽 앞에 모로 누웠다. 화장실 문 틈 사이로 냉기가 흘러나와 그녀의 뺨을 움켜쥐는 듯 했다. 노란 빛은 색감과 달리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그녀는 벽과 더욱 가까이 붙었다. 벽에 자신의 몸으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는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몸이 움찔 거릴 때 마다 누런 빛이 비좁은 그늘을 갉아 먹었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스티커의 잔상이 낡은 어둠 속에서 허옇게 아른거렸다. 결국 수진은 밤새도록 벽을 긁었다.

 

가로등이 꺼지고 해가 떴다. 밤을 새운 수진은 스티커를 긁던 손톱으로 눈곱을 대충 떼어냈다. 박스에서 여러 벌의 회색 맨투맨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두 벌을 화장실 앞에 던져두고 세 번째 옷을 입었다. 감청색 바지를 마저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어제 헤매던 골목길들을 돌아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교통이 편리하다더니, 정류장에 서는 버스는 총 8대였지만 정작 수진이 타고 출근할 수 있는 버스는 단 한 대 뿐이었다. 십 여 분 가량 기다린 뒤에야 저 멀리 버스가 보였다. 지갑을 꺼내는 손이 허옇게 터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길이 막히는 바람에 십 분 정도 지각했다. 평소 십 분 일찍 도착하는 그녀를 칭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각한 그녀는 건물 로비부터 자신이 근무하는 회계 팀 사무실에 도착 할 때 까지 수 차례의 지적을 받았다. 그럴 때 마다 수진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사 층 짜리 작은 회사에 근무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힌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공기를 나눠 마시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탈 때마다 원하는 층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도 자신에게 말 걸지 않기를, 인사조차 하지 않기를 속으로 수백 번은 빌 것이다. 물론 회색 벽과 거울 사이에 있는 회색 옷차림의 수진에게 말을 걸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와 정 반대로 어색함을 못이기는 부류의 인간이 회사에 한 명 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회계 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왼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얼굴을 뒤덮었다. 지난 주에 나희가 사다 놓은 가습기였다.

선배가 웬 일로 지각을 다 해요?

나희야, 이거 위치 좀 바꾸자.

수진이 비품 선반 가장 위에 놓인 가습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왜요, 사무실 왔다 갔다 할 때 마다 소독약처럼 맞으면 얼마나 좋은데.

난 필요 없으니까, 네 자리에 놓고 혼자 다 쐬던지.

안돼요, 사무실 내 습도가 일정해야 피부에 좋단 말이에요. 선배는 태생적으로 피부가 좋으니까 그런 거 모르죠.

수진은 대답 없이 팀장에게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괜스레 뺨을 한번 매만져 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 있었어요?

두 사람의 책상은 나란히 붙어있었다. 나희가 몸을 한껏 뒤로 젖혀 칸막이 뒤로 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딱히.

대답 한 찰나, 나희의 의자가 기우뚱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말 그대로 우당탕 소리가 났다. 너, 언젠가 한 번은 그럴 것 같더라니.

수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팀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나동그라진 나희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문득 나희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인형들과 색깔 별로 모아 꽂아 놓은 펜들, 여기저기 붙어있는 아기자기한 메모지들과 각양각색의 스티커들. 수진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나희를 붙잡고 물었다.

너 혹시 스티커 떼는 방법 알아?

 

스티커 위에 용액을 충분히 분사한 후, 5~10분 정도 불려준 뒤 가장자리부터 긁어낸다.

사용법 그대로 스티커 자국 위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액체가 벽을 타고 주르륵 흐를 때 까지 뿌렸다. 수진은 제 다리를 그러안은 채로 메트로놈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잠시 후 시간을 확인한 뒤 제일 큰 스티커부터 긁기 시작했다. 가장자리는 얼추 떼어지는 것 같더니, 긁으면 긁을수록 이상하게 회색이 됐다. 용액에 울어버린 벽지가 찢겨 콘크리트가 드러나는 거였다. 옆의 다른 스티커 자국을 긁었다. 역시 얇디 얇은 벽지가 스티커와 함께 찢겼다. 잔해가 방바닥으로 때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틈 사이를 들춰보았다. 습기 때문에 벽지가 이미 벽에서 손톱 만큼이나 떠 있었다.

