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소설 부문 당선작) <1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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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65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소설 부문 당선작) <1066호>
  • 정지나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19.12.0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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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임페리얼 포슬린. 제법 생경한 이름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얼’을 좀 더 느끼하게 발음해보았다. 치즈나 초콜릿을 녹여 먹듯이. 임페리, 얼. 말캉한 혀를 입천장에 오래 붙였다 떼었다. 빌로이 앤 보흐. 웨지우드. 포르나세티. 미끈한 어감이 허무하게 입술 밖으로 미끄러졌다. 내가 철없이 그런 이름을 불러보는 동안, 현이는 오후 내내 백화점 칠 층의 그릇 코너에서 찻잔을 고르고 있었다. 유독 코발트넷 라인을 눈여겨보던 중이었다. 앳된 남직원이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달라붙었다. 이 찻잔이 얼마나 유서 깊은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는 듯이.

이것은 천칠백 년대 즈음, 엘리제 베타 여제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는 러시아와 영ㆍ미국 의 박물관에도 일부 작품이 소장된 브랜드라고 했다. 본래 설립 당시의 이름은 노모로소프, 아니 로모노소프였다고 그가 정정했다. 그렇다는 말은, 내가 오늘 처음 접한 이 낯선 이름이 먼 러시아에서는 이백 년 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때때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이 파랗고 촘촘한 무늬를 보기 전까지 누군가는 이 찻잔을 십팔 세기에 네 번째 부인에게 선물했거나 어떤 누구는 분에 못 이겨 어젯밤 거실 카펫에 집어 던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역사는 무수했다.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이미 일어난 사건. 손 쓸 수 없이 벌어져 버린 일들. 그런 것을 일일이 돌아보기에 이미 나는 충분히 피로했다. 웬만큼은 방관하는 것이 삶을 견딜 수 있는 요령이었다. 기껏 그런 것이 나의 가치관이라고 말한다면, 현이는 나를 조금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찻잔을 좀 사러 가자, 오빠.

어젯밤 현이가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놀라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동생이 나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나는 현이의 작은 진열장에 쌓여있던 그릇을 생각했다. 식기세트는 선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전한데다가 유행에 따르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조심성 있는 현이가 부주의하게 깨트렸을 리는 만무했다. 며칠 전부터 인터넷 쇼핑몰과 홈쇼핑을 두루 살피며 전에 없이 찻잔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이제는 몸소 사러나갈 만큼의 열의를 보였다. 이만큼 동생이 어떤 것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던 적이 있었던가. 현이에게는 기본적으로 티타임이 내주는 여유랄까, 그런 안정감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본성이 돌에 가까웠다. 누군가 넘어뜨리면 구르고 깎아내면 깎이고 부서뜨리면 부서지는 채로, 결코 현이는 억울해하지 않았고 외려 그것이 자신의 본모습인 듯 타협하고 살아왔다.

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집들이를 하루 남겨둔 밤이었다.

수 년 전 이사를 마친 현이의 갑작스러운 집들이는 여자친구 은재의 의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얼마 전 은재와 나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깊은 관계임을 양가에 알렸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정식으로 우리 가족과 식사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따뜻한 색감의 원목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이었다. 실내는 아늑하고 한적했다. 은재는 내가 일하고 있는 조그만 동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문서작성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으나, 나의 너그러운 부모는 그저 그녀의 선한 인상과 예의 바른 모습이―또는 그녀 부모의 재력이―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은재는 누구보다 인사성이 바르고 성실한 직원으로 꼽혔다. 사소한 대화에도 눈이 휘어지라 웃으며 상사의 귀여움을 샀다. 유한 분위기가 한없이 이어졌다. 마주 앉은 현이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으나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동생은 자주 그런 식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는 했으니까. 저녁 식사가 성황리에 끝났다. 스테이크는 육질이 부드러웠고 파스타는 짜거나 건조하지 않았으며 신선한 샐러드는 아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배경음악으로는 귀에 익은 클래식 음악이 무던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처 한옥카페로 이동했을 때 은재는 아버지의 부름에 돌아가야 할 듯싶다며 부득이하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왕복 한 시간쯤 되는 거리를 차로 바래다주었다. 스스로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것을 손 놓고 지켜만 보았더니 금세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은재에게는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면이 종종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먼 거리를 돌아서 다시 카페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은 부모님의 안색이 전과 달리 좋지 않았다. 기운이랄까 표정에서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변화가 도드라졌다. 일찍이 자리를 뜬 은재에게, 또는 오래간 부모님을 방치한 나에게 상심했던 것일까? 현이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모직코트와 가방과 함께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나는 되는대로 화제를 현이에게 돌렸다.

