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수 기자를 만나봤습니다 [10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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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수 기자를 만나봤습니다 [1057호]
  • 오상훈 기자
  • 승인 2019.05.2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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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안녕하세요 장혁수 기자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A. 안녕하세요. 장혁수라고 해요. ‘TV조선’에서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어요.

Q : 그렇군요. 기자의 하루가 궁금한데요, 하루를 간략하게 묘사해줄 수 있나요?
A. 부서별로 차이가 있어서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부 경찰팀을 기준으로 얘기할게요. 경찰팀 같은 경우에는 각자 구역을 맡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마포 라인을 담당해요. 마포 라인에는 마포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 은평경찰서, 서부경찰서 4곳이 포함돼요. 아침에 일어나면 경찰서로 출근해 본인이 맡은 라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해야 해요. 그다음 상부에 보고 하는데, 만약 본인이 몰랐던 일이 벌어지면 그 전에 보강 취재를 하는 거죠. 보고한 것을 토대로 아침 회의가 열리는데 이때, 맡은 라인의 사건에 대한 취재 명령이 떨어지면 취재에 돌입해요. 뉴스를 만드는 거죠. 뉴스가 잡히면 카메라 기자, 오디오 맨, 운전기사 분들이랑 팀을 꾸려 취재를 진행해요. 그다음 회사로 복귀해 기사를 작성하고 데스킹을 받는 거죠. 여기서 끝나면 참 좋겠지만, 영상이다 보니 영상 편집과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해야 해요. 이 과정이 완성돼야 최종적으로 뉴스가 나가는 거예요. 그게 보통 저녁 9시쯤이고 이것이 일상이에요. 만약 아침 회의에서 뉴스가 잡히지 않는다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취재를 하기도 하고, 경찰이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기도 해요.

Q : 그렇다면 중계는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A. 요즘에 중계 비중이 늘었는데, 시청자들이 정제된 것보다 생생한 현장 느낌을 원해서 그러는 것 같아요. 재난이나 사건 현장은 보통 중계를 하죠. 중계 같은 경우에는 카메라 앞에 대기해 실시간으로 하는 것이니까 녹화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려요.

Q : 안 떨리세요?
A. 처음에는 멋모르니까 안 떨렸는데 하다 보니 더 떨려요. 실수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해서 그래요.

Q : 듣기만 해도 굉장히 바빠 보이는데, 특별히 힘든 부분은 없나요?
A. 힘든 점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날씨에요. 뭘 하든 간에 밖에 나가서 현장에 가고, 사람 만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추우면 추운 대로 힘들고 더우면 더운 대로 힘들어요. 작년에 폭염 취재를 하러 종로 쪽방촌에 간 적이 있어요. 소방차가 지면 온도를 낮추기 위해 살수를 하고 쪽방촌 주민분들은 나와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죠. 이를 위해 기자들은 땡볕에 온종일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진짜 힘들었죠. 반대로 지난 겨울 안희정 지사 검찰 조사가 진행 중일 때는 날씨가 엄청 추웠어요. 그럼에도 조사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으니까 새벽까지 법원 앞에서 기다린 거죠.

Q : 교대가 없었나요?
A. 라인에 기자가 두 명인데, 선배가 뉴스에 들어가면 제가 현장에 계속 있어야죠. 게다가 막내니까요….

Q : 요즘에는 방송기자와 신문기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하잖아요? 공감하시나요? 
A. 솔직히 말하면 신문사도 앵커를 뽑고 있어요. 신문과 방송의 경계가 진짜 허물어져서 방송기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미디어로서 신문과 방송의 차이를 말하자면, 영상이 더 직관적이니까 강렬하게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우위가 있겠죠. 그리고 신문사도 영상미디어 직군을 채용하는 것을 보면 미래 전망은 방송 쪽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긴 해요. (웃음)

Q : 최근 사회부에서 기획취재부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원래 원했던 부서가 있나요?
A. 정치외교학과를 복수전공 했어요. 그 이유가 정치부 기자를 막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입사하고 나서는 사회부에 배치됐죠. 정치부를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사회부가 역동적이고 다양한 사건들이 많아서 재밌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요. 시민부터 소방관과 경찰, 게다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전제하에 사회 유력가를 만나기도 해요. 생각보다 사회에 범죄자,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기획취재부는 데일리뉴스를 쓰는 부서는 아니고 호흡이 길게 한 가지 이슈를 깊게 취재하는 부서라서 성격이 좀 달라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사회부로 돌아가고 싶네요.

