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호찌민 -2- <10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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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호찌민 -2- <1053호>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31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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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2월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호찌민과 프랑스의 합의가 깨진 것이다. 1947년 10월 7일에 프랑스는 베트남 본부 비엣 박을 공격하여 호찌민 체포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호찌민은 산악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그러던 와중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프랑스를 전폭 지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고전했다. 호찌민은 1953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신뢰를 얻었고, 베트남 중부와 북부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민심이 전쟁을 좌우했다. 

베트남군은 1954년 5월 6일에 디엔 비엔푸에 요새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하지만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또 다시 분단시켰다. 북베트남은 호찌민이, 남베트남은 응오 딘 지엠이 정권을 잡았다. 

호찌민은 1954년 12월부터 프랑스 총독 관저 전기공이 살던 3칸 집에서 살았다. 각료들은 주
석궁에 살 것을 권유했지만 단호히 거부했다. 전기공이 살던 집은 침실 · 식당 · 집무실이다. 집무실 벽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금 더 가니 2층 목조 건물이 있다. 이 집이 호찌민이 1959년부터 1969년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냐산’이다.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집무실과 침실이 있다. 집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책장이 있다. 책상에는 타자기 한 대와 전기스탠드뿐. 

언젠가 호찌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치는 부패보다 더 나쁘다.” 
그런데 왜 호찌민은 냐산에서 살았을까? 통일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선 군인들과 동거 동락하기 위함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제네바 협정에 근거하여 1956년 7월에 치러질 총선에서 호찌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를 거부했다. 미국도 남베트남을 지지했다. 1956년 7월에 호찌민은 북베트남 국민에게 통일을 위해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1960년 12월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이 결성되고 1961년 2월에 인민해방군이 창설되었다.

베트남 내전이 시작되자, 베트콩은 호찌민과 연합하여 민족해방전쟁을 본격화하고 지엠 정권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노력 또한 필사적이었다. 1961년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는 비전투 군사요원들을 파견했다. 미군 고문단의 수는 1960년 900명에서 1962년 말에 1만 1,000명으로 늘어났다. 

1964년 8월초에 통킹 만 사건이 터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북베트남도 라오스를 경유하는 호찌민 루트를 통해 정규군을 남파하여 전쟁은 확산되었다. 1965년 3월에 미군 해병을 필두로 대규모 지상군이 다낭에 상륙했다.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도 참전했다. 반면 북한은 호찌민을 지원했다. 미군은 1964년 2만 3,300명에서 1966년 38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미국은 호찌민을 쉽게 이기지 못했다. 베트콩의 은폐 · 잠복 · 기습공격에 마냥 시달렸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인민해방군은 테트(음력설)에 남베트남의 41개 도시를 기습 공격했고, 사이공 소재 미국 대사관, 대통령궁 등이 피격되었다. 

전투는 미국이 이겼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만 7,000명이 전사했고 미군 전사자는 2,5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으로 완패했다. 미국 여론이 바뀌어 반전(反戰)이 확산되었고, 1968년 3월 31일에 존슨 대통령은 재선 출마를 포기했다.

1969년에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6월에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2만 5,000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폭격기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습을 하였고. 심지어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그런데 미군의 싸움은 딜레마였다. 게릴라전으로 미군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마침내 7월 20일에 호찌민은 ‘미국은 지고 있다’고 말했다.1969년 9월 2일 호찌민이 별세했다. 9월 8일 장례식은 단 35분 만에 끝났다. 호찌민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는 시신을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지키지 않고 영묘에 안치했다.

“내 시신은 화장해서 재는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 하나는 중부, 하나는 남부 베트남에 뿌려다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 날 혁명세력은 감격에 겨워 ‘호 아저씨’ 노래를 불렀다. 사이공 시는 1976년에 호찌민 시로 개명(改名)됐다. 호찌민에 대한 헌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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