현이는?

우선 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단호히 말했다. 그 후 조심스럽게 이어진 말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갈래였다.

사춘기 시절의 현이가 교내에서 지독하리만큼 괴롭혀진 사실을 부모님과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은재가 현이의 중고등시절 동창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던 건 우리 모두 아니었다. 몸소 가담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은재는 육 년 동안 그 무리 속에서 현이를 무정하게 지켜본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아아.

그것이 내 대답의 전부였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이 꼬이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다듬은 모래성이 맥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문득 탄식하며 적요를 깼다. 어머니가 달래듯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제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 좀 벌그스름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라. 너는 네 할 일을 마저 해. 너도 알다시피 현이가 쓸데없이 민감한 구석이 있으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말이야. 다 지난 문제를 뭐하러 신경 써? 이미 십 년도 더 된 일 아니야.

뜻밖에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나무라지 않았다. 외려 옆에서 모호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밤이 더 늦어지기 전에 나는 부모님을 본가에 모셔드렸다. 차 내부에는 서먹한 공기가 감돌았다. 부모님은 모든 것을 현이의 탓으로 돌리는 듯했지만 은재에 대한 그 어떤 긍정적인 표현도 내게 하지 않았다. 붉은 신호등 앞에서 나는 생각을 정리하다 말고 차츰 성질이 났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비록 현이에게 못 할 말이지만 카페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먼저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아버지 말마따나 이제는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엊그제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판에, 현이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쯤에서 잊었어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나는 어린 학생들의 교내 따돌림을 경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정신병동에 입원하는 아이들을 뉴스나 인터넷 기사를 통해 자주 접하곤 했으므로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이는 이제 괜찮아보였다. 본가와 멀지 않은 전문대에서 경영과를 졸업한 후, 이 년 전 작은 증권회사의 경리부에 취직했다. 직장동료와 이따금 밤에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소개팅에 나가며 내게 쑥스러운 듯 연애상담을 부탁하기도 했다. 여태껏 그 당시의 이야기를 제 입으로 꺼낸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제는 괜찮아진 현이에게.

이튿날 그 사실을 전했을 때 은재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어떡하지, 오빠 미안해. 그때는 나도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현이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은재는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을 삼켰다. 은재에게는 거짓말을 할 때 침을 모아 삼키는 버릇이 있다.

그날 현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나는 다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더니 말릴 틈도 없이 엉엉 울어버렸다. 얼굴이 빨개졌고 목이 쉴 때까지 울어서 나는 그 당시 괴롭혀진 아이는 어쩌면 은재가 아닐까 싶게 당혹스러웠다.

 

주말 오후, 우리는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 근처의 유명 맛집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식기 및 수저, 찻잔 세트가 든 쇼핑백 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현이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니.

염색해본 적 없는 현이의 검은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피부가 흰 탓에 목덜미의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현이에게는 그런 자국이 수없이 있었다. 할퀴어지거나 구타로 인해 생긴 온몸의 흉 때문에 한여름에도 땀 흘리며 긴 옷을 걸쳐 입었다. 목덜미의 그것은 현이의 눈에 닿지 않아 작은 몸에서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흉터였다. 나는 그 무방비함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다 괜찮아.

현이가 뒤돌아서 내게 미소 지었다. 하관에 희미하게 팔자주름이 팼다. 서른을 목전에 둔, 스물아홉 살의 동생 현이. 명랑한 기운을 띠던 어린 현이가 익숙한 나로서는 차분한 안색의 성숙한 현이가 종종 생소하게 느껴진 적 있었다.