Q : 기자들은 처음 입사할 때 받는 교육이 있다고 하죠. 기자님도 받았나요?
A. ‘하리꼬미*’라고 해요.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거죠. 첫 보고가 아침 여섯 시인데 일어났다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보고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죠. 그리고 마지막 보고가 밤 11시 반인데 그 보고가 끝났다고 바로 잘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마지막 보고가 맘에 안 들면 선배들은 더 돌라고 하죠. 또, 수습 일지를 써야 하므로 씻는 건 불가능해요. 저는 서대문 경찰서에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다른 언론사 수습기자들도 같이 있는데, 다들 돌아다니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근처 호프집에서 치맥을 먹고 들어와 30분 잔 다음에 또 도는 것이 일상이었죠. 근데 이게 추억이에요. 힘들어 죽겠는데,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극한까지 함께 갔던 것이 재밌었던 것 같아요.
*하리꼬미 : 잠복하거나 망을 본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 명사. 언론계에서는 밤을 새며 경찰서를 돈다는 뜻을 가진 은어.

Q :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끔찍하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하리꼬미 첫날, 그러니까 수습 교육 끝나고 맡은 구역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소방 보고를 확인하다가 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심장이 벌렁벌렁했죠. 첫날인데. 현장에 가니까 우울증에 걸린 20대 한 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통상적으로 일하는 첫날에는 경찰서 가서 인사하고 명함 돌리는데 그런 걸 하기도 전에 자살 사건을 다뤄야 했던 것이 잊히지 않아요. 일에 대한 첫인상이 강렬했던 거죠. ‘아, 내가 진짜 자살과 같은 사건들을 다루는 현장에 온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사건들을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그 이유와 배경 등을 알아내 뉴스로 만들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 거예요.

Q : 정말 힘드셨겠어요.
A. 고마워요.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요.

Q : 그렇게 힘드신데, 보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하길 정말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A. 사실 흔치는 않아요. 낯간지러운 얘기긴 한데, 취재하는 진심을 인터뷰이가 알아줬을 때 기자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제천에서 화재 참사가 났을 때, 사고로 가족을 잃은 분이 계셨어요.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러운데, 이게 또 제 일이잖아요. 빈소에서 식사하고 그분과 오래 얘기를 나누고 나니 결국 인터뷰를 해주셨어요. 장혁수 기자에게 진심을 봤고, 내가 아픈 걸 이해해주는 것 같다며. 그 분의 얘기를 알리는 것이 제 일이지만 그 분이 그걸 알아주신 게 되게 고맙더라고요. 그 분과는 아직도 가끔 연락해요.

Q : 그럼 반대로 인터뷰이가 완강하게 거부할 때도 있나요?
A. 무시하는 분도 많아요. 사람한테 무시당한다는 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죠. 하지만 일상처럼 겪는 일이어서 감내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무시당하고 욕먹어도 허허 웃어넘기는 거죠. 근데 이게 가끔 힘들 때가 있어요.

Q : 댓글에는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본인이 나오는 기사의 댓글을 보실 텐데요.
A. 댓글 중에 재밌는 것이 되게 많아요. 무의미한 비방도 있고 뉴스에 대한 피드백도 있죠. 댓글을 통해 나오는 비판을 반영하려는 편이에요. 댓글을 단다는 것 자체가 그 뉴스를 관심 있게 봤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댓글이 많을수록 기분이 좋아요. 무플이 악플보다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Q : 댓글, 몇 개까지 달려봤나요?
A. 가을에,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져서 악취가 나잖아요. 악취가 나는 원인을 분석한 리포트를 한 적이 있는데, 댓글이 1,500개나 달렸어요. 이걸 보면서 느낀 건, 거창한 게 아니라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흔히 보는 현상의 배경이 뭔지를 다루는 게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죠. 이런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에요.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발견해야 하니까요.

