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유해 <10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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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유해 <1064호>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1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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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3의사 묘역. 이곳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다. 백범 김구는 1946년 6월에 3의사 유해를 봉환하여 7월 6일, 효창공원에 묻었다. 이때 김구는 안중근의 유해가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3의사묘 옆에 가묘를 만들고 표석을 세웠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

금년 3월에 안중근 가묘에 3의사 비와 마찬가지로 ‘의사 안중근 묘비’가 세워졌다. 비 아래에는 “(전략)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중국 뤼순 감옥 인근에 매장 되셨으나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여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2.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반, 일본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 기한은 5일이었다. 2월 17일에 안중근은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만났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도록 한 달의 시간을 주면 항소를 포기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히라이시는 몇 달이라도 집필할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이를 믿고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일설에 따르면, 어머니 조마리아가 두 동생을 급히 보내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당신의 뜻을 전한 것이 항소 포기의 주된 이유였다 한다.

사형을 앞둔 안중근은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1909년 3월15일에 『안응칠역사』를 탈고하고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본은 사형집행일을 3월 26일로 앞당겼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안중근은 서문과 전감(前鑑) 일부를 쓰고, ‘현상 · 복선(伏線) · 문답’이란 목차만 적은 후 펜을 놓았다.

#3. 3월 11일에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경근과 공근, 두 동생과 빌렘 신부를 면회한 자리에서 두 가지 사항을 유언으로 남겼다.

하나는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언’이다. 이 유언은 <대한매일신보>가 안중근이 죽기 하루 전인 3월 25일에 보도했다.

“나는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는다. 그러니 우리 2천만 형제 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을 면려(勉勵)하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유지(遺志)를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유해에 대한 유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원래의 위치에서 고향으로 옮겨서 장례를 치름. 안중근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4. 3월 26일 사형집행일. 뤼순의 하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안중근은 평소 그를 지성으로 돌보아 준 간수 지바 도시치가 부탁한 휘호를 써 주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후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내준 흰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마지막 유언을 묻는 집행관에게 안중근은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건대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데 힘쓰기를 기원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동양평화 산창’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행관은 만세 삼창을 불허했다.

10시 4분에 안중근은 교수대에 올랐고 10시 15분에 절명했다. 10시 20분에 시신은 교회당에 옮겨져 우덕순 · 조도선 · 유동하 등 거사했던 동지들이 영결하였다.

사형 집행 후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은 필사적으로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절했다. 안의사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聖地)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오후 1시경 일본은 안중근의 시신을 뤼순 감옥 묘지 어느 곳에 비밀리에 매장했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유해는 아직도 위치조차 아리송하다. 2008년 3~4월에 남북 합의로 뤼순 감옥 공공묘지 발굴 작업을 했지만 허사였고, 이후 중단됐다.

2018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을 남북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냉랭한데 잘 추진될 수 있을까?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 유해, 조속히 돌아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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