우리는 세 살 터울의 남매였다. 현이가 중학교에 막 입학하던 해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삼 년간 대학 입시에 시달렸고, 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나는 서울권 사립대학에 합격해 그 근처 원룸을 얻어 본가를 떠났다. 우리는 함께 발 맞춰 걸어도 항상 계단의 높낮이가 다른 남매였다. 따라서 나는 현이의 육 년을, 그러니까 동생의 사춘기 시절을 지켜보지 못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지가 오래였고 둘이서만 남겨질 적에는 누군가 서먹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먼저 자리를 뜨곤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현이란 유난히 말을 빨리 배웠던 유아기와 항상 학교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과 뛰어다니던 초등시절, 그리고 항상 방문을 닫고 지냈던 청소년기의 현이였다. 중학생이 된 후로 이따금 식사를 함께 할 때면 말수가 너무 줄어있던 현이.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현이. 사춘기가 왔으리라고 얼추 짐작하게 했던 현이.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스물아홉의 현이를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더 이상 식사를 거르거나 오랜 시간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과다 호흡이 올만큼 대단히 울지도 않았다. 현이는 이제 정말 괜찮았다.

 

*

 

현이는 마른 수건으로 그릇을 닦아 식기 건조대에 올려두었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노을 진 주방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새삼스레 좁은 집안을 살폈다. 현이의 오피스텔은 몹시 너저분한 인상이었다. 창틀이나 바닥의 경우 깨끗이 청소를 하는 덕에 말끔했으나, 벽지나 배치된 가구는 어느 것 하나 일관된 게 없었다. 현이의 침대에는 분홍 꽃무늬 이불과 감색 스트라이프 베갯잇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주방에는 차가운 회색빛의 냉장고 앞에 노란 원목 식탁이 놓여있었다. 단정한 화이트 색감의 욕실에는 형광 연두 슬리퍼가 뜬금없이 비치되어 있기도 했다. 꽃과 나비가 그려진 벽지에서 빨간 도트무늬 벽지로, 그러다 나뭇잎이 휘날리는 벽지로 건너고 건너보다 보면 머리가 어질해지고는 했다. 하지만 현이는 이런 것들을 대책 없이 사들이지 않았다. 반드시 주변 지인에게 자문했고 숱한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현이의 집은 그렇게 수많은 타인의 취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조화가 맞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참석하기를 바란 사람은 다름 아닌 현이였다. 오빠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전화기 너머 단호하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현이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장갑을 쓰지 않은 희고 작은 맨손으로 이름 모를 생선을 덥석 잡았다. 능숙하게 비늘을 벗겨냈다. 저러다 손이 다 상할까 싶어 나는 현이를 불렀다.

현이야.

그새 현이는 손질한 생선을 믹서기에 넣고 있었다. 생선을 갈아 만드는 요리가 무엇이 있더라. 믹서기의 마개를 단지 누르고 있는 동안, 생선은 차츰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졌다. 가시와 살이 서로 문드러지는 모습이 꽤 괴상했다. 현이를 부르던 내 목소리도 그 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그런 무식한 소리가 십이 평 오피스텔을 흔들고 있었다. 현이의 너저분한 세계가 울렁거리고 있었다.

요즘도 현이는 드물게 문을 닫아둘 때가 있었다. 수 년 전에 이 작은 오피스텔을 따로 얻어서는, 이따금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쯤 우리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대신해 퇴근길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그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당분간은 영 만날 수가 없었다. 출근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현이의 세계 바깥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경계가 무너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현이를 위해 서울권 대학을 포기하고 가까운 국립대학에 지원해야만 했을까. 강의가 끝나면 서둘러 집에 돌아와 현이의 하루를 다정하게 묻고, 좋은 에세이를 추천해주며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라도 해야 됐을까. 기어코 서울로 떠났으면서 나이 서른에 겨우 지방직 9급에 합격한 나를 원망하기도 했을까. 하지만 나는 현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은재가 초인종을 누른 것은 약속 시각을 십 여분 정도 넘겼을 즈음이었다. 현이는 믹서기에 들러붙은 생선살을 긁어내고 있었다. 나는 현관에 나가 은재를 맞이했다. 그 옆에 웬 낯선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얼굴로 보아서는 은재와 비슷한 또래인 듯 보였다. 은재는 어젯밤까지도 함께 올 여자에 대해서 내게 귀띔한 적이 없었다. 나는 여자에게 마지못해 인사했다.