Q : 요즈음에는 AI가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고 하죠. 이런 시대의 기자로서, 기자의 전망에 대 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A. AI기자는 제가 대학 다닐 때도 있었어요. 당시에도 교수님들께서는 곧 AI가 기자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스포츠 결과나 주식 시장 변동 기사는 이미 AI가 쓰고 있다고 말하셨죠.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기사 중 AI가 쓴 기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요. 저는 AI가 기자를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AI가 기본적으로 입력된 데이터로 기사를 작성하기 때문이에요. 기자에게 데이터는 통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듣는 것도 데이터에 포함돼요. 결국, 사람이 없으면 그 데이터를 축적할 수 없어요. 게다가 현장에 가야만 쓸 수 있는 르포기사 같은 것도 AI는 쓸 수 없죠. 물론 글을 더 수려하게 쓸 수는 있겠죠. 하지만 현장 취재는 대체될 수 없어요. 결론은, AI에게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
은 아니에요.

Q : 그렇군요. 기자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장혁수 기자님에 대해서 궁금해지는데요. 2010년도에 디지털미디어학과에 입학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A. 옛날부터 막연하게 기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막연하다고 말한 이유는 TV에서 말하는 것이 단순히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많은 사람한테 얘기할 수 있고 그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래서 디미과에서도 저널리즘과 관련된 수업을 많이 들었죠.

Q : 기억에 남는 수업이나 교수님이 있나요?
A. 문신일 교수님 수업을 좋아해서 맨날 앞에 앉았어요. 어느 날 교수님이 <SNS 활용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강의하시다가 갑자기 구글 입사 문제 중 하나라며 골프공의 홈이 몇 개인지 물어보시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앞자리에서 “99개요”라고 대답했는데, 교수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게 별거 아닌 경험인데, 갑자기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교수님의 질문에 생각 없이 대답했던 것처럼 입만 살아있었던 거예요. 그 이후부터 이 순간이 가끔 생각나면서, 아무 말을 뱉을 때마다 저를 제재해줬던 것 같아요. 모든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거죠.

Q : 골프공 홈 개수는 몇 개였나요?
A. 사실 교수님도 모르셨던 것 같아요…. (웃음)

Q : 그렇다면 가장 의미 있던 활동은 무엇인가요?
A. 과 생활은 잘 안 했어요.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3년 동안 휴학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 대신 '비주얼'이라는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그 뒤로 동아리 안에서만 놀았던 것 같아요. 당연히 가장 의미 있는 활동도 비주얼이 됐어요. 우선, 대학토론배틀에 나가서 준우승을 거둔 것도 비주얼 덕분이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타당한 근거를 찾아서 주장하는 훈련을 비주얼에서 계속할 수 있었고, 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어요. 비주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마냥 남들이 이게 맞다고 하면 좋은 거구나 하는 뚜렷한 주관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면, 토론하고 나서 주관을 형성하게 됐죠. 토론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Q : 동기들이 생각하는 장혁수는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나요?
A. 까부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적어도 진지한 타입은 아니었어요. 워낙 어색한 걸 싫어해서요.

Q : 현재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A. 주중에 일하다 보니 주말에 지쳐서 아무것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너무 시간을 날리는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레고를 사기 시작했어요. 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가기도 하고 어렸을 때 추억도 생각나고. 요즘 블록이 어렵게 나와 시간도 오래 걸려서 레고 만드는 게 삶의 낙이에요. 또, 폴라로이드 사진 찍는 것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요.

Q : 마지막 질문이자 의례적인 질문이에요. 나에게 명지대란?
A. 저는 부산에서 살았었고, 대학 때문에 처음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명지대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 7년을 넘게 산 거예요. 저한테는 서울의 첫인상이 남가좌동이었고 백련시장이었어요.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명지대 인근이 저한테 제2의 고향이 된 거죠. 지금도 많이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상암에 살고 있으니까. 진짜 그냥 고향 동네 같아요. 금요일마다 울랄라포차 가서 술 먹고 다음 날 태화장 가서 국밥 먹었던 것이 일상이었으니. 게다가 제가 지금 삶을 사는 데 모든 계기를 제공해준 곳이니까. 아마 오랫동안 못 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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