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감옥 <10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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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감옥 <1055호>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7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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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발상지 그리스를 갔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아테나 여신을 모신 처녀의 집, 세계문화유산 1호)은 기둥만 남아있고 주변은 폐허다. 내려가면서 입구에 있는 흉물스런 바위산 아레오파고스 언덕을 올랐다. 이곳은 임기 1년의 아르콘들에 의한 귀족정치를 한 곳이고 대법원이 있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한 곳이기도 하다. 다음엔 소크라테스(BC 469∼399) 감옥을 갔다. 필로파포스 기념탑으로 가는 길에 있다. BC 399년 봄에 시인 멜레토스와 정치가 아니토스 그리고 소피스트 뤼콘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고발 사유는 소크라테스가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였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이들은 게으른 말(馬) 아테네를 자극시키는 ‘등에(쇠파리)’ 같은 소크라테스가 눈엣가시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 있는 시민법정에 출두했다. 재판은 하루 동안 진행되었는데, 배심원 501명 중 유죄 281명, 무죄 220명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을 정하는 2차 재판에서 고발인은 사형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추방령이 내려지면 받아들이지 않겠음을 확실히 한다. 그는 외지에서 침묵을 지키고 살라는 것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고 날마다 대화로 무지를 캐묻는 것이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자 배심원들은 건방지다고 생각했고 배심원 360명이 사형에 표를 던졌다. 그런데 사형은 한 달간 미루어졌다. 아폴론 신의 탄생지 델로스 섬에서의 종교의식 기간이어서 사형집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크리톤을 비롯한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도주를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제자들과 즐겁게 담소하다가 독 당근 차 햄록을 마시고 죽었다. 70세였다. 

한편 소크라테스 명언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는 사실이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아폴론을 모시는 델포이 신전 입구 기둥에 새겨진 경구이다. '파이드로스' 첫 머리에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델포이의 경구에 따라 나 자신을 알려고 하였으나 아직도 모르고 있다네”라고 말한다. 이 ‘델포이의 경구’가 바로 “너 자신을 알라”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플라톤(BC 427~347)의 책, 대화』편「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 , 「파이돈」 등 어 ,디를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권유한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 테바이나 메가라 같은 이웃나라로 간다면 그곳의 애국자들은 나를 법률을 파괴하는 자로 의심할 것일세. 또한 배심원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렸다는 확신을 심어줄 것이네. (중략) 탈옥했다는 말을 들려주면 사람들이 듣고 좋아할 테니까. 하지만 살 날이 얼마나 남지 않은 것 같은 노인이 뻔뻔스럽게도 법률을 어기면서까지 탐욕스럽게 삶에 집착한다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 (후략) 
(크리톤) 나는 할 말이 없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만두게나, 크리톤. 그리고 법률이 권하는 대로 하세. 신께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시니까.” (「크리톤」의 마지막 부분)

그렇다면 ‘악법도 법이다’란 말이 어떻게 소크라테스 명언이 되었을까? 그 단초는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교수 오다카 도모오가 제공했다. 그는 1937년에 펴낸 '법철학(法哲學)'에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고 썼다. 더 큰 문제는 오다카의 '법철학'이 여과 없이 국내에 수용된 점이다. 2003년까지도 중고교 교과서에는 ‘악법도 법’이란 말은 소크라테스 명언으로 수록되었다. 그런데 2003년 11월에 헌법재판소는 1년 가까이 초중고교 사회교과서를 검토한 끝에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 일화를 준법정신 강조 사례로 사용하는 것을 고쳐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동아일보. 2004년 11월 7일)

아테네의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공포정치에서 민주제로 회복되었지만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였고 중우정치(衆愚政治)가 판쳤다. 정치가와 소피스트들은 배심원을 선동하여 ‘등에’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이는 헤겔의 말처럼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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