오빠 잠깐 와봐.

은재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고 현이의 방에 숨어들었다.

왜 그래? 저 여자는 또 누구고.

내가 묻자 은재는 쉿, 하면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러더니 이제야 난잡한 방이 눈에 들어오는지 찬찬히 내부를 살폈다. 각기 다른 네 벽면의 벽지를 볼 때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얼마 안 있어 같이 찾아온 여자에 대해 일러주었다. 여자는 은재와 마찬가지로 현이의 동창이었다. 중고등시절 함께 어울리기도 했으나 졸업 이후에는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둘은 얼마 전 고등동창회에서 십 년 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늦은 나이에 영화배우를 준비 중인 박민예는 학생 시절 반의 분위기를 좌우하며 유독 주도적인 아이였다고 했다. 본래 작은 연극단에서 단역을 도맡아왔는데 얼마 전 운 좋게도 유명 감독의 눈에 들어 곧 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비록 조연으로 잠시 출연하는 거라지만 영화에 문외한인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감독이었다. 은재는 그런 박민예를 보고 문득 현이 생각부터 났다고 했다.

오빠도 알다시피 현이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우리도 오래 전부터 사과하고 싶었으니까. 또 우리뿐만 아니라 현이에게도 역시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데려왔어.

그럴 애라니? 나는 자칫 그렇게 물을 뻔했다. 은재의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안도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초조할 법도 한데 보통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색이었다. 은재가 먼저 이 자리를 제안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큼 자신이 남부끄럽지 않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럼. 현이도 아마 이해해줄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재가 품에 안겨들었다.

고마워.

어째서인지 평소처럼 은재를 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방 바깥을 쳐다보았다. 멀리 부엌에서 우리를 등지고 박민예와 마주 서있는 현이가 보였다. 현이는 식사 준비를 하다 말고 박민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몸을 내빼려는데 은재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달래듯이 내 어깨뼈를 부드럽게 감쌌다.

괜찮아. 알아서 하게 해줘.

어깨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은재가 말했다.

현이도 이제 괜찮을 거라며.

멀리서 현이가 천천히 박민예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차츰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도무지 주방에서 생선 비린내가 가시지 않아 우리는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환풍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차가워진 공기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 가끔 찬 손을 주무르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박민예는 시원한 이목구비에 웃을 때마다 그 눈매가 한없이 선했다. 누군가를 수 년간 집요하게 몰아세웠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은재는 그 옆에 앉아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의미 없는 대화가 챗바퀴처럼 굴러갔다. 이번에는 주제가 현이에게로 넘어왔다.

현이는 무슨 일 하고 지내?

은재가 물었다. 양파와 통마늘, 아스파라거스와 같은 갖가지 채소를 굽던 현이가 가스 불을 줄이며 대답했다.

에스티 증권 경리부에서 일해. 이 년 조금 안 됐어.

줄곧 듣기만 하던 박민예가 반응했다. 경리부?

의외다. 너는 취향이 독특해서 그런 데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그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전에 없이 옷을 사들였던 현이에게 그 당시 반 아이들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현이의 교복 재킷 뒤에 때때로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그날 입은 옷이나 또는 단순히 현이를 모욕하는 말이 적혀있고는 했다. 뒤늦게 보호자 노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조금씩 분노가 이는 것도 같았다.

은재가 팔꿈치로 박민예를 가볍게 건드렸다. 박민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니야, 정말. 너도 알잖아.

