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인형은 둘이었다 -연극 인형의 집- <10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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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인형은 둘이었다 -연극 인형의 집- <1053호>
  •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3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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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남편을 떠났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아이들을 버렸어요?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남편과 자식을 떠나서 지금 당신이 처한 것과 꼭 같은 문제점에 처해 있어요? 당신은 난파한 배에서 사람들을 구했지만 뭍으로 갈 방법은 알려주지 않은 거나 다름없어요.”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줄거리를 일축하면 이렇다. 안온한 자신의 삶이 인형의 삶이었다고 깨달은 노라가 진정한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1879년 코펜하겐 콘겔리게 극장에서 초연된 <인형의 집>은 초연과 동시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건 노라의 가출 장면이었다. 분노한 이들은 “어떻게 어미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갈 수 있느냐”며 노라를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이듬해 <인형의 집>이 독일에서 공연되었을 때 일이다. 노라 역을 맡은 니만 라베는 “나는 절대 아이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마지막 장면 연기를 거부했다. 때문에 입센은 독일 공연을 위한 각색본을 따로 써야 했는데, 이 각색본에 따르면 집을 나서려던 노라가 남편 토르발트의 한 마디에 주저앉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아이들이 일어나 엄마를 찾을 텐데, 그때 아이들은 엄마 없는 아이들이 되어 있을 것이요, 과거에 당신에게 엄마가 없었듯이.”

미국과 영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형의 집>을 중산층 가족의 멜로드라마로 바꾸어 버렸다. 1882년 미국 공연에서는 토르발트가 자기 대신 차용증에 서명한 아내에게 감사하고 둘은 화해를 한다. 1886년 영국 공연에서는 토르발트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울부짖고, 노라는 토르발트 같은 고상한 남편에게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한심한 아내라고 울먹인다. 물론, 이 두 공연에서 노라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채만식이 1933년「인형의 집을 나온 연유」라는 소설로 가출 후 노라의 삶을 추적했다. 집을 나온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노라는 카페여급이 되어 뭇 사내들의 인형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다 정조를 읽고 투신자살을 시도하지만, 다행히 구사일생 목숨을 보전한다. 이후 제본소 직공이 된 노라는 다시 남편을 마주친다. 제본소 직공과 제본소 감독관의 관계로. 이들 외에도 노라의 후일담은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4월 10일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이는 연극 <인형의 집 Part 2>는 가출 후 15년 만에 집을 찾은 노라의 이야기다. 그동안 이름을 버리고 과거를 지운 노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글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있다. 그에게 영향 받은 많은 여인들이 가출할 정도로, 그의 이야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문제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노라는 토르발트가 아직 이혼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혼을 위해 집을 찾는다. 

앞서 인용한 대사는 노라의 막내 딸 에미의 대사다. 다행히 무책임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는 비치지 않는다. 부재했던 엄마에 대한 애틋함이나 그리움도 보이지 않는다. 에미는 노라의 무책임함에 대해 냉담하게 말한다. “당신은 난파한 배에서 사람들을 구했지만 뭍으로 갈 방법은 알려주지 않은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면서 에미는 이혼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 노라는 에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아직도 이야기는 반의반이나 더 남아있다.

<인형의 집>은 오랫동안 노라의 여성해방 서사로 읽혀왔다. 그 과정에서 토르발트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화신으로 해석되었고, 많은 연출가가 그 부분을 과장해 토르발트를 괴물로 연출했다. 그런데 원작의 토르발트는 좀 다르다. 그에게 ‘화신’이란 표현을 붙인다면, 그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화신에 가깝다. 원작 속 토르발트는 도덕적이며 금욕적이며 근면한,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고, 달리 표현해 그 역시 당대의 지배적 가치인 자본주의 정신에 포박된 인형인 셈이다. <인형의 집>이 관객의 공감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 집에는 인형이 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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