수진은 사진을 찍어 나희에게 보냈다.

벽지가 같이 찢어졌어.

헉, 그럼 도배를 다시 해야 하나? 아니면 포인트 시트지 같은 거 사서 붙여서 가리세요! 요즘 예쁘게 잘 나와요!! 다이소에도 있긴 한데 디자인은 인터넷이 낫고요. 시간 여유 좀 있으시면 인터넷에서….

카톡을 읽다 말고 지갑을 챙겨들었다. 휴대폰 화면에 나희가 보내는 링크가 몇 번 깜빡였다.

집에 돌아온 수진은 시트지를 펼쳐보았다. 회색 바탕에 잔 줄무늬가 있는 거였다.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그나마 가장 무채색에 가까웠다. 시트지의 가장자리를 조금 떼어 벽 하단 끝에 맞췄다. 끝부터 눌러가며 벽의 중간까지 거침없이 붙였다. 그녀는 그제서야 집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랫부분이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저 붙여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떼기로 결정했다. 벽이 지저분한 건 이 집의 문제지만, 비뚜름하게 붙은 시트지는 자신의 문제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시트지를 조금씩 떼어냈다. 벽이 보이지 않아서 시트지 뒤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그 고요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벽지 찢어지는 소리가 지하 방에 울렸다.

시트지를 다 뜯어낸 벽의 모습은 수진을 침묵하게 했다. 벽에서 떠있던 벽지의 상당 부분이 그녀가 구겨버린 시트지에 엉겨 붙어 있었고, 원형 탈모 자국처럼 훤히 드러난 콘크리트 벽은 실금이 가 있었다. 수진은 창문 아래에 있던 짐들을 가운데 벽 쪽으로 옮겼다. 박스 두 개를 쌓아 놓으니 지저분한 벽이 얼추 가려지는 듯 했다. 스티커 제거제와 시트지 대신 암막 커튼이나 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가로등 불빛과 함께 수진을 에워쌌다. 어쩔 수 없이 오른쪽 벽에 붙어 길게 누워보았다. 발 끝이 신발장에 닿았다. 엄지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문득 신발 놓는 곳에 발을 걸치고 뻗었던 소녕이 떠올랐다. 그날 소녕은 발목을 휘감고 있던 구두 끈을 잡고 몇 번이나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침대를 향해 기었다. 수진이 먹던 치킨을 내려놓고 소녕에게 다가갔다. 소녕는 그런 수진의 손길을 몇 번이고 뿌리쳤다. 소녕은 결국 신발장에 발을 걸친 채, 침대 방향으로 손을 뻗은 채 잠들었다. 그 모습을 사진 찍어 놓았다가 자고 일어난 소녕와 함께 보며 웃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수진은 베개를 신발장 앞으로 옮겼다. 베개를 베니 현관 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건 화장실 앞과 똑같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수진은 더 이상 비비기도 힘들 정도로 벌게진 눈가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잠에서 깨어나려했다. 이틀이 넘도록 깨어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자신 뿐이었으므로 그녀는 회사 사람들과 마주할 때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긴장이 어깨에 담처럼 뻐근하게 달라붙었다.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프로젝트 팀의 김 대리가 들어왔다.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법인 카드로 팔십 이만 원을 결제한 영수증이었다. 금액을 다시 확인한 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따가운 느낌이 얼굴 전체로 확 퍼졌다.

팔십 이만 원이요? 프로젝트 팀 인원 전부 해봤자 달랑 일곱 명인데, 어떻게 이만큼 나와요?

회식비야, 회식비.

저희는 지출 결의서 받은 적 없는데요.

수진씨, 얘기 못 들었어? 어제 드디어 클럽 아우라랑 계약 따냈다는 거 아냐. 국내에 최소 5개는 지을 거라는데, 그중에 1, 2호점을 우리가 맡았다니까.

김 대리가 수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녀가 노려보자 김 대리는 오히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수진은 가만히 있었다. 이미 숨결이 뺨에 닿을 정도로 충분히 가까웠다. 김 대리가 수진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근데 또, 얘네 전례를 보면 인테리어 팀을 거의 안 바꾼다고. 사실상 전국 다섯 매장 전부 우리가 따낸거다, 이 말이지.