몇 차례 질문이 더 이어졌지만 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준비에 한창이거나 박민예의 말에 신경이 곤두선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현이를 대신하여 아는 만큼 질문에 답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박민예의 안색에 조급한 느낌이 스쳤다.

저녁 식사의 메인요리로 현이는 수제 생선가스를 내왔다. 잠깐. 그런데 생선가스를 만들 때 보통 생선을 믹서기에 갈던가? 만들어본 적 없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 모습이 영 이상했다. 곁들여진 야채는 그럭저럭 먹음직스럽게 구웠는데 생선가스가 엉망이었다. 무작위로 갈린 흰 살점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접시 주변에 지저분하게 튀어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형편이 없는 음식이었다.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에서는 더욱이. 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은재와 박민예는 가시가 채 갈리지 않은 생선가스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다. 오늘 찾아온 이 손님들에게는 목적이 있으므로 불만을 내키는 대로 터놓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간혹 눈길을 주고받기도 했다. 현이에게 해야 할 말을 서로 미루고 있거나, 이 무례한 요리에 대한 당혹스러운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생선 뼈를 으득거리며 씹어 넘기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오늘 나는 현이의 부탁을 받아 저 손님들과는 다른 입장으로 이 식사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건너편의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불평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거북한 느낌이 드는가. 나는 고개를 처박고 따가운 가시를 삼키거나 휴지에 뱉어내기 급급했다. 불쾌한 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끝내 은재와 박민예는 음식의 절반 정도를 남겼다. 은재는 박민예의 등을 쓸어주며, 오전부터 그녀의 속이 좋지 않았다며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이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음식을 입에 처넣고 우걱거리고 있었다.

나는 안색이 좋지 않은 은재가 걱정되어 금방 뒤를 따라나섰다. 현이의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슬며시 열린 문틈으로 박민예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은재가 보였다. 박민예는 여러 차례 헛구역질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그만해 토 나올 거 같아. 쟤 우리 엿 먹이는 거 맞지, 응? 미치겠다.

욕실을 둘러보던 은재가 말했다.

인테리어 좆같네 진짜.

 

*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는 언젠가 중학생 현이와 마주한 적 있었다. 밥을 꾸역꾸역 입에 처넣기만 하던 현이가 아닌, 집에 돌아오면 인사 한 번 없이 방문을 닫아버리던 현이가 아닌, 민낯의 현이를.

그날은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가 얹혔는지 오전수업부터 뱃속이 뒤틀리더니 오후로 접어들자 도저히 책상 앞에 앉아있기가 괴로웠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당시 마른 체격이던 나는 창백한 얼굴로 쉽게 조퇴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 학생이 그러하듯 교실에 앉아있을 때만 해도 아렸던 배가 교문 밖을 나설 쯤에는 차츰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적한 오후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홀로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늦은 밤에는 볼 수 없었던 거리의 노점상에 들러 매운 닭강정과 캔 콜라를 포장했다. 집에 들어설 즈음에는 마침 사색하기 좋은 분위기였다. 유리창을 통해 거실 바닥으로 노을이 넘어오고 있었고, 정말 고요했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 잠시간 저녁노을을 바라보기도 했다.

닭강정은 예상했던 맛보다 짜고 매웠다. 미처 닦지 못한 땀방울들이 가죽 소파에 흘러내렸다. 그 당시의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분수처럼 침이 터져 나왔고 얼얼한 혀에만 집중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야말로 무방비했다. 때문에 현이가 갑작스레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나는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그 애가 걸어오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만 봤다. 너 이 시간에 왜 집에 있어?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가까이서 현이를 보자 그런 말이 쑥 들어갔다. 현이는 오랫동안 물에 잠겨있던 사람처럼 얼굴이 매우 부어있었다.

오빠 나 죽고 싶어.

그러더니 내 옆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감싸 안고 그만 고개를 묻어버렸다. 나는 입안에서 물컹거리는 튀김옷을 삼키지 못하고, 무심코 들은 그 말의 무게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당장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죽이 된 가슴살을 씹고 또 씹었다. 현이는 가만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무섭게 만드는 거니. 어째서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하고 얼굴이나 파묻고 있는 거야? 그 속에서 너는 울고 있니, 아니면 침이나 흘리고 있는 나를 열렬히 저주하고 있니. 불편한 시간은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현이가 물었다.

