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윤리적인가 <10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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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윤리적인가 <1064호>
  •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1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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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맨 끝줄 소년>

연극 <맨 끝줄 소년>의 연출가 손원정은 “좋은 극장은 무한한 확장성을 잠재하고 있습니다. 좋은 극장은,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그 확장의 가능성이 주는 설렘과 기대로 우리를 들뜨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기 ‘극장’의 자리에 ‘연극’이나 ‘문학’, ‘예술’을 넣어도 의미의 울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카 <맨 끝줄 소년>은 좋은 연극이자 문학, 예술이다.

주인공은 맨 끝줄에 앉는, 말수 적고, 존재감 없는 소년 클라우디오다. 이 소년의 존재를 알아보는 건 문학교사 헤르만이다. 학생들의 무성의한 과제들 속에서, 유일하게 클라우디오의 작문만이 빛이 난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작가로서 기술적 자질은 풍부하나, 윤리적 자세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오가 제출한 작문은 동급생 라파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라파의 집을, 가족을, 가정을 궁금해했다. 자신의 집보다 네 배가 넘는 라파의 넓은 집안이 궁금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던 그는 라파의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궁금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그는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삶이 궁금했다. 오랫동안 남몰래 훔쳐보던 그는 과감하게 라파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써 내려간다.

클라우디오의 위험성을 먼저 인지한 건, 헤르만의 부인 후아나였다. 후아나는 클라우디오가 동급생을, 동급생의 가족을 대상화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헤르만에게 클라우디오를 제지하라 말한다. 하지만 클라우디오를 통해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리 충족하려는 헤르만은 클라우디오를 제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추기는 인상이다. “어떤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면을 찾아내는 건 아주 쉬워. 어려운 건 그 사람을 가까이서,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는 거야. 그 사람의 논리, 상처, 작은 소망들, 그리고 절망을 찾아내는 거지. 인간의 고통, 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그게 진정한 예술의 경지야.”

심지어 글쓰기의 방법론을 알려주는 듯하며 그들의 삶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길 권하는 모양새다. 이런 식이다. “등장인물이 원하는 게 있는데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문제를 만나게 되는거야. 라이벌이나 적이 나타나는 거지. 주인공이 겪는 갈등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도 해. 등장인물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이야기하는 거지. 주인공이 과연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할지를 독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거야.”

그 즈음 클라우디오의 훔쳐보기 욕망은 훔치기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 욕망은 자신에게 없는 엄마를 소유하고자 하는, 모성애에 대한 욕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모성애에 대한 욕망은 또 이성애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된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욕망을 알아챈 후에도 그저 글쓰기의 방법론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클라우디오의 작문은 어떻게 끝이 날까?

좋은 작품은 무한한 확장성을 잠재하고 있다. <맨 끝줄 소년>은 훔쳐보기 욕망에 대한 질문이고, 이는 곧 윤리의 문제를 소환한다. 한편 이 작품은 문학론, 예술론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운건,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대답에 있다. 작가 후안 마요르카는 클라우디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예술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장식품이에요.” 헤르만의 부인 후아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문학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야.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또한 좋은 작품은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된다. 좋은 작품은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들의 머릿속에 질문을 던진다. 책을 덮고, 극장을 나선 후에라도 대답을 찾아 삶 속에서 대답을 실천하라 권한다. 연극 <맨 끝줄 소년>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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