김 대리가 얼굴을 뗐다. 수진은 습기 찬 오른 뺨을 벅벅 문지르고 싶었지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조용히 영수증을 전산 처리 했다.

아, 그럼 그 얘기도 못들었겠네.

수진은 부러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옆 자리의 나희가 고개를 빼 들고 대답했다. 무슨 얘기요?

시공 완료 되면 아우라 공식 사이트에 올릴 샘플 사진이 필요한데, 그걸 우리가 찍기로 했거든.

알바 안쓰고요?

야, 백 명만 써도 시간당 만원이야. 들어와서 인테리어 훼손하면 처리하기도 힘들고.

그런 분이 회식 비로 팔십 이 만 원이나 쓰셨네요.

나희의 삐딱한 대답에도 김 대리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면 공짜인데다, 재밌잖아. 안그래?

김 대리가 또다시 수진의 어깨를 쳤다.

네, 좋겠네요.

수진이 대답했다.

남 일 처럼 말하지 마. 수진씨 말처럼 달랑 7명 뿐인 우리 팀끼리 하는 게 아니라, 회사 전 직원 필참이야. 그날 창립10주년 기념 파티도 같이 한다니까.

나희가 책상을 내려치며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

그런 게 어딨어요? 전 안갈래요.

그럼 무단 결근 하시던가.

김 대리가 이죽거렸다.

아, 이놈의 회사, 인테리어 회사라길래 뭐 좀 기대했더니,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백 날 천 날 영수증만 만지고, 이제는 클럽 죽순이 역할까지 하라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은 나희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직원이라고 해봤자 40여명인데, 그걸로는 부족하잖아요.

수진이 물었다.

각자 친구들하고 와야지. 나희 씨는 인싸니까 많이 데려와.

친구 없이 혼자 가는 건 불이익 없죠?

수진 씨 혼자 오려고?

김 대리가 눈썹을 치켜떴다.

소녕 씨랑 오면 되잖아. 소녕 씨 같은 스타일이 클럽녀 역할에 딱인데.

소녕과 헤어졌다는 말이 울컥 튀어나와 입안에 맴돌았다. 비릿했다. 입술에서 새 나오는 피 맛인가, 이별의 맛인가. 끈적해진 침을 삼켰다.

소녕이가 좀 바빠서요.

그래? 아쉽네. 송별회때 자주 놀러온다더니, 한번을 안오고 말이야.

김 대리는 책상을 두 번 두드리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수진은 괜스레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김 대리가 나간 뒤에도 왠지 모를 시선이 자꾸만 와 닿았다. 나희였다.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 아래, 동그란 두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진은 왠지 불편한 기분에 담배를 챙겨 회사 밖으로 나섰다.

건물 근처 골목에 쪼그려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을 제대로 못잔 탓인지 첫 입에 어지러워졌다. 실수로 담배를 떨어트렸다. 주변을 살핀 뒤 다시 주워들었다. 어지러운 기분이 그녀를 조금씩 잠식하고 있을 때, 골목 어구부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희가 커피를 홀짝이며 서 있었다.

왜?

수진의 질문에 나희는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조금 긴장한 듯 했다. 그리고는 벽에 기댔다. 불현듯 짜증이 났다. 근무 내내 감추려 했던 모든 것들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할 말 없으면 먼저 들어간다. 수진이 한참 남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나희가 물었다.

선배는 할 말 없어요?

나희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빈 종이 컵이 바닥에 던져졌다.

소녕 씨랑 헤어졌어요?

나희는 좀처럼 짓지 않던 신중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야. 친구랑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어딨어.

그럼 아니에요?

수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심심하면 들어가서 책상이나 더 꾸며.

나희를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왔다. 옆 골목으로 들어가 담뱃갑을 열어보니 비어있었다. 담뱃갑을 구겨 던졌다.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계단에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봤지만 나희는 따라오지 않았다. 수진이 사무실에서 팀장의 몫까지 두 잔의 커피를 타고, 두 잔이 모두 바닥을 보일 때 즈음에야 나희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업무를 보았다.