오빠도 해봤어?

뭐를.

개구리 해부하는 거. 과학 시간에.

현이는 내가 졸업한 중학교를 다녔다. 개구리 해부 실험은 폭력성이 강하기도 하거니와 사후처리가 어려운 탓에 매번 폐지하겠다고 하면서도 매년 우리 학교에서만 전통처럼 이어져오는 과학 실험이었다. 현이가 말했다.

과학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났어. 물비린내 같기도 하고, 맡아본 적은 없어도 시체 썩는 냄새라는 게 이런 걸까 싶은 그런 냄새가. 그런데 누가 이현 냄새 난다 하니까 다들 갑자기 실실 쳐 웃더라고. 과학 선생님은 못 들은 척하고 출석부만 들여다보고……. 스티로폼 상자에서 기절한 개구리가 무더기로 쏟아졌어. 수업은 끔찍했어. 애들이 아무거나 들고 개구리 배를 가르더니 그 안에 든 장기를 함부로 헤집고 혀를 뿌리 끝까지 잘라내기도 하고. 개구리는 기절해 있긴 했어도 분명히 살아있었거든. 심장을 꺼내니까 그 조그마한 게 피를 토하면서도 계속 뛰어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다들 그런 짓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아 하니까. 나는 그래서 더 무서웠나봐.

흰 가운을 걸치고 실험을 숨죽이고 지켜봤을 현이를 생각했다. 현이는 날 선 도구에 손도 대지 못하고 아이들 뒤에서 해부를 훔쳐보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어쩌면 과학 선생 모르게 뒷문을 열고 도망쳐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이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그 애들을 이해해보려고도 해봤어. 처음에는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나는지 다들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고. 체육 시간에도 급식 시간에도. 자리를 바꾸는 날에는 부끄러울 만큼 애들이 나를 싫어했어. 그 즈음부터 더 오래 씻었지. 아침저녁으로 두어 시간씩. 살이 아프고 발개지도록.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었어. 사실 그 애들은 냄새 때문이 아니라 나를 단지 피한 거겠지. 이유는 몰라도 그 타겟이 내가 된 거겠지. 그게 일종의 놀이가 된 거겠지. 그런 것도 모르고 교복에다 향수를 뿌렸어. 그 향수 때문에 더 괴롭혀질 줄은 몰랐거든, 학년이 바뀌어도 말이야. 알다시피 우리 학교가 공학이잖아. 남자애들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래. 나중에는 말이 심해지니까 걸레라 부르더라고. 그 애들은 그 뜻이 뭔지나 알고 쓰는 걸까? 나는 남자애들 이름도 잘 모르는데.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자꾸 변태 같은 말만 해서 오히려 말도 섞기 싫어 진짜. 나는 그러니까, 그만 쪽팔렸으면 했던 거야. 그 후로는 무얼 해도 똑같아. 유행하는 바람막이나 스니커즈를 따라 사도 머리를 새로 자르거나 염색해도, 뭘 하든 간에 전부 싸 보인대.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오빠는 알겠어? 가끔은 오빠도 내가 끔찍할 때가 있어?

고개를 젓는데 현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소파 한가운데에 벽이 세워진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젯밤에는 지쳐서 누워만 있었어.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려두고 있었거든. 근데…… 이상하게 듣지는 마. 심장이 뛰는 게, 어제는 꼭 벌레가 꾸물대는 것처럼 느껴졌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애벌레가 등을 굽히면서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오빠. 나는 이제 내가 살아있는 게 징그러워.

현이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어느 순간 일어났다. 다시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방문을 굳게 닫았다. 마침내 고요해졌다.

