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 2019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10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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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2019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1056호>
  • 김인기 기자
  • 승인 2019.05.1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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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체육 84) 동문을 만나다

인터뷰 진행을 위해 방문한 자연캠 운동장은 다음날 경기를 대비한 연습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조심스레 인사를 드리자 선수들을 뚫어질 듯 지켜보던 김경래(체육 84) 감독(이하 김 감독)이 기자를 반겼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네요, 날이 덥죠?”라는 가벼운 인사말과 푸근한 미소로 기자를 맞이한 김 감독은 본인이 살아온 삶과 축구에 대해 찬찬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행복했던 대학 시절

“저는 스카우트 제의로 입학했어요. 입학 직전인 1983년에 실업팀도 참여하는 가장 큰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우리 대학이 준우승했었죠. 이외에도 여러 우승경력이 있는 명문이었기에, 영광으로 생각하고 입학했어요” 그는 학창시절이 너무나도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훈련이나 연습경기를 인문캠에서 진행했는데 다른 학우들이 스탠드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열렬하게 응원을 보내준 것이 기억에 남아요. 덕분에 타 학과 학우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연습이 없던 날에 맛있는 것을 사준다거나 했던 기억도 있고요. 요즘에는 보기 드문 그런 모습이죠? (웃음)” 추억에 잠긴 듯한 김 감독은 1987년 대통령배 우승을 가장 보람찬 순간으로 꼽았다. 당시 그는 대회 MVP까지 수상하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대학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시절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묻자 그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힘들었던 점은 많이 없었어요. 재학 기간에 대회 성적도 잘 나왔고, 선후배와의 관계도 원만했거든요. 다만, 대학 시절부터 프로까지 햄스트링(허벅지 뒤쪽 부분의 근육으로 부상 재발 확률이 높은 부위) 부상을 안고 뛰었습니다. 좀 괜찮아져 뛰다가 무리하면 다시 부상이 오고 그랬죠. 그래도 부상을 회복하면 과거와 같은 좋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크게 힘들진 않았어요” 어린 시절 몸이 약한 편이었다는 김 감독은 그런데도 축구가 너무나 좋았다고 한다. “아버님이 교사셔서 축구공을 접하거나 학교에 있는 TV를 통해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등 축구를 접할 기회가 많아 자연스레 흥미가 있었어요. 하지만 당대에는 축구선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제 체격이 듬직한 편이 아니라 집안에서 반대했었어요. 그러나 계속 축구를 하다 보니 너무 재밌어서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됐죠. 만약, 축구계가 아니었다면 아버님을 따라 교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당시 좋아하는 선수가 있었냐는 질문에 “차범근 선수죠 (웃음) 중학생 즈음? 차범근 선수가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어 저녁 늦게까지 독일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지켜보곤 했어요. 아무래도 차범근 선수가 저 말고도 많은 어린 선수들에게 영향을 줬죠”라며 웃었다.