 

실수로 복사 버튼을 누른 것처럼 비슷한 날들이 지나갔다. 나희와도 평소와 같이 지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한 수진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창밖에 파리바게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다음, 스타벅스가 스쳐 지나가고 다음은 다이소였다. 벨을 눌렀다. 골목 어구에 의자도 없이 표지판만 놓인 정류장에 내렸다. 골목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한 참을 걷다 보니 집 건물이 나왔다. 웬 일인지 용달 트럭 하나가 건물 앞에 세워져 있었다. 트럭의 뒤엔 안마 의자 하나가 실려 있었다. 박스도 없이 얇은 비닐 한 겹 덧댄 채 줄로 꽁꽁 묶여있었다. 트럭에서 두 사람이 내리더니 안마 의자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 동네에서도 저런 안마 의자를 사는 사람이 있구나. 그보다 저 정도 크기의 안마 의자가 들어가는 집이 있나? 힘겨워하는 그들을 뒤돌아보며 수진은 생각했다. 의자를 내려놓고 난 뒤 남자 하나가 트럭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트럭에는 안마 의자의 브랜드가 적혀있었다. 생각 해보니 자신이 소녕에게 선물 해주었던 안마 의자와 브랜드가 같았다.

수진은 작년 봄 즈음 안마 의자를 렌탈했다. 소녕이 월세를 포함한 생활비를 일절 받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의자가 배송 된 날, 소녕은 질색팔색 했고 수진은 자신이 취업한 기념으로 쏘는 거니 받아 달라고 빌다시피 했다. 매달 렌탈비가 인출되는 날 마다 현금을 뽑아 봉투에 넣어 소녕의 침대에 놓았다. 그러면 소녕은 배달 음식을 시켰고, 둘은 배터지게, 말 그대로 배가 터질 정도로 먹다 남겼다. 그리고 서로의 배를 두드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랬던 그들이 헤어지던 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주겠다고 유치한 다짐을 했던 그 날 이후로 렌탈비는 고스란히 소녕의 몫이었다. 이사한 첫 날엔 렌탈비 입금 계좌를 제 앞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녕이 적어도 한 달에 하루 만이라도 자신을 떠올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렌탈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소녕을 잊게 되기를 또한 바랐다.

그 바램을 이루지 못한 수진의 옆으로 안마 의자가 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건물 입구에서 숨을 참고 의자를 들어 올리는 기합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의자를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지하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 선 이들이 수진의 집 문을 두드렸다.

김수진씨, 배달왔습니다.

그녀가 계단 위에서 스위치를 켰다. 남자 둘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며 올려다 봤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 사세요?

맞는데, 저는 시킨 적이 없는데요.

김수진 씨 본인 아니세요?

그건 맞는데요.

동소녕 씨 모르세요?

그 사람이 이 주소로 보내라고 했어요.

배 냄새가 좁은 계단을 따라 훅 올라왔다. 남자 하나가 수진에게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고객센터 팀장의 명함이었다.

팀장의 말로는, 소녕이 회사에 전화해 본인은 계약자가 아니니 환불 해 달라고 난리를 쳤고, 본사에서는 당연히 안된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멀쩡한 의자를 고장이 났다며 무상 수리 신청을 통해 본사로 보낸 뒤, 검사 후에 반송 받을 주소를 수진의 집으로 변경했다는 거였다. 도대체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아마 회사를 통한 듯 싶었다. 이래서 지연으로 취업하면 안된다니까.

두 남자가 문을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빨리 문 열어요.

저기요, 진짜 집에 놓을 공간이 없어요.

우리도 건 당으로 벌어 먹는 알바니까 서로 시간 끌지 맙시다.

지금 렌탈 해지하면 위약금이 얼마죠?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고요.

수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렌탈은 48개월 분납 뒤 명의가 변경되는 식이었다.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했으므로 위약금이 상당할 터였다. 우선 집에 들여놓기로 했다.

방 문을 열자 투덜거리던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수진은 재빨리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가운데 벽 앞에 쌓아 놓은 박스들을 끌어냈다. 박스로 가려 놓았던 너덜너덜한 벽지와 금 간 콘크리트 벽이 드러났다. 수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전등을 켰다. 이사 온 후로 단 한 번도 켜 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가로로 놔 주세요.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마 의자가 가로로 놓였다. 화장실 문이 반 밖에 열리지 않았다. 의자를 돌려 창문 아래쪽으로 붙였다. 좁은 방이 반토막 난 것 같았다. 싱크대 앞에 놓을 수도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한 가운데 두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 대는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후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남자 하나가 안마 의자에 걸터앉아 수진을 올려다봤다.