현이가 또래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알고 있었다. 주말에도 연휴에도 친구를 만나는 일이 한 번 없었으므로. 매일 밤마다 문을 처닫고 사는 것에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수능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았고, 아버지는 특진이 걸린 프로젝트에 밤낮으로 매진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갑자기 부서가 이동되어 생소한 업무를 기초부터 익히던 중이었다. 나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현이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간수치가 너무 높아 회식자리에 불참하던 아버지가 인사부의 눈 밖에 날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일을 배우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내가 늦은 나이에 그저 그런 월급쟁이가 될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하여 현이의 무거운 고백을 부모님에게 나누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이곳에서 삼 년을 견디거나 지냈다. 이제 현이는 멀쩡했다. 다만 자신이 지닌 세계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축축할 뿐이었다. 그뿐이라고 나는 계속 생각하고 싶었다.

 

*

 

질 나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집 안에 생선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바람이 쌀쌀해지면서 창문을 닫자는 내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집이 더욱 고요해졌다. 박민예는 속을 게워냈는지 안색이 차분해 보였다. 욕실에 다녀온 이후로 은재는 여태 말을 아끼고 있었다. 내가 그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현이가 내온 차를 두어 모금 마셨다. 속이 따뜻해졌다. 뻣뻣한 긴장감이 물에 불린 종이처럼 차츰 풀어졌다.

향 좋다 현이야.

박민예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것은 현이가 오래 전 해외 택배로 받은 영국식 꽃차였다. 현이는 찻잔을 한참 어루만지다가 답했다.

다행이다.

잠시 동안 차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찻잔과 찻잔 받침이 맞부딪히는 소리. 차에 작은 입김을 불어 넣는 소리. 더운 차를 입에 머금는 소리. 그러는 사이 박민예는 은재에게 수차례 눈길을 던졌는데 은재는 내내 무심한 얼굴로 일관했다. 나는 어서 이 불편한 자리가 끝나기를 바랐다. 이들 중 오늘 이 자리가 유쾌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들이를 마친 뒤 돌아갈 적에 나는 내내 은재를 달래며 오해를 풀어야 할 테고 아무 약국에나 들러 소화제를 사 마시고 싶었다. 박민예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사뭇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너도 이제는 잊었을 테지만, 이라는 무책임한 문장으로 박민예가 용서를 구했다.

그래도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왔어. 늦었지만 현이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모임에서 가끔 네 얘기 나오면 다들 침울해져, 여기 있는 은재도 그렇고. 그때는 단순히 네가 부러웠어. 너는 공부도 곧잘 하고, 또 너를 좋아하는 애들이 많았거든. 사춘기 시절 우리한테는 그게 얼마나 질투가 났겠어. 그때는 나보다 조금만 잘나도 그렇게 아니꼽잖아. 그때는 어째서 그렇게 지독하게 굴었는지 나도 이제 와서는 이해가 안 돼. 그런데 오늘 보니까 너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때 우리 너무 어렸잖아. 현이야.

듣고만 있던 은재가 현이를 바라보았다. 박민예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현이는 그런 말을 듣고도 조용히 차를 마시기만 했다. 그것이 다였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현이를 조금 더 기다렸다. 은재는 이 침묵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던지 눈을 치뜨고 나를 노려보기도 했다. 박민예는 다시 찻잔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더니 화제를 능숙하게 돌렸다. 어찌 되었든 이제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찻잔 디자인 정말 세련됐다. 현이 너 감이 좋아졌구나.

박민예가 그렇게 말했을 때 현이는 머금고 있던 차를 삼켰다. 그러더니 박민예와 은재의 얼굴을 빤히 건너봤다. 그녀들이 서먹한 시선을 주고받을 때 즈음 현이가 입을 열었다.

이건 너희가 고른 거나 마찬가지야.

현이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랭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하마터면 그렇게 반문할 뻔했다. 찻잔은 어제 나와 함께 고르지 않았나. 간간이 들려오던 찻잔 부딪히는 소리가 그마저도 멎어버렸다. 현이는 그러나 확고한 눈빛으로 좁은 오피스텔을 살폈다. 수많은 화분 때문에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베란다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철제 테이블, 스타일이 각기 다른 옷가지가 널린 빨래걸이, 색이 다른 커튼을 한데 걸어둔 창틀을 훑었다. 현이가 말했다.