프로는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달렸다

김 감독은 졸업과 동시에 당시 한국의 레알 마드리드라 불리던 대우로얄즈(현 부산아이파크)에 입단했다. “대통령배 우승과 MVP 수상으로 프로 지명을 받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대우 로얄즈가 지명할 줄은 몰랐습니다. 딱 그 순간 그동안의 고생에 보답받아 기쁘면서도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대우에서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점이 가슴 한쪽에 걸렸죠.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수많은 선수의 드림클럽에 입단한다는 생각에 들뜨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대우에 입단할 때까지는 큰 고난 없이 선수 생활을 해온 김 감독, 하지만 대우에서 그는 쉽게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학과 달리 프로에서는 방출이 가능하기에 더 어려웠어요. 사실 경기에 많이 못 나갔을 때, 다른 팀에서 이적 제의가 있었는데 거절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잘못된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자존심 때문에 ‘반드시 대우에서 성공해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고등학교 시절 좋은 활약으로 축구 명문 명지대에 왔고, 대학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명문 클럽에 입단했기에 ‘대우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멍청한 생각을 한 거죠. 나중에 가서야 느낀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이었구나’였습니다. 선수는 운동장에서 뛰어야 의미가 있다는 걸 알기에는 아직 어렸죠 (웃음)” 대우 로얄즈에서 방출당한 김 감독은 전북 버팔로에 입단해 1994년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버팔로 시절엔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대우에서와는 달리 감독님이 믿어주시면서 편하게 경기를 한 게 주요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원하는 대로 안 움직이거든요.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이때 알았죠. 지금도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감이라고 가르치면서 자신감이 부족한 선수를 격려해주고 있어요” 방출이라는 힘든 시기를 견딘 원동력에 대해 김 감독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버틸 수 있어요. 대우에서 방출당할 때, 배신감이 들었던 게, 과거 이적 기회가 있었음에도 대우에서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대우의 라이벌인 울산 현대의 차범근 감독을 찾아가 “대우에게 복수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라고 했어요 (웃음). 거기서 뛰지는 못했지만 결국 리그 꼴찌였던 버팔로가 1994년 거둔 3승 중에서 2승을 대우에게서 뺏어 복수에 성공한 셈이죠. 당시 진짜 이를 갈고 뛰었어요. 이런 강한 의지가 선수 생활을 지속할 힘이 됐죠”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지 않던가. 1994년 시즌 후반 김 감독은 득점 랭킹 2위였으나, 최종 순위는 4위로 시즌을 마쳤다. “골 욕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당연히 득점왕을 해보고 싶었죠. 대우에서 못했던 것을 버팔로에서 이루고 싶었어요. ‘최소한 3위는 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린 것 같아요. 욕심을 부리다 보니 자연스레 본인의 플레이가 안 나왔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결국, 축구는 피지컬만큼 정신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축구 진짜 어렵죠? (웃음)” 본인은 어떤 선수였는지에 대한 물음에 김 감독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선수 생활하던 선후배가 저를 인정하는 한 가지가 바로 몸 관리에요. 지금도 저는 커피, 술, 담배를 아예 안 해요. 특히 선수 시절에는 취침시간이 11시라 10시 반이 되면 잘 준비를 했는데 은퇴 전 시즌인가? 거의 띠동갑 후배가 룸메이트였는데 드라마가 보통 11시 조금 넘어서 끝나니까 제가 못 보게 해 그걸 참느라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웃음). 프로축구 선수가 드라마를 본방송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녹화로 볼 수도 있는 거고 내일 훈련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많이 혼냈죠. 은퇴하고 대학 코치를 하면서 다시 만났는데 우리 선수들에게 그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더라고요. 대학 시절부터 저는 성공한 선수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생활했죠. 가끔은 ‘작은 일탈이라도 해볼걸’이라는 작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선수를 한다면 똑같이 생활했을 것 같네요"