이거, 그냥 버리죠?

생각해보니 애초부터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위약금은 할부가 안 됐다.

두 남자가 의자를 끌고 올라갔다.

개 같네, 씨발거.

진득한 욕설과 의자의 아랫부분이 계단에 찍히는 육중한 소리가 뒤섞여 건물을 쿵,쿵 울렸다. 아래에서 의자 밑을 받치던 남자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수진은 얼른 문을 닫았다. 문고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조용해진 후에야 손을 뗐다. 돌아보니 방은 난장판이었다. 알몸처럼 여실히 드러난 벽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리저리 밀쳐진 박스에서 쏟아져 나온 물건들이 방바닥에 굴러다녔다. 짐들을 하나씩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옷들을 다시 개어놓았다. 옷들은 전부 회색이거나 검은색이었다. 그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옷이 있었다. 펼쳐보니 은색의 얇은 원피스였다. 작년 이맘때 소녕이 입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수진은 옷을 다시 곱게 접어 자신의 옷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른 짐들 몇 개를 정리하다가 이내 내팽개치고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왠지 백색의 천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전등 빛이 이렇게 강했었나. 눈을 끔뻑거리다 몸을 일으켜 전등을 껐다. 그 순간 방에 어둠이 들어찼다. 마치 수진의 목덜미를 매만지기라도 한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창문을 보니 커다란 덩어리 같은 그림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건 등받이가 젖혀진 채로 덩그러니 버려진 안마의자였다. 하여간에, 소녕이 병 주고 약주는 데에는 소질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수진을 향해 어둠의 양쪽 끝에서 주황 빛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클럽 아우라는 계단의 초입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 후 들어가니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삼층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예술 극장처럼 일 층의 스테이지를 이 층과 삼층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업계 관련 잡지사에서 보낸 기자들도 여럿이었고, 회사 10주년을 축하하러 온 관계자도 다수였다. 인테리어 시공은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자재나 금액, 설비 역시 큰 문제 없이 완공됐다. 문제는 수진에게 있었다. 그녀와 몇몇 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경영 팀에서 시작된 사진 촬영에 대한 반발이 사장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알바생들을 고용하기로 결정 한 것이었다. 샘플 사진을 찍을 알바들은 스테이지에 모여 안내 사항을 전달 받고 있었다. 수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코트 앞섶을 단단히 여몄다. 그 아래로 내려온 은빛 드레스가 싸이키 조명 아래 반짝였다.

안면을 튼 몇몇 직원들과 가벼운 인사말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자신이 입은 드레스보다 코트가 더 눈에 띈다는 것을 알았다. 동절기 교복처럼 닳고 닳도록 입은 그녀의 비둘기 색 코트는 코트의 기본적인 형태만 갖추었을 뿐, 파티 복장이나 세미 정장,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다채로운 빛의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거나 가볍게 춤을 췄다. 수진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홀로 주황 빛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이 층 라운지로 올라갔다. 쇼파에는 경영 팀원들 몇 명이 앉아있었고 대부분 스테이지를 찍는 카메라맨들이었다. 그녀는 그들 옆에 어정쩡하게 섰다. 저 멀리서 그녀를 알아본 나희가 손을 흔들더니 이내 이 층에 올라왔다.

연차 쓴다며?

나희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맥주병을 건넸다. 둘은 가볍게 건배한 뒤 맥주를 마셨다.