이 집도 여기 앉아있는 나도. 전부 그래.

 

집들이는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현이는 옷걸이에서 외투와 목도리를 걷어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은재를 데려다주는 길에 우리들은 다투지 않았다. 외려 말이 없어졌다. 밤늦도록 은재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튿날에도 그랬고, 그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까지 생각했다. 내가 모르고 있을 지금의 현이에 대해. 바깥에 나가지 않는 날에도 손가락에 주름이 질 때까지 강박적으로 씻는 현이, 직장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남의 업무를 떠맡고 야근이 잦은 현이, 내일 입을 옷을 생각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현이, 선물 받은 향수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현이, 애프터 신청을 무시하지 못해 매번 소개팅에 응하는 현이, 팔다리의 흉터 때문에 무더운 날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는 현이. 나는 오래전 중학생 현이가 가르쳐줬던 대로 웃옷을 벗고 가슴에 손바닥을 올려봤다. 심장박동만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가슴 위로는 벌레가 기어 다니지 않았다.

수상소감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지만 막상 말할 기회를 얻으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막연했습니다. 그래서 수상 소감을 쓰기에 앞서 평소 단상을 적어두던 수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자신을 비난하는 글뿐이어서 도저히 옮겨 적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만 깨달았습니다. 저는 무척 느린 인간입니다. 걷는 속도와 식사 시간, 말투, 하물며 생각마저 남들보다 더딥니다. 그렇기에 모른 척 지나가도 될 일들에 대해서 자주 또 오래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단지 제 삶에서 그치지 않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나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는 이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타인의 순간으로 돌아가,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소설을 쓰기를 소망합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저의 소설을 좋게 봐주신 신수정 교수님과 편혜영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스무 살의 어느 겨울날, 소설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누군가의 혹평 이후 깊은 어딘가에 갇혀있던 저에게 교수님들의 조언과 격려는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이 감사함을 안고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못내 걱정하면서도 저를 믿으며 언제나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시는 부모님과 오빠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저의 소설을 읽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늘 곁에서 응원해주며 제 소설을 사랑해주는 애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꾸준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지나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심사평

백마문화상은 지금 한국 문학에서 가장 젊은 상상력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문학상이다. 장래 한국 문단의 스펙트럼을 넓힐 작가로 성장할 예비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시간이어서 심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아이디어가 독특한 작품도 있었고, 구성과 문장이 탄탄하고, 재기 넘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있는가 하면 진중하고 묵직하게 삶의 진실과 비의를 건드리는 작품도 있었다.

올해의 당선작인 <우리집에 온 걸 환영해>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기성 작가가 썼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어서 일단 눈길을 끌었다. 과거에 벌어진 일이 현재로 환원될 때, 손 쓸 수 없는 낭패감이 잘 드러났으며, 지금 이 시대에 제기되어야 마땅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놓지 않는 작품이었다. 동생 현이와 함께 손님 접대에 쓸 찻잔을 고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현이네 집에 ‘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은재와 그녀의 친구가 방문하면서 점차 과거의 진실과 관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한 개인의 과거에 드리워진 폭력의 기억이 현재의 그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이자 폭력에 대한 타당한 윤리적 질문이며 동시에 한 개인에게 벌어진 과거에 대한 현재적 무력감까지 성찰해내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리무버블 러브>는 좁은 방 안에 꽉 들어차게 놓여있는 안마의자의 이미지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서툰관계의 균열과 부채감을 안마의자를 이용해 근사하게 만들어냈다. 쉽게 치워버릴 수도 없고, 치운다고 해도 남아 있는 할부금을 계속 납부해야만 하는 어색한 상황이 인물들의 끝장난 관계와 거기서 만들어진 여운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 두 명의 작가들이, 개성과 완숙도를 갖춘 예비 작가들이 한국 문단에서 제 몫을 하는 작가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신수정 교수 (문예창작학과)
편혜영 교수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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