사랑하는 모교이기에 명지를 다시 찾았다

은퇴 후 모교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교이기 때문이죠. 플레잉코치(선수 겸 코치)를 제의한 프로 구단이 있었지만, 모교였기 때문에 코치로 부임했어요. 모교가 아니었다면 프로에 남았을 것 같네요. 사실 프로 생활을 하면서도 은퇴 후 모교에서 지도자 제의가 있다면 무조건 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에 남으라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많았지만, 저는 이곳을 선택했어요. 바보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명지대 학생이던 학창 시절이 너무나 좋았거든요. 선후배 및 동기들과 학교에서 공을 차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프로 생활과 대학 생활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대학 생활입니다” 그렇게 명지로 돌아온 이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졸업한 후 32년간 끊겼던 전국대회 트로피를 다시 들어 올렸다. “선수 때 우승한 1987년은 제가 1학년 때였던 1984년에도 우승을 했고 대통령배 외에도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좋은 순간이었지만 극적인 부분은 부족했어요. 하지만, 이번 대회는 훨씬 감격스러웠네요. 지도자로서의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고 오랜 기간 쌓인 동문의 한을 풀어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32년 만이잖아요...” 잠시 운동장을 바라보며 제자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꼼꼼히 지켜보던 그는 다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도자는 단순히 축구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성 교육까지 담당해야 할 교육자라 생각해요. 일례로 고등학생들과 경기를 할 때가 있는데, 나이가 위라고 해서 상대를 깔본다거나 하는 행동이 보이는 선수가 있어 따끔하게 꾸중한 적이 있어요. 실력보다 인성이 먼저 바탕이 돼야죠” 그는 우승을 열망하며 경기 전 외치던 1987 명지를 2019 명지로 바꾸고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근 몇 년간 리그 왕중왕전을 못 나갔는데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왕중왕전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 하나에요. 또한, 작년 ‘아시아 대학 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해 ‘세계 대학 축구 선수권대회’에 태국과 함께 아시아 대표로 참가 자격이 주어졌기에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목표 둘이고요 (웃음)” 김 감독에게 우리 대학은 단순한 모교 그 이상의 존재처럼 보였다. 애교심으로 가득 찬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게 명지대요? 내 집이자 내 꿈같은 존재죠. 학창 시절에는 꿈처럼 좋은 기억만 있었고, 프로 시절에는 늘 돌아오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현재는 돌아와서 집이 됐기 때문이죠 (웃음)” 시작과 같은 미소로 인터뷰를 마무리한 김 감독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기자를 뒤로하고 바로 운동장으로 이동해 쉬고 있는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다.

축덕!들을 위한 김경래 감독과의 축구 TALK TALK!

Q. 감독님이 왼발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야구는 왼손잡이가 유리하다고 하는 데 축구도 주로 사용하는 발에 따른 유 · 불리가 있나요?
A. 축구는 통상적으로 왼발잡이가 더 적습니다. 그 수는 더 적지만, 왼발잡이들이 좀 더 테크니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왼발잡이치고 발기술이 부족한 선수는 많이 못 본 것 같네요.

Q. 최근 국가대표에 대한 여론이 좋은 상황인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축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A. 선수 육성이 우선돼야 해요. 특히 유소년 육성을 장기적인 관점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관중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새로운 에이스들이기에 그러한 선수들을 육성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봐요. 리그적인 측면에서는 팀이나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의 육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과거 안정환이나 김주성 같은 선수 말이죠. (박)지성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에서 뛸 때, 국내에 맨유 팬이 많이 생긴 것과 같은 맥락인 거죠. 

또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재미있는 축구를 하면 관중들은 자연스레 따라올 테니까요. 하지만 프로 감독들은 경기력보다는 성적이 우선돼야 하니까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거 같아요. 제가 프로 감독으로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한 경기를 하고 해고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경기력을 택하겠습니다.

Q. 해외축구 즐겨보시나요? 좋아하시는 감독이 있다면?
A.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서 조금 뜸해졌지만 (박)지성이가 맨유에서 뛰던 시절에는 빠짐없이 챙겨봤죠. 오늘(인터뷰 날짜 5/2) 새벽에도 ‘바르셀로나 vs 리버풀’의 경기가 있었어요.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후에 노트북으로 챙겨봤죠. 바르셀로나가 기술적으로 한 수 위더라고요. 

감독 직위에 있다 보니 경기를 보면서도 전술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보는데 위르겐 클롭(Jurgen Klopp) 리버풀 감독의 철학에 관심이 많아요. 특히 도르트문트 시절 게겐프레싱(클롭 감독 특유의 강도 높은 압박 축구)을 보면 헤비메탈과 같은 느낌이라 할까요? 정상급 감독들을 보면서 제 욕심은 맨체스터 시티 같은 빌드업, 리버풀 같은 압박, 바르셀로나 같은 패스를 갖춘 팀을 만드는거죠. 하나의 감독만 꼽으라하면 앞서 말한 클롭 감독이 일종의 롤모델이에요. 바르셀로나에게 3대0으로 패했던데 2차전에는 어떤 전술을 가져올지 궁금하네요.(이후 5/8 진행된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클롭의 리버풀은 4대0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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