난간에 기대어 스테이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는지, 조명이 정신없이 깜빡였고 사람들은 격정적으로 춤을 췄다.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 문득 나희가 말했다. 그래보여? 소녕 씨 거에요? 나희가 드레스 끝자락을 만졌다. 수진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취기가 훅 올랐다. 이젠 아니야.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시끄러운 음악 때문에 목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뭐라구요? 잘 안들려요. 수진이 빈 맥주병 4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 코트를 벗어 올려놓았다. 원피스의 자잘한 펄들이 별빛처럼 흐드러졌다. 이제 누구 것도 아니라고. 나희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희가 싱긋 웃어보였다. 오늘 출근하길 잘한 것 같네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에는 더 많은 카메라가 있었지만 수진과 나희는 개의치 않고 사람들 속에 섞여들어갔다.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옆에서 건네주는 술을 모조리 받아 마셨다. 어디선가 나타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음악이 바뀌는 찰나에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며 두 사람 사이로 지나다녔다. 나희가 손을 뻗어 수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어깨에서 뜨거운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연출 관계자가 스테이지의 사람들에게 스티커를 나눠주었다. 스티커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아우라의 전통적 이벤트를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옷에 스티커를 붙였고, 금세 남의 옷에 붙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그들 사이에서 치여가며 수진과 나희의 몸에도 스티커가 여럿 붙었다.

수진은 꽤 많은 스티커를 붙인 채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테이블 쇼파에 주저앉았다. 따라 나온 나희가 수진의 몸에 붙은 스티커를 훑었다. 많이 붙었네요. 아까 막 폭죽 터트리고 정신 없을 때 말야. 수진이 느린 템포로 말을 이었다. 엄청 예쁜 언니가 내 가슴 만졌다. 조금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던 나희의 표정이 굳었다. 개새끼네. 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라고? 나희가 손으로 이와 칠을 만들어 보이며 익살 맞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웬만하면 선배가 언니라고요. 잠깐 웃어보였지만, 표정은 금세 떨떠름해졌다. 주인 모를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술 병들을 하나씩 들어보며 남은 술을 찾았다.

이제 재미 없어? 수진이 굳은 얼굴을 한 나희의 양 뺨을 손으로 쥐고 말했다. 아깐 오기 잘했다더니. 그랬었죠. 나희가 수진의 허벅지에 달라붙은 원피스를 떼어냈다. 이젠 맘이 바뀌었어요. 나희는 조금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수진은 그녀의 뺨에서 손을 떼고 턱을 괴었다. 왜 마음이 바뀌어? 글쎄요. 좀 전까지만 해도 신났던 음악이 소음처럼 느껴졌다. 나는 변함없이 나인데, 너는 마음이 왜 바뀌지? 클럽 안을 가득 채운 화려한 조명이 수진의 풀린 눈동자 위에도 부서져내렸다.

그때 김 대리가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술 냄새가 진득하게 뿜어져 나왔다. 나희가 김 대리를 쏘아봤다. 나희 씨는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잔뜩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제가 좀 취했나 보죠. 김 대리는 다짜고짜 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진씨, 이 층에 올라가서 좀 쉬지 그래. 수진이 멍한 눈으로 김 대리를 바라봤다. 그가 당기는 대로 몸이 흔들렸다. 나희가 김의 손을 떼어내 밀쳤다. 저희 다시 들어가서 놀건데요. 그래? 김 대리가 콧김을 뿜으며 웃었다. 들고 있던 스티커를 떼어 수진의 옷에 붙였다. 재밌게 놀아.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뜨는 김 대리를 향해 나희가 맥주 뚜껑을 던졌다. 힘없이 날아가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아, 저 개새끼가 진짜. 수진이 떨궜던 고개를 퍼뜩 치켜 들었다. 나는 그대로 인데, 뭐 때문에 마음이 변하냐고. 순간 나희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 몰라, 나 빼곤 다 개새끼야.

수진이 배시시 웃었다. 웃겨, 쬐끄만 게. 나희의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손 끝에 뻣뻣한 느낌이 전해졌다. 머리는 몇 가닥을 제외하고는 그대로였다. 나희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 내 머리! 수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이거 설마 스프레이야? 할머니, 요즘은 픽서 라고 하거든요? 나희가 새침하게 쏘아붙이더니 수진을 따라 웃었다.

 

나희는 수진을 반 쯤 둘러업고 클럽을 빠져나왔다. 입구에는 보안 팀이 클럽에 들어오려는일반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택시 몇 대가 주춤거리며 다가오다가도 개업 전이라고 고함치는 소리에 그냥 지나쳤다. 다리가 풀린 수진을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아직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언니, 이것 좀 떼고 가자. 수진이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안돼, 안돼. 나희는 가차 없이 스티커를 뗐다. 이거 끝났어. 아니야, 집에 가져가야돼. 그러면 떼서 내가 챙길게.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현장 보존 해야 돼. 현장 보존은 무슨, 네가 형사야? 쬐끄만게, 시끄러워. 나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보안 팀의 도움으로 겨우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수진을 밀어 넣었다.

새벽 네 시가 지나서야 집 앞에 도착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들쑤시는 바람에 이만 오천 원 정도로 예상했던 택시비는 삼 만원을 훌쩍 넘겼다. 택시는 수진과 나희를 뱉어내고는 황급히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집이 어디냐는 말에 수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 앞에는 생뚱맞게 안마 의자가 있었다. 등받이가 뒤로 누워있는 채였다. 나희가 수진을 안마 의자 쪽으로 끌고 가 앉혔다. 그녀가 곧바로 몸을 뒤틀어 의자에서 벗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졌다가 금세 일어났다. 그리고는 의자를 발로 찼다. 굉음을 내며 나자빠진 건 수진이었다,

의자는 잠시 기우뚱 했지만 그대로였다. 왜 저래? 나희는 바닥에 앉아서 공연을 보듯 수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진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뭐라고요? 저거, 부술거야, 내가. 또다시 의자를 붙잡고 허우적 댔다. 한참을 관객처럼 앉아있던 나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진해 의자를 힘껏 밀었다. 의자가 옆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수진이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웃기냐는 나희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숨을 꺽꺽 쉬며 웃었다. 꼴 좋다. 나희는 민원이 들어올까 주변을 계속 둘러봤지만 정작 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숨죽이고 사는 동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희는 수진의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줄곧 그녀에게 기대어 있던 수진은 문이 열리자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맞은 편 벽 앞에 정리된 짐들을 전부 끌어냈다. 너덜거리는 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진은 옷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 지저분한 자국마다 붙이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붙은 아우라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곧이어 바닥을 손바닥으로 쾅쾅 내리쳤다. 이제 여기서 자도 돼. 그리고는 엉금엉금 기어 오른쪽 벽에 몸을 붙여 눕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던 나희는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자신의 발 앞에 있는 수진의 머리를 혹여나 밟을까 조심하면서.

굴러다니는 짐들을 피해 천천히 발을 디뎌 방을 건넜다. 벽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우라를 떼고 보니 스티커의 잔해가 보였다. 자국들을 하나 둘 긁어 보았다. 잘 긁히지 않았다. 그녀는 잠든 수진을 뒤돌아 보았다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수진이 눈을 떴을 때는 햇빛이 이미 많이 차분해진 오후였다. 몸이 뻐근하고 무감각해 흐린 눈만 재차 끔뻑였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며 찬 기운에 솜털이 오소소 돋았다. 갑자기 등에서 거친 싸구려 털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이불을 걷어차며 비명을 질렀다. 등을 맞대고 있던 나희가 몸을 일으켰다. 깼어요? 태연한 표정이었다. 너무 추워서 이불 좀 같이 덮었어요. 그러고 보니 나희는 제 옷 위에 수진의 코트까지 껴입고 있었다. 수진이 등을 긁었다.

나희는 휴대폰이 울리자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수진은 둘둘 말려 올라간 상의를 풀어 내리며 지난 밤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어제 입었던 옷을 찾아 방을 뒤적거리다 벽에 무언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어젯밤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테이프 대신 커다란 하트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주변엔 작은 하트도 빼곡했다. 수진은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 빤히 들여다 보았다. 하트가 예쁘다고 생각한 자신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바람이 훅 불어왔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피자 시켰어요. 나희는 발 끝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밀었다. 수진도 짐을 치워 자리를 만들었다. 집이 좀 좁지? 나희는 신이 난 듯 어깨를 들썩이며 피자 박스를 열었다. 어제도 그 말 했었는데. 전 좋은데요, 미니멀 라이프. 담담한 목소리가 수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괜스레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나희가 피자 한 조각을 집어올렸다. 내가 어제 입었던 원피스 있잖아. 수진의 목소리가 치즈처럼 늘어졌다. 그거, 어제 선배가 토해서. 내가 대충 빨긴 했는데, 어떡할까요? 피자를 건네며 묻는 나희의 갈색 눈동자에 햇빛이 가득 들어 찼다. 너 가질래